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여행시기 : 2017. 10)
모든 순간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거기 있는 것, 그것이 생의 본질이다. 생의 전체성은 순간 순간들의 기계적 총합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변화하는 하나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렘브란트의 유동성의 본질은 순간들의 연속 전체를 각각의 순간의 일회성 속에서 느끼도록 하는 데 있으며, 분리된 순간들의 연속 속으로 분산되는 것을 극복하는 데 있다. (게오르그 짐멜, <렘브란트>)
때로는 한 점의 그림이 어떤 도시에 대해 그 무엇보다 더 많은 말을 해준다.
암스테르담에는 현대미술 리서치를 하러 간 거였지만 렘브란트와 베르메르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을 안 볼 수 없으니, 라익스 미술관(Rijksmuseum)에 먼저 들렀다. 관객들이 몰려서 작품이 잘 안 보이는 와중에, 이 그림들 앞에 섰을 때 무척 놀랐다. 유명한 작품들이야 볼만큼 봤고 렘브란트도 다른 곳에서 이미 많이 접했는데도 이렇게 놀랐던 이유가 뭐였을까. 바티칸에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채플화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 주변의 다른 그림들을 희미하게 만드는 아우라가 있었다. 짐멜의 말대로 '전체'를 만들어내는 렘브란트의 재능 덕분일까. 어쩌면 마치 활인화(tableau-vivant) 같은 초상화 속 인물들이 시간을 뛰어넘어 관객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여기에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도 있다고. 그것이 짐멜이 말한 생의, 혹은 역사의 신비한 본질인지도.
분명한 것은 암스테르담이라는 장소와 이 작품들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져서, 이 도시의 정수를 여기서 본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그림들은 나를 마치 17세기의 Dutch Republic으로 데려간 듯했다. 집단 초상화의 클리셰를 깨고 한 명 한 명의 개인을 드러낸 이 작품들은 그 어떤 자료보다도 네덜란드의 역사, '근대성'의 역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신화와 성서의 등장인물들이 아니라 동시대의 옷을 입은 현실의 인간들이 각자의 포즈와 표정을 하고 자유롭게 모여있다는 것.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던 어떤 혁신.
라익스 미술관은 네덜란드의 역사를 주제별로 구성해놓았는데, Dutch Republic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다. ‘세계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이 있었음을 강조해놓은 것이다. 그런 네덜란드가 현재는 입헌 군주국이라니, 역사를 자세히 훑어볼 여력이 없어서 지나쳤지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였다.
라익스 미술관에서 보았던 이 공화국의 기호는 암스테르담 곳곳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한 프로테스탄트의 도시였던 이 곳. 보통 유럽의 도시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대성당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독특한 점이었다. 미술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활자 속의 이야기들이 살아 움직이는 경험으로 되살아나는 순간. 그것이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적 순간일 것이다.
겹겹의 운하로 둘러싸인 암스테르담은 흐리고 비바람 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거대하지 않은 보행자 중심의 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하루 종일 전시장에서 전시장으로 옮겨 다녀서 차분히 도시를 산책할 여유는 없었지만, 이동하는 사이 사이에 운하를 따라 늘어선 좁고 긴 집들, 문득 문득 눈에 띄는 작고 예쁜 가게들을 구경했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코펜하겐에 있다가 와서인지, 암스테르담에서 파는 물건들이 하나같이 예뻐보였다.
하지만 이 도시는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분다. 거의 날아갈 뻔한 적도 있었다. 이 비바람을 뚫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였다. 내가 묵은 숙소는 노르트(Noord)라고 불리는 북쪽에 있었는데, 무료 페리가 쉴 새 없이 보행자와 자전거족들을 함께 실어 나르고 있었다. 노트르 지역은 특별한 관광거리는 없었지만, 영화관과 전시장이 함께 있는 아이 필름 뮤지엄(Eye Film Museum)이 있어서 좋았다. 여기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전시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