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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께밭 Mar 06. 2019

죽음 그리고 갠지스

인도-바라나시



  왜 인도를 가고 싶으냐

물었을 때, 내 대답은 갠지스였다. 그 강으로부터 죽음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다. 난 그곳에서 내가 마주하기 힘들었던 죽음에 대해 고찰하고,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 기대 아닌 변명을 했다.

     


분명 더러운 물인데, 참 맑고 깊어 보인다.


아빠가 떠나고, 죽음과의 대면을 회피해왔다. 마주하면 할수록, 버틸 수가 없어서 그냥 도망쳤다.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마주하겠다고 휴학까지 해놓고, 막상 나는 끊임없이 도망치기만 했다. 아빠가 내 곁에 없단 사실은 아직 내게 와 닿는 사실이 아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신이든, 부처든, 염라대왕이든, 뭐든 빌어먹을 누군가가 꾸며낸 허구다.

그렇게 도리질을 해야 했다. 그렇게 도리질을 하면서도, 그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면 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도리질을 멈춰줄 수 있는 건 갠지스 강일 거라고 책임을 전가했다. 죽음과의 대면을 마치 신성한 의식처럼 치르고 싶은 것 마냥, 모든 정리는 갠지스가 해줄 것이라 믿으며 어린 마음으로 인도 땅을 밟았다.     


일몰 보트를 타며 버닝가트를 보았다.


그런 나를, 갠지스 강은 거대한 눈으로 간파하고는 어리석은 모든 번뇌를 잠식시켜버렸던 걸까. 그 강을 마주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삶이니 죽음이니 멋들어진 깨달음을 얻고 가야지, 그리곤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여야지 란 생각에 수없이 애써보았지만, 그 강물만 바라보면 아무 생각도 들지가 않았다. 심지어 버닝가트에서 화장하는 것을 직접 보아도, 죽은 이의 살이 타는 냄새를 맡아도,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곳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죽음에 대한 고찰을 위해 이곳을 찾았으나 막상 죽음을 마주해도 그 죽음을 다 품어버리는 갠지스 강을 마주하니, 삶과 죽음 따위의 모든 번뇌들이 강물 안으로 깊숙이 수장되었다.


나는 아빠가 떠나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얼마나 많이 하늘을 원망하며 소리를 질렀던가, 슬픔과 분노에 못 이겨 얼마나 많은 밤을 새웠던가.


그런 나에게 성스러운 그 강은 신의 목소리를 빌려 이리 알려준 것은 아닐까. 그냥 아무 생각 말라고.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사실 삶이니 죽음이니 모두 대단한 것 없다고. 구태여 죽음과 마주할 필요도, 도망칠 필요도, 괜한 깨달음을 얻을 필요도 없다고.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러니,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미 그 강의 가르침을 받아서였을까,

그곳에서 가족의 마지막을 보내는 이들 모두 눈물도 울음도 내비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의 소리 없는 눈물이 모여 저 강물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 강물에 물을 보탰다. 


디아를 띄우며 아빠의 안녕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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