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가 끝인가 했더니
요즘 우리 병동엔 공부하는 젊은 간호사들이 아주 많다. 나는 새로운 걸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일하면서 동시에 공부를 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 그걸 다 해내는 간호사들 이야기는 다른 세상이야기처럼 들렸다.
미국이 워낙 넓기에 어느 지역에 한정된 이야기를 하는 건 정확한 정보라 하기 어렵겠으나, 확실히 코로나라는 엄청난 녀석이 나타난 사건은 환자 곁에서 간호를 하는 '베드사이드 널싱-Bedside nursing'분야에서만큼은 많은 간호사들에게 지치고 힘든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곤 평생을 병동에서 일하는 것보다 비교적 체력적으로 힘이 덜 들고 깨끗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전문간호사, 즉 NP가 많은 관심을 얻게 된 것도 사실이다.
NP란 Nurse Practitionor의 약자인데, 미국에서도 일반인들에게 아주 잘 알려진 직종이다. 선호도에 대한 부분은 개인차가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진료에 초점을 두는 건 의사의 업무이기에 간호사가 의사의 업무를 한다는 것 자체를 의심하거나 실력에 대해 못 미더워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반면에, NP의 존재를 의외로(?) 의사보다 훨씬 환자중심적이라고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미국에서는 간호사가 추가적인 학위와 전문적인 과정을 거친 후에 의사의 업무 중 일부인 진단과 치료과정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미 자리 잡은 지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시도되지 않고 있고 현실적으로 가능성도 여전히 미지수이다. 업무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아 논란이 있는 PA간호사도 있지만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심층적으로 다뤄보기로 하겠다. 내가 PA간호사 출신이라 할 말이 많다.
그럼 한국과 미국의 의사는 어떻게 다를까?
한국에서는 심장수술을 하는 흉부외과나 암수술과 몸속의 장기들을 수술하는 일반외과는 일은 힘들고 돈은 고생한 만큼은 벌지 못하는 기피과에 해당한다. 의료수가가 있기는 하지만 금액이 적기 때문에 일한 만큼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유명하고 큰 병원에서조차 레지던트 구하기가 힘들다는 뉴스가 나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미국은 이 부분에서 정반대이다. 진료를 보고 약을 처방하는 가정의학과나 내과의사도 의사이기에 돈을 잘 번다. 하지만 그보다는 시술이나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외과의사들이 훨씬 큰돈을 만진다. 힘은 들지만 사람의 힘으로, 손기술과 실력으로 해내는 일이야말로 돈을 많이 받아야 하는 직업으로 생각해 주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의사들도 내과의사는 선호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직종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 NP이다. 살짝 보태면 우리나라에서 NP가 생겨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 훌륭한 술기를 가진 의사들이 한국에 남아있는 이유는 외과를 좋아하고 환자에 대한 사명감이 있어서 이기도 하고, 또 다른 이유는 한국 전문의자격을 미국에서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현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경력과 자격이 한국과 미국에서 똑같이 매칭만 된다면 한국의 서전들이 미국에서 일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한국의 외과의사들의 실력은 미국에서도 최고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의사들은 학부과정인 의대에 가거나 또는 의전원에서 대학원과정을 시작으로 의사가 되는데(요즘도 의전원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지 여부는 확인해보지 않았음, 10년 전쯤엔 의대와 의전원이 공존했음), 국가고시를 치르고 의사면허를 받고 나면 ‘일반의’가 되고, 1년간의 인턴생활로 여러과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전문분야를 결정해서 레지던트를 지원하게 되고, 4년간의 레지던트를 마무리하면서 전문의 시험을 치고 나면 어디 가서 ‘저는 ㅇㅇ과 의사입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때가 된다. 보통 전문의를 따더라도 펠로우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기 때문에 임상교수나 부교수 등의 직함을 얻기까지는 또 한동안 시간이 필요하긴 하다.
문제는 이렇게 어렵게 전문의를 따서 한국에서 교수님이라 지칭을 받을 정도가 되었는데 미국에 오겠다고 하면 다시 미국의사면허시험을 치러야 하고 그 이후에는 전문의가 아닌 레지던트 신분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다시 수련을 해야 한다는 부분이 이미 전문의가 된 입장에서는 불필요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한국 간호사들은 의사에 비해 미국행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한국에서 간호대를 졸업하고 국가고시를 치른 뒤 면허를 받으면 미국 간호사와 학위가 동등하게 인정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간호사를 하다가도 미국에서 그대로 일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것이다. 물론, 학위를 인정받기 위한 검증과정이 추가되고 영어권국가에서 학위를 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자스크린’이라는 과정에서 영어점수를 만들어서 증명해야 하지만 그 나라의 의료환경을 알아야 하고 그 나라의 언어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직업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에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렇듯 한국에서 한국어로 공부했던 토종 대한민국 간호사들이 미국에 와서 같은 직업으로 일하고 경력을 인정받는 것은 너무나 좋은 조건이다. 그럼 오기만 하면 고생은 끝인 걸까?
