이탈리아
(여행시기 : 2022.7)
베니스 비엔날레를 보러 유럽에 갈 때마다, 간 김에 들른 다른 도시의 전시들이 비엔날레보다 항상 더 좋았던 경험이 있다. 어쩌면 이건 개별 큐레이터의 역량을 넘어선 문제일 수도 있다. 애초에 비엔날레라는 것 자체가 한 번에 소화할 수 있는 지각적 한계를 초월하므로 특정 주제를 내세워 전시를 꾸리는 것이 흥미롭기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개별 작품들이 전체에 묻혀서 기억나지 않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지금까지 성공했던 유일한비엔날레는 비엔날레의 백화점식 성격 그 자체를 주제로 삼았던 마시밀리아노 지오니 감독의 제13회 베니스 비엔날레밖에 없다고나 할까… 차라리 각 국가관의 작품을 보는 것이 더 의미있다(국가 대표 작가를 내세운다는 방식 자체가 구식이라고 하더라도).
작년 여름에도 이 법칙 아닌 법칙은 어김없이 적용되어서, 거대한 규모의 전시를 다 소화하느라 헥헥했던 베니스에서보다 밀라노와 로마에서 작지만 알찬 전시를 더 볼 수 있었다. 그 전시장 중 적지 않은 숫자가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옛 건물을 현대미술관으로 개조한 곳이었다. 로마의 팔라초 델레 에스포시지오니(Palazzo delle Esposizioni)도 그중 하나였다.
이탈리아 비디오 아트의 역사를 주제로 한 전시를 보러 간 거였는데, 그 전시도 재미있었지만 뜻밖에도 개인적 사심을 채울 수 있는 전시를 발견하게 되었다. 뤼디거 글라츠(Ruediger Glatz)라는 독일 사진작가가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세계를 주제로 한 전시 “Reflecting Pazolini”를 열고 있었고 그중 한 파트가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세계와 관련된 의상을 입은 틸다 스윈튼을 촬영한 것이었다! 그것도 한두 점이 아니라 전시장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아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틸다는 나의 최애 여배우 중의 한 명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파졸리니의 영화를 한 편도 본 적이 없어서 디테일한 것은 알 수가 없었지만, 틸다가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사진 자체도 설명적이기보다는 암시적이어서 틸다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잘 어울렸고. 규모가 크고 분위기가 엄숙해서 사진 같은 매체는 눌리기 십상인 공간인데 디스플레이도 괜찮았다.
설명문에 따르면, 이 사진들은 파졸리니 100주년 기념으로 이탈리아 정부에서 추진한 문화 행사의 하나로 2021년 로마의 마타토이오(Mattatoio)에서 열렸던 퍼포먼스를 촬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 퍼포먼스는 큐레이터이자 패션 역사가인 올리비에 살라드(Olivier Saillard : 라고 읽는 게 맞는지?)가 기획한 것으로 다닐로 도나티(Danillo Donati)의 의상을 틸다에게 입혔다고 한다. 독일 - 이탈리아 - 영국, 퍼포먼스 - 영화 - 사진으로 이어지는 상호참조적 흐름도 흥미로웠다.
찾아보니 틸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파졸리니 감독의 <메데아>를 꼽았다고 하더라. 단순히 수동적 모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작업에 개입하는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여기서도 엿볼 수 있었다. 파졸리니의 영화도 볼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