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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오로 Jan 04. 2021

'시댁의 시댁'으로부터의 초대 #2

와 준 것 만으로 고맙다

>> 이전 이야기 '나 여기서 내릴래' : https://brunch.co.kr/@borakkkk/21


    손을 씻고 거실로 나간 우리에게 어머님은 손수 상을 차려주시며 오느라 고생했다고 어서 식사부터 하라고 하셨다. 행여 심부름할 것이 있나 싶어 밥을 먹는 내내 나는 미어캣처럼 주변을 살폈고,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편은 뭔가 필요하다 싶으면 나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 남편이 내심 고마웠으나 시댁에서 나보다 빠른 남편이라니 어른들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좌불안석일수록 남편은 더 빠르고 더 눈에 띄게 돌아다녔다. 참다못한 나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복화술을 구사했다. '즈블 즘 그믄히 있으' 


    나 대신 본인이 움직이는 것이 나를 도와주는 일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은 물고기 모양의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알아. 오빠가 억울한 거 나도 알아. 그런데 지금 오빠는 어떻게 해도 억울할 것 같아서 내가 미안해. 시댁에서 남편의 역할은 나에게 묘하게 다가온다. 남편이 이런저런 심부름에 바쁜 것도 불편하고, 그렇다고 마냥 앉아만 있었다면 그것도 또한 불편했을 것이다. 그가 그 곳에서 어떤 포지션을 잡아도 내게 막연히 긍정적으로 다가오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남편의 부인이 아니라 며느리이기 때문이고, 그곳이 남편의 본가가 아니라 나의 시댁이기 때문이라 단언한다. 그러니 어설프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남편의 성의 이미 내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이제 내 차례였다.


    나도 한 건 하고 가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던 차에 어머님께서 과일을 준비하시는 모습을 포착했다. 냉큼 가서 "어머님, 제가 할게요!" 했다. 어머님께서는 괜찮다고 하셨으나 어느새 과도는 내 손에 들려있었다. 과일 주변에 둘러앉은 어른들은 각기 흥미로운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계셨으나 칼과 감을 쥔 내 손을 향한 일관된 시선을 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난 과일을 못 깎는다. 감은 내 기준에 과일 깎기 난이도 '중' 정도였다. 심호흡 한 번 하고 조심스레 감을 깎기 시작했다. 스물네 분을 감당하기에 나의 과일 깎는 속도는 터무니없이 느렸으나 어른들은 단 한마디 볼멘소리없이 침착하게 나를 기다려주셨다.


    과일 깎기를 핑계 삼아 나는 이야기를 나누시는 어른들 옆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환갑이 훌쩍 넘으신 어른들의 대화에 그리고 난생처음 듣는 당신들의 인생사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아~ 와! 오.. 대단해요! 정도였다. 내뱉을 감탄사가 모두 고갈됐다는 것을 깨닫고 과일 껍질도 치울 겸 주방으로 향했다. 고모님들께서는 한사코 내가 주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셨는데 거실에 앉아서 쉬라는 뜻이었다. 그 마음이 감사했으나 실은 거실에서 방청객이 되는 것보다 가만히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는 것이 심적으로 더 안정적일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나를 못내 거실로 보내려는 막내 고모님이 원망스러웠다. 시댁에서 설거지만 한다는 말이 제일 무서웠는데, 나는 설거지 못해서 안달 난 애처럼 싱크대 수문장 막내 고모님 주변을 맴돌았다. 


    시댁에 도착한 지 채 세 시간 정도가 지나자 어머님, 아버님께서 이만 가보라고 하셨다. 다른 어른들께서도 우리에게 주말 드라마를 봐야 하는데 방해가 되니 얼른 가보라며 너스레를 부리셨다. 더 있다가 마무리까지 같이 하고 가겠다고 했으나 어머님께서는 "이렇게 어려운 자리에 와 준 것만으로 정말 고맙다" 하셨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렇게 좋은 분들을 두고 나는 이 집으로 오는 길에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한 것일까. 그 상상 속 어디서 겁부터 집어 먹은 것일까. 내가 고생할까 먼저 이리저리 뛰어다닌 남편, 내 느릿한 과일 깎는 모습을 지켜 봐주신 어른들, 주방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막으신 고모님들 그리고 와 준 것만으로 고맙다고 말씀해주시는 어머님, 아버님이 내가 마주한 진짜 나의 '시댁'이었다.


.

    여담이지만 그 일이 있고  계절이 지난 후에야 그 날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어설펐지만 계속 무언가 도우려고 했던 내 모습을 어른들께서 좋게 보셨다고 한다. 나를 너무 좋게 보신 나머지 여름휴가도 데려가자고 하셨다는데, 현명한 남편이 내게 말도 하지 않고 반려를 놓았다고 했다. 휴!! 왜인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도 시댁은 시댁인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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