미국땅에 발을 딛여도 갈길은 멀다. 내가 아무리 어떤 특정과에서 꽤 오랜 경력을 쌓다가 미국행을 택했다고 해도 막상 와보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간호환경이 모든 면에서 같지는 않기 때문에 오게 되면 내가 알고 있던 것과 지금 보이는 것이 같은 것인지, 다르다면 뭐가 다른지를 식별해 나가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어는 또 얼마나 힘든가, 아무리 영어점수를 만들어서 왔다고 해도 당장 미국에 오면 알게 된다. 내가 했다고 큰소리치던 그 영어공부가 얼마나 하찮은 수준이었는지. 미국애들이 하는 말이 들리기만 해도 훌륭한 실력이다. 말을 못 하는 건 어쩜 당연하고 알아듣기도 힘들어서 원하는 것도 말 못 하고 그냥 예스맨이 된다. 상황판단되고 할 말 때맞춰 잘하는 수준이 되면 그땐 이미 한창 정착한 뒤일 것이다.
그런데도 적응하고 어느덧 익숙해진 생활에 정신이 들면,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되나? 뭐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제버릇 남 못주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미국 오겠다고 열심히 공부하고 끈질기게 노력했던 사람일수록 어느 순간 나태해진 자기 자신을 견딜 수 없어하는 때가 빨리 온다.
그러다 보면 주변에 한국에서 온 간호사들은 다들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또 공부들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냥 출퇴근만 잘하고 돈만 꼬박꼬박 잘 벌어도 이미 훌륭한데 거기서 만족할 줄을 모른다. 한국보다 학비도 훨씬 비싸고 공부도 더 힘든데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가서 고생문을 연다.
그리곤 죽니사니 하면서 일도 하고 공부도 하다가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한다. 이왕 시작한 공부인데 돈이 아까워서라도 흐지부지 공부하는 걸 못한다. 그렇게 고생 끝에 또 다른 고생길을 자처한다.
그 뒤엔 졸업 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직업으로 새로운 것들을 보고 배우며 다시 뉴그랫이 된다. 그리곤 머지않아 그 새롭디 새로운 새로움에 적응하는 근성을 보여주며 자신의 노력과 열정이 값어치 있는 일임을 알고 더 멋진 인간이 된다.
이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온 간호사들이 미국생활에서 끝판왕이 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도 제 발로 그 길을 가게 될 것 같다.
처음 미국행을 생각할 때부터 나에겐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첫 번째는, NP 유학을 와서 공부를 하고 졸업한 뒤 직장을 구해서 영주권을 받는 것.
두 번째는, 간호사로 이민을 와서 영주권을 가진 채로 돈을 벌다가 NP스쿨을 가는 것.
오랜 기간 고민하다가 내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고,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 갈수록 학비가 오르기도 하니 빨리 가는 게 좋을 수도 있지만 미국에 가겠다고 생각했던 10년 전에도 이미 NP가 되려면 억 소리가 나는 돈이 필요했다. 당시에 나는 한국에서 아주아주 평범한 수준의 직장인이었고 아무리 고민을 해도 학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부모님께서 주신 유산도 없었기에 우리 부부는 결혼 당시 ‘0’이 아닌 마이너스에서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을 공부에만 써버리는 것도 어쩐지 미안했고, 그 정도로 내가 공부를 좋아하거나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빙돌아가더라도 간호사로 미국에 와서 안정적인 수입을 만든 이후에 NP공부를 시작하자고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작전에 돌입했다.
그리곤 10년 뒤, 나는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벌이가 나쁘지 않아서 미시간에서는 큰 욕심 안내면 가족들 먹여 살릴 정도는 된다. 연봉도 갈수록 오르고, 이직을 하게 되면 무조건 이전 직장보다 더 줘야 다들 움직이기 때문에 지금이 가장 가난한(?) 형편이긴 하다. 그래도 그 수입에 만족하는 이유는 일주일에 3일만 일하기 위해서 하루에 12시간을 일해야 하고 체력적으로 정말 힘에 부치는 일임에는 분명하다 보니 돈이 더 필요하고 벌 수 있다 하더라도 여기서 추가로 무언가를 더 하는 것은 나에게는 무리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직장 한 군데 더 다니거나 픽업시프트를 하는 간호사들도 많던데 나한테는 그게 투머치다.
