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도의 발칙한 상상
#살아내는 청년들
매일 아침 8시 30분 기상. 간단하게 준비하고 출발. 오후 6시 퇴근.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나의 루틴. 쉽게 체험해볼 수 없는 직장인의 생활을 옆에서 지켜본 결과, 여러 가지 의문들이 피어났다. 우리는 살아내고 있는 것인가,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대한민국의 교육과정을 착실하게 수행한 사람들이라면 장래희망과 꿈에 대해 수도 없이 생각하였을 것이다. 꿈과 장래희망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물론 장래에 희망하는 것을 묻는 의미에서라면 꿈과 일맥상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래희망은 직업을, 꿈은 직업을 넘어 소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튼 12년의 교육과정은 꿈과 장래희망이 동일한 것이라 말했기에 ‘범생이’의 전형으로 살아온 나는 3번 이상의 장래희망 수정 과정을 거쳤으며, 대학교 자기소개서에는 최종 장래희망과 관련한 내용을 작성했다.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하다는 대학교, 꿈을 이용해서 입학할 수 있었다. 어른이 되면 꿈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되리라 단정하는 것은 무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정의를 위해 불사하는 검사와 변호사, 공명정대한 판사 등등. 갖가지 미사여구를 붙인 직업 정신은 다 어디로 가고 돈과 안정성으로 줄 세워지는 직업들이라니. 더군다나 직업은 그저 돈 버는 수단이고 투자로 먹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라니. 직장에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었고 살아내는 사람들로만 가득했다. 살아내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도전하지 않아도 된다. 그 자리에서 만족하고 살면 된다. 강 위에서 부유하는 식물과 다름없이. 살아가려면(살아간다는 결심 자체가 도전이긴 하다), 도전하려면, 안온한 삶을 전복해야 한다. 적어도 나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살아가야 할 청년, 그 ‘청년’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 하루하루 힘겹게 말이다.
목적 없이 삶을 산다고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목적 없이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닐테니. 이러한 형식의 삶을 살게끔 만든 사회를 비판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한다.
#꿈꾸는 것이 사치가 된 사회
꿈꾸는 것이 사치인 사회가 되었다. 난 이것이 우리를 부유하게 만든 사회의 병폐라고 생각한다. 본디 꿈꾸는 것에는 값이 매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자유이고 희망이며 행복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이제는 꿈을 꾸고 실현시키기 위해 값이 든다. 그래서 사정에 따라 꿀 수 있는 꿈의 크기가 다르다. 서울에서 태어나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을 집과 땅이 있는 A는 공무원 시험을 몇 년 동안 준비하여도 괜찮다. 초기 자본금이 드는 사업을 시작해도, 설령 망하더라도 괜찮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까. 그래서 A는 실패를 딛고 성공하는 신화를 써 내릴 가능성이 B보다 크다. B는 누구인가. 지방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모님은 노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자연히 물려받을 유산도 없다. 부모님에게 B는 노후 준비 자산이다. 그래서 B가 꾸는 꿈은 A보다 작고 안정적일 수밖에 없다. 큰 도전을 할지라도 실패로 인해 돌아오는 리스크가 크고, B는 이를 감당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B가 꿈꾸는 시간 동안 뺏기는 기회비용은 무지막지하며, 그에게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날카로운 비판이 향할 것이다.
솔직히 풀어내고 싶다. 내가 바로 B의 상황에 꼭 맞는 사람이다. 부모님의 목표는 단 하나다. ‘우리 딸 0에서 시작시키기’ 다행히도(?) 내가 B보다는 조금 낫다. 몇몇 소수의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부를 조금 잘해서 소위 말하는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고, 서울에서 터를 잡을 수 있는 권리. 그러나 이것이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A가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활짝 열린 문이라면, 내가 갈 기회의 문은 쥐구멍 정도랄까. 개천에서 나는 용은 될 수 없어도 일단 개천 탈출 정도는 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기회.
'좋은 대학만 가면, 좋은 직장만 가면, 좋은 직업만 가지면' 2021년, 이제 평생직장은 사라지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앞으로의 생이 결정되는 시대가 도래 했다. 스타트업 성공 신화를 보니, 애초에 돈이 많은 집 아들 딸이다. 표면적으로 그렇게 쓰여 있지는 않지만, 미국 유학은 없는 집이 함부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들의 삶은 도전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도전하면 성공할 수 있는 시대로 명명되었다. 그래서 모두가 도전한다. 스타트업을 시작하고, 주식투자를 시작하고. 살아내는 사람들에게도 ‘인생을 좀 주도적으로 살아봐!’라는 메시지가 끊임없이 쏟아진다. 그런데 꿈 꿀 기회조차 바늘구멍만큼 주면서 꿈꾸라는 것은 너무 잔혹한 처사가 아닌가.
#그래서 계속 투정만 할 것인가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너 가난한 거 알겠고, 인생 살기 팍팍한 거 알겠는데, 그래서 뭐 어떡하라고?
일단 진정하라. 당신이 A의 상황이라면 그대가 물고 태어난 수저의 색깔로 그대를 비판해서 미안하다. 당신이 B라면, 당신이 도전할 줄 모르는 안타까운 생이라고 쿡쿡 찔러서 미안하다. 기분 나쁘게 말 하는 것은 내 기질이 본디 성질머리 나쁜 사회학도라서 그렇다고 핑계를 대겠다. 그리고 또 한 번 핑계를 대자면, 나도 해결방법 따위는 모른다. 애초에 투정을 부린 것은 나인데, 내게 해결방법이 있을 리 만무하다.
듣기 좋은 해결방법은 있다. 일단 청년들이 꿈 꿀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교육체계를 바꾸고, 그들의 의식주 지원을 위해 지원금을 주고,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일자리 도움센터를 확대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진정으로 이 상황이 타개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순진하기는.
살아내는 것은 관성이다. 살아가는 것은 관성에 반하는 행위다. 버스가 급정거했을 때 몸이 관성에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것에 반하려면 힘이 들고 신체가 아플지도 모른다. 그래서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회가 존재한다. 아픈 도전을 하는 당신에게 쿠션을 제공하기 위해서. 사회는 쿠션이 돼주어야 한다. 사회안전망이 청년들에게 도전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대부분 비슷한 크기로 기회의 문을 가질 수 있게끔.
누군가는 실패할 수도, 누군가는 성공할 수도 있다. 다들 성공하면 그것은 도전이라는 이름이 될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당신이 실패했을 때 사회의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지지해주는 기반이 있다면 어떠한가. 당신은 도전의 경험을 발판 삼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성공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 속 쓰리게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 거창한 성공 신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전기 정도는 쓸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감히 말하건대, 나와 같은 꿈을 꿔 달라. 성공 신화를 써 내릴 기회를 가질 꿈을 꿔 달라. 같은 생각과 꿈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함께 삶을 살아가보자. 감히 말하건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