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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부담스러운 업무들

일을 잘하면 또 일을 주는 억울한 상황

by 미국간호사 Sophia

이제 좀 일에 적응이 되어 왠만한 의사소통은 눈치반 이해반으로 하는 수준이 되었다 싶었던 시기였다. 종종 말을 흐리는 사람등이거나 흑인들 발음은 참 어려운데, 알아듣는 것도 여전히 힘들게 여기는 나에게 예고도 없이 차지를 보란다.


왐마.. 한국에서도 차지 본적 별로 없는데...별거 하는게 없다고 해도 그 감투의 무게가 가볍지가 않다. 더구나 우리병원은 차지널스도 환자를 똑같이 보면서 업무를 해야하니 부담이 두배.. 환자들마저 까다롭거나 손이 많이 간다면 울면서 일해야될 판이다.


미국에 오기전에 듣기론 차지널스를 하면 환자를 배정받는 대신 전체적인 병동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고 했는데, 그것도 병바병(병원 by 병원) and 부바부(부서 by 부서)였던거다. 하긴, 어느병원엔 브레이크만 커버해주는 널스도 있다던데 우린 그런거 없다. 내가 쉬러가면 내 환자는 나랑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 다른 간호사가 다 봐야한다. 그래서 쉬러가기전에는 최대한 특별한 일이 없게끔 만들어놓고 가는 것이 암묵적인 서로간의 예의이다.


잔뜩 겁먹고 나 아직 준비가 안됫다고 손사래를 치니 다들 하다보면 적응한다면서 자기들이 옆에서 도와줄테니 해보라고 한다. 외부에서 오는 모든전화를 받고, 담당자에게 연결시켜주거나 해결해줘야하는 비서역할도 해야하는 차지의 업무가 나에게는 아주 멀고 먼 날의 일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첫출근한지는 7개월, 독립해서 혼자일한지도 4개월이 채 안되었는데 왜이렇게 부담스럽게 일을 시키는거냐..


근데 또 시키면 시키는대로 꾸역꾸역 정성과 열심을 다하는 한국간호사의 근성이 스물스물 나오고 말았다. 하라니까 또 하고 있네. 무섭다고 아직 준비가 안되었다고 말하면서도 뭘배워야되는지 묻고있네... 아놔


그래도 내가 일하는 곳은 자기 환자를 보면서 차지도 봐야하기에 너무 많은 일을 시키지는 않는 것 같다. 그저 병원 내외부에서 오는 모든전화가 밤중에는 비서가 없기에 차지널스에게 온다는 것. 이때문에 의도를 알 수 없는 전화를 몇통 받아서 다른 간호사에게 토스했다. 뭔소린지 알아먹어야말이지 ㅎㅎ 사실 첨에는 전화 대신 받아달라고 말하는 것도 말하기 어려웠다. 그냥 영어가 다 어려웠을 때니까.


그래도 아직 차지트레이닝을 받는거라고 하면서 며칠은 버디를 붙여준 덕에 전화 받았다가 못알아듣겠으면 몇번 더 물어보다가 그것도 더이상 민폐다 싶으면 버디한테 전화를 넘긴다. “당췌 무슨말인지 못알아듣겠어” 라고 말이다. 그래도 전화 받는 것을 유심히 들으면서 추론을 하고 끊으면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보면서 밤동안 차지널스가 무슨일을 해야하는지, 어떻게 해결하는지 하나씩 알아가긴 하는 것 같다.


우리병원은 스태핑부서가 있어서 매일 12시간 근무중에 두번 차지널스에게 연락을 한다. 첫4시간이 지나고 나서 남은 8시간동안 근무할 인원의 이름을 알려주면서 서로 확인하는 것과, 시프트가 바뀌기 2시간전에 다음근무 인원의 이름을 알려주며 확인하는 것. 간호사와 조무사, 비서뿐 아니라 종종 시터가 필요한 경우에도 요청을 하고 어떻게든 할당받기위해 어필을 해야한다.

일단 기세가 중요하고 말빨도 좋아야한다. 나는 처음엔 그냥 예스만 했다가, 이러면 안되는 상황이라는 걸 알고 다시 스태핑에 전화해서 부탁을 했고 그 뒤로는 조금 더 당연하고 당당하게 필요한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대단한 발전이다!




