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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종훈 Nov 28. 2023

만리재 연가(戀歌)

재 높으면 넘기도 힘들 텐데 그 사람들은 왜 백리, 천리도 아닌 만리 고개 아래에 터 잡았던 것일까?

가끔 재 넘으려는 사람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넘었든 넘지 못했든 그 자체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해서 숨이 찰 때가 있다.





맨손이 맨손 만나

만리재 그 어디쯤의

겨우 몸 하나 누일 방에

세 들어 살았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이

밤기차 타고 상경(上京)

부지런만 하면

사람 노릇하며 살겠지 싶어

밤낮없이 뼈 빠지게 일했는데

삶이 구만린데 저깟 만리재 못 넘어

이 악물고 산 것인데

이제사 나이도 반백(半百)

머리도 반백(半白) 넘어

재 너머 보이는 것도 같은데

     

천 조각 자르고 이어 만든

수천 벌 반듯한 옷들처럼

형편도 그처럼 반듯해지면

만리재 눈물고개 떠야지 했던

재단사 박씨

구겨진 옷들

열심히 다리고 펴서

사정이 그처럼 펴지면

만리재 고생고개 떠야지 했던

세탁소 김씨 내외도

이제는 고생한 것이 억울해

못 떠나겠다는 만리재.

     

재도 넘어본 사람이 안다고

막걸리 한 사발

전 한 접시 앞에 놓고

재 넘던 이야기

저마다 풀어내는데

만리재 저 고개 저리 보여도

만만히 볼 고개 아니었다고

서로를 다독이는데

     

걷고 또 걸었는데

아직도 만리재

다는 못 넘은 것인지

새벽에도 불 끄지 못하는

만리재 사람들.



※만리재 :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에서 마포구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소규모 봉제공장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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