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나를 설득해 보자
나는 결정하기 전까지 고민과 걱정이 많지만, 일단 결정되고 나면 충분히 검토를 했다는 의미이므로 결정을 한 나를 믿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의 결정을 돌이키거나 방향을 바꿀 큰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무난하게 나의 목적대로 목표대로 꾸준히 노력하며 참아내는 것이 익숙했다. 해외간호사도 그러했다. 나는 간호사라는 직업을 너무나 좋아한다. 의미도 있고 보람도 있으며 여성으로서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꽤나 오랫동안 자신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간호사의 업무는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지 않으며 학부에서 배운 것조차 적용할 수 없을 정도로 옛날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 간호대학생의 경험을 해본 나로서는 도저히 현실과 이론의 괴리감을 좁힐 수가 없었다. 결국 떠나기로 결심했고 하나씩 도장 깨기를 하며 미국으로 갈 날을 세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복병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법 인내심이 있고 빨리빨리를 혐오하는 나였지만 미국의 속도는 정말 우리의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달랐다. 이 나라는 진행하는 모든 것이 한국사람의 속을 터지게 하고 추진력을 감소시켰으며 하고 싶은 의지를 떨어뜨렸다. 뭐든 느렸다. 내가 할 일을 해놓고 그다음스텝까지는 거의 잊어버릴 지경이 돼야만 차례가 돌아왔다. 그러다 어느 날 소위 현타가 왔다. 내가 이 과정을 꼭 해야만 하는 걸까? 앞으로도 이 속도와 절차를 견딜 수 있을까? 해야 하는 이유를 백개는 말해줘야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만큼 오랜 시간 기다림에 나도 지쳐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그즈음부터 미국에서 일하는 한국간호사들의 브이로그들이 유튜브를 통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 사람을 구독하자 비슷한 사람들의 일상이 알고리즘을 통해 제안되었다. 그러면서 실제로 내가 꿈꾸는 일상을 그들을 통해 보게 되었고 나는 다시금 포기했던 마음을 접고 미국에 가기로 완전히 마음먹었다. 대부분의 간호사들의 궁금증과 같이 처음 미국땅을 밟고 이민자로서 꼭 거쳐야 하는 절차들-운전면허증 획득, 렌트하우스 구하기, 차량구매, 식료품구매, SSN발급, 은행계좌열기 등-과 함께 언뜻언뜻 보이는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미국에서의 일상을 보면서 '아, 내가 원한게 저런 삶이었지. 한국에서는 저런 사소한 것들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걸 잊고 있었네..'라며 말해주지 않아도 내가 그곳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백만 개로 늘어났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 있다거나 미국병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삶의 속도나 기준, 원칙 등이 많은 부분 우리나라에서는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었다. 잠시 지냈던 미국에서 내가 살아야 하는 곳은 이곳이다 느꼈던 것처럼 남과 비교하지 않는 삶, 나의 하루를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삶,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충분한 삶은 확실히 대한민국에서는 이룰 수 없거나 극히 어려운 것임에는 분명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이룰 수 있는 곳으로의 긴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을 뿐이다. 나 역시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며, 우리나라의 빠름과 정확함, 편리함에 익숙하기 때문에 직업으로써 만족할만한 대우와 환경, 급여가 주어진다면 절대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미국에 가겠다고 해도 그건 여행으로 갈 정도로 말이다. 당장 급여만 봐도 두 배에서 세배이상 차이가 나고(일의 바쁨과 어려움은 비교대상에서 차이가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일단 대가 자체가 너무 적다) 사회적으로 존경받으며, 직장과 나의 삶을 분리할 수 있는 환경을 보면 간호사로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는 해외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장점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어려운 결정을 하고 오랜 기간 준비를 하며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임을 꼭 말하고 싶다.
또 하나, 내가 벗어나고 싶은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나이’이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나의 나이는 완연한 어른이며 때로는 부담스러운 장년이다. 나 자신은 여전히 내가 20대인 것 같은데 사회적인 나는 그렇게 봐주질 않는다-감히 어딜- 나는 아직 할 수 있는 것이 여전히 많고, 하고 싶은 것도 그만큼 충분한데 이 나라에서는 나이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제한조건이 된다. 많은 종합병원에서 나이로 입사의 기준을 삼는 것도 그 한 예가 된다. 그나마 나이 앞자리가 '3'일 때에는 이력서를 내고 서류탈락을 경험한 적이 없었는데 이 숫자가 '4'로 바뀌자마자 떨이에도 팔리지 않는 좌판대위의 물건들처럼 나의 값어치는 추락하고 있음을 현실에서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20대에는 젊고 열정이 있지만, 그만큼의 연륜과 경험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은 부족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대형병원은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세상물정을 모르고 그만큼 회사의 지시를 잘 따를 것 같은 젊은이를 선호한다. 아무리 병원에서 일할 간호사가 없다고 하지만 40대가 넘은 경력직 간호사에게는 자리를 내어줄 수 없다. 그들은 너무 늙었고, 세상을 너무 잘 알며, 회사에서 시키는 것을 충실히 하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의 생각이 맞는 걸까?
미국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간호사의 모습은 -항공사 승무원과도 많은 부분이 겹치는데- 누가 봐도 나이가 지긋한-그래서 보기만 해도 여유로운- 경력이 빵빵한 40대 이상의 간호사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점이다. 물론, 미국에서는 40대 이후에 간호대학을 들어가는 것 또한 상식이기에 모두가 경력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장년-중년의 간호사들이 적어도 간호사로 인생을 살아온 지 20년 이상 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아무리 응급상황이 주어져도 이미 겪어온 내공이 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상황판단이 빠르며, 어리고 연약한(?) 신규간호사를 품어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그런 경력에도 자만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고, 여전히 배움의 자세를 겸비한 멋진 사람들이었다. 누가 봐도 믿음직한, 병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맡겨도 걱정되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을 보면서 우리나라도 이런 간호사들이 많아질 수 있는 환경이 꼭 조성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20-40대 간호사들이 과연 자신의 중년에 한국에 돌아가서 간호사를 다시 할 수는 있으려나??
단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과 내가 거쳐야 하는 절차가 불투명하고 불안정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해외간호사(나의 경우는 미국간호사)의 길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차피 우리네 인생은 대부분 기다려야 하는 것이고, 내가 겪어야 하는 일들은 모든 것을 겪어내었을 때 비로소 투명하고 안정되어 보일 뿐이다. 단 한 번뿐인 나의 인생에서 조금 더 나은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다면 너무 조급히 생각지 말고 이 모험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보는 것을 나는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