그러고보면 처음에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에도 부담감이 정말 컸다. 일단 영어로 시작되어 진행되고 마무리되는 모든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분명 미국에 가면 이럴거라는 걸 알고 온 건데도 거기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미국에선 처음 병원에 일하러 온 것이지만 이미 내 나라에서 경력이 있는 간호사라는 걸 알다보니 첫날만 쉐도잉하듯 따라다니며 보게 하더니 그 다음날부터는 바로 환자를 주고 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도 하기 힘든 시기인데다 환자들 성과 이름도 생소하고 인계 받자마자 그 방에 들어가서 인사하는 것도 심장이 요동치는데 약도 주고, 주사도 달고, 그날 있을 치료나 수술, 플랜들에 참여해야하다보니 항상 정신이 혼미했다. 내가 뭘하고 있나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와중에도 실수하면 안되니까 바짝 긴장해서 더 실수를 하느라 내가 땅바닥에 떨어뜨린 약을 프리셉터가 열댓개는 주워서 다시 꺼내다 준 것 같다. 떨리고 긴장하면 손이 왜이리 떨리는지 누가보면 약쟁인가 싶을 정도였다.


특히, 보호자가 있는 방에 들어가면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그냥 웃기만 하는 외국인이었다. 최대한 무슨이야기를 주고받는지 알아들으려 노력하고, 프리셉터가 어떤식으로 설명해주는 지 배우려고 했다. 사실 우리말로 하더라도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좀 더 신뢰가 가도록 말하는 기술은 따로 있듯이, 여기에서도 같은 표현을 좀 더 정확하고 알아듣기 쉽게 말하는 표현들이 들려서 최대한 따라하고 말하려고 했다.


이제는 많은 것들이 익숙해지고 편안해졌다. 내가 먼저 보호자와 환자에게 말을 걸고, 업무가 아닌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뜬금없는 말을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눈치가 늘었다.


기특하게도 일한지 일년도 안되어 차지널스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한 심정은 돈 더 안줘도 되니까 안시켰으면 좋겠다. 그런데 또 한 번 리스트에 올라가면 계속 돌아가면서 해야한다고 한다. 이제 발을 뺄수도 없게 되버렸다. 그냥 되면 되는대로, 안되면 안되는대로 해야지 별수가 없다.


미국에 와서는 겸손하면 손해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고 실제로도 땅덩어리가 넓어서 내가 나를 잘 포장하고 표현해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고 들었는데 왜 나는 조용히 내 할일만 하고 집에 가는데 자꾸 뭘 시키고 잘한다고 그러는걸까.. 참 부담스럽다. 겉으론 외향인처럼 보이지만 난 혼자가 편하고 좋은 찐내향인데 이곳 병원에서는 근근이 월급받아가는 직장인으로 살기에는 이미 늦었다.


출세에 아주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원하는 부분에서 돋보이고 싶은데 아무래도 병동간호사로 일하는 것은 내가 돋보이고자 하는 면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분명히 배우는 것이 많고 그만큼 내 스킬도 늘어난다. 그러나 여전히 내 스킬에도 자신감이 없고 때로는 도망치고 싶으며, 안할수만 있으면 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아직 적응이 더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내 적성이 아닌 것인지 나도 좀 알고 싶다.




이 글을 지금부터 딱 8개월전에 적어두고는 마무리를 하지 못해서 버려두고 있었는데 오늘 다시 읽어보면서 내 자신의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


근속 17개월차로 병동에서 근무하면서 업무적으로는 이제 벅차거나 도망가고 싶은 일은 없어졌다. 가끔 힘든 일들이 있지만 나만 힘든거 아니라는 것도 알고 동료들이 알아주기 때문에 이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내 뒤로 뉴그랫(신규간호사)와 새로운 경력직간호사들이 입사해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독립을 했는데 그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정도의 경험치도 쌓였다. 뉴그랫간호사 한명은 내가 같이 근무하면 너무 좋아한다. 내가 일하는 방식이나 나의 설명이 자기에게 너무 맞다고 하면서 ㅎㅎ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내가 성장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경력이 있다라고 말하기엔 지금 병동에서의 근속일수가 많지는 않으나 동료들에게 함께 일하는 든든한 간호사로 인정받고 있기에 몇달전, 처음 이 곳에 왔을때 나의 모습과 비교를 하자면 나는 적성에 안맞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나 더이상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수있었다. 처음이라서, 경험한 적이 없어서 당황하고 도망치고 싶었을뿐 이제는 어떤 처방이 내려져도, 어떤 환자가 입원을 해도 내가 해야할일과 모르거나 어려워서 도움이 필요한 일을 정확히 구분해낸다. 그리고 설사 내가 해본적이 없는 일이더라도 겁내지 않고 물어보며 계획을 세워서 용감하게 시도해보기도 한다.


예전에는 이런 나의 성향과 성격, 특징과 성품을 잘 알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나름대로 잘 적응하며 사회생활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저 따라하고 시키는대로 하면 할 수 있을거라는 짐작만 했었다.


이제는 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성실하며 잘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라도 그것을 알 수 있게 된 상황이 너무 고맙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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