그럼에도 요즘 내 주변의 간호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나를 NP스쿨에 넣으려고 안달이다.
블로그로 알고 지내는 뉴욕간호사 선생님이 있는데, 최근에 오랜 고민 끝에 NP과정을 시작해서 초주검인 스케줄을 경험하고 있다고 했다. 너무너무 시간이 부족하고, 과제하는데도 힘들고, 괴롭고 울고 싶은 마음이 보이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으신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겐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준비해서 빨리 하라고 독촉하셨다.
앞서 말했듯 우리 병동은 더 유행이다. 4년째 일하고 있는 ‘R'은 이미 공부를 시작해서 내년 5월에 NP스쿨 졸업을 한다고 했고, 또 다른 'R'도 의전원인 Medical school에 진학했고, 'O' 간호사도 현재 NP 첫 학기를 보내고 있다. 나에게 끊임없이 학교를 어서 가라고 밀어붙이는 'T'는 경력직이긴 하지만 우리 병동에 온 지 이제 6개월도 안된 신입이다. 그런데 그 친구도 이번학기에 NP스쿨 입학을 했다.
다들 20-30대의 젊은 친구들이긴 하지만 이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 데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미 나도 안다.
확실한 대우와 보장. 내가 돈을 들여 공부해서 투자한 만큼 나의 미래가 바뀌고 쓴 것 이상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체력적으로는 훨씬 편해지는 업무환경. 당장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느껴지는 간호사의 일이라고 해도 10년 뒤, 20년 뒤에도 같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그리고 NP의 전제조건이 RN, 즉, 간호사 면허소지자이기 때문에 언제든 NP가 맞지 않거나 추가로 일할 생각만 있으면 간호사로 일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놀라운 사실 때문에 요즘 정말 많은 간호사들이 나와 같은 고민과 추천을 주고받는다.
내가 처음 'T'가 NP스쿨을 간다고 했을 때 나도 고민은 했었다고 이야기하니 그 뒤로는 같이 근무하는 날마다 나한테 묻는다. 준비 잘되고 있냐고. 내가 돈이 없어서 좀 모아두고 갈까 싶다고 하니, 어차피 론 받을 건데 뭐 하러 시간 보내냐고 일단 시작하라고 한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끝도 빨라지고, 그때쯤이면 그동안 공부하느라 쓴 돈을 충분히 갚을 수 있을 정도의 보상도 받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몇 번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그런가..? 했던 내 귀가 팔랑이기 시작했다.
남편과 진지하게 앞으로의 계획과 현재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타고난 체력이 약한 나는 어려서부터 머리로 하는 공부가 나에겐 솟아날 구멍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데 재미를 느끼는 내가 남편은 연애할 때부터 퍽 신기했다고도 했다. 이제 앞으로 살아갈 미국생활에서도 병동간호사로만 일할 거라면 하루하루 버티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할 텐데, 현실이 되기 전에 미리미리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대화로 마무리되었다.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옛날에는 먼 미래의 이야기이니 나중의 내가 어떻게든 하겠지 미뤄왔다면,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미루면 안 되는 현실이 되었다는 걸.
2019년에 처음 미국에서 NP를 하고 계신 선생님들이 한국에서 책을 내고 만들어진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내가 생각만 하고 꿈만 꿔온 일을 누군가는 지금 현실에서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부러웠다. 그리고 그 당시 나에게 가장 전문분야라고 할 수 있던 경력에 관련해서 NP로도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질문을 했었다. 답변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내가 일했던 분야는 미국에서도 수요가 정말 많고 그에 비해 전문가는 드물어서 얼마든지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때,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은 꿈에 날개가 생겼다. 언제 내가 그 길을 가보게 될지, 아니, 가 볼 수나 있을지 그저 상상만 하던 일을 만일 이루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꿈을 목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실행해보려고 한다. 사실 오늘까지도 그 실행에 증거로 내밀 보이는 무언가는 아직 없다. 그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가 지금부터 하나씩 이뤄나가야 하는 작은 목표들과 계획들을 찾아냈고 그것부터 시작을 했다.
과연 계획한 길을 실제로 가게 될지, 아니면 포기할지, 그것도 아니면 예상치 못한 다른 길을 가게 될지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혼자서 생각만 하고 종이에 적다 지워버리는 것보다 뱉은 말 주워 담지 못하도록 일단 알리고 시작하는 것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길을 어떻게 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한번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도 가능하다면 공유해보려고 한다는 다짐으로 오늘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