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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hoes Aug 23. 2023

여행과 공심채 볶음

번외편

여행이 사람을 바꿔놓는다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는 식의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 돌아와서 문득 예전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실제로 나도 베트남 여행 이후 한 가지 달라진 건 집에서 요리를 약간씩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베트남에서 자주 먹은 공심채 볶음이 알고 보니 라면보다 쉬운 요리라서 종종 만들어먹게 된 것이다. 느억맘 소스(피시 소스)가 필수인데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먹을만한 호주산 소고기를 맛술에 절였다가 구워서 곁들이니 맛있고 든든한 한 끼가 된다.


공심채는 줄기와 이파리를 분리해둔다. 프라이팬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조금 볶다가 공심채 줄기와 느억맘 소스(공심채 한 단에 2 숟갈 정도)를 넣고 중간불로 볶는다. 공심채 줄기가 숨이 죽을 정도로 약간 오래 볶은 다음 이파리를 투하하고 센 불에 빨리 볶아 낸다.


이번엔 줄기를 충분히 볶지 못해서 색은 곱지만 좀 질기게 되었다. 먹을 때는 약간의 밥을 곁들였다.


원래 나는 요리와 담을 쌓고 살았다. 일단 우리 집 부엌을 T가 장악하고 있어서 식탁 너머까지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일 때문에 밖에 있는 시간이 많기에 외식을 일상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먹을 게 없다고 늘 투덜거린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사 먹을 음식이 마땅치 않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 것은 나만이 아닐지도.


한국에서 외식을 하면 적당한 가격에 양질의 단백질과 야채를 충분히 먹을 수가 없고 용을 써도 탄수화물의 과잉섭취를 피하기 어렵다. 고기는 그렇다 치고 야채가 구하기 어렵거나 비싼 나라도 아닌데 왜 이럴까 생각해 보다가 애초에 한식에 어떤 ‘위계질서적’ 문화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위계의 꼭대기엔 밥이 있다. 밥이 식탁의 중심이고 다른 요리는 밥을 위한 도구(!) 역할을 하는 것이다(00은 밥도둑이라던가 00이면 밥 한 그릇 뚝딱한다던가 하는 관용구가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렇게 된 역사적 이유가 있었겠지만 오늘에 와서는 다양한 요리의 가능성을 억압하는(?) 비효율적인 체제로 굳어버린 것은 아닐지.


예를 들어 나물 요리는 손도 많이 갈 뿐 아니라 맛도 좋고 영양학적으로 우수한데 우리는 그것들을 단지 ‘반찬’이라는 이름으로 격하하고, 메인 요리로 취급하지 않는다(그래서 요리를 만드는 데 들어간 노동력과 솜씨도 충분히 평가받지 못한다). 식당에서도 채소 요리는 주로 반찬으로만 나오니 신선하지도 않고 재사용 의혹도 있고 많이 먹을 수도 없게 된다. 파전 배추전처럼 야채가 메인인 요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역시 흔하게 사 먹을 수 있는 끼니용이라기보다는 예외적인 음식, 즉 술안주나 잔치상용이다.


반면 베트남에서는 신선한 채소를 끼니때마다 많이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베트남도 밥 문화 국가지만 밥은 별도로 주문해야 나오고 우리처럼 기본 메뉴가 밥 + 기타 라는 개념은 아닌 것 같았다. 공심채 볶음도 양이 많아서 밥을 곁들여 먹는다 해도 반찬 느낌이 아니다. 넴느엉처럼 야채가 주 재료인 메인 요리도 있을 뿐 아니라 쌀국수에도 항상 야채를 듬뿍 넣는다. 요리 과정에서 넣는 게 아니라 먹을 때 투하하는 거라서 살짝만 익혀지니 먹기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영양소는 보존된다. 쌀국수에는 고기도 꽤 많이 들어가니 영양학적 균형이 잡혀있는 음식이 된다(반면 한국의 잔치국수나 냉면에는 야채와 고기가 아주 조금 들어간다).


한식보다 베트남 음식이 우수하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베트남 음식이라고 다 건강식도 아닐거고(특히 연유가 들어간 커피를 많이 먹는 건 안좋아보였다). 다만, 여행 다녀와서, 맛있으면서도 효율적이고 건강하게 먹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게 되었고 와중에 어떤 틀 속에 우리가 갇혀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집에서 매 끼니를 해먹으면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되겠지만 그럴 능력도 여력도 없기에 외식문화의 변화를 기대하는 게으른 자의 불평이었다(요즘은 밥 대신 빵의 비중이 높다지만 제대로 만든 잡곡빵을 먹기는 여전히 어렵다. 설탕을 듬뿍 넣은 케이크의 위험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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