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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국간호사 Sophia Aug 05. 2024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일상에서 행복 찾기

미시간에 도착한 날로부터 첫 출근을 하기까지는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이 남아있었고 이곳엔 아무런 연고가 없기에 아는 사람을 만날 일도 없었다. 마치 새로운 곳에 여행온 사람처럼, 이나라 사람들의 일상을 구경하고 따라 해 보며 내가 나고 자란 한국과 다른 면을 경험해 볼 시간이 생긴 것이다. 어쩌면 아무도 이곳에 우리가 있는지조차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자유로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곤 오랜만에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자고 싶은 시간에 잠이 드는 백수의 일과에 충실했다.


5월 초 미시간의 날씨는 한국보다 낮기온이 선선했고 햇볕은 눈부셨다. 대신 일교차가 커서 밤에는 좀 쌀쌀했다. 폭신한 이불을 푹 덥고 누우면 사르르 꿈에 빠져드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미국집에서 사랑하는 털둥이들이 밤새 잘 잤는지 인사를 하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뒷마당을 바라보는 시간이 꿈처럼 믿기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일상이었을지 모른다. 풍경이 약간 달라졌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모를 정도로 이곳의 특별함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편안한 느낌이 들었던 건 아마도 내 마음가짐이 달라졌기 때문인듯했다. 누가 변해야 한다고 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그동안 내가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들을 내려놓아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밖을 내다보니 이 동네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때까지 산책을 많이 했다. 아파트 같은 높이의 나무들이 무성했고 집들은 아담했다. 그리고 그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볕을 쬐며 천천히, 또는 빠르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한번 나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살고 있는 미국집과 같이 나는 한국에서도 단독주택에 거주했다. 이전에는 아파트에 살았었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끊이지 않는 층간소음에 노이로제가 걸렸고 성냥갑 같은 공간에서 사는 것도 답답하게 느껴졌었다. 결국 이사를 한 곳은 수도권의 외곽지에 있는 주택이었는데 도심지 접근성은 그나마 괜찮은 편인 데다가 밤마다 하늘의 별을 보는 환경이 참 좋았다.


하지만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를 진단받은 이후에는 혼자서 집 밖을 나가는 것이 어느 순간 무서워졌다. 집에 혼자 있는 건 아무렇지 않은데 말이다. 외출도 남편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면 아예 하지 않게 되었고, 같이 나갈 수 없으면 뭔가 사야 할 것이 있을 때마다 그냥 인터넷쇼핑을 했다. 직장에서 일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를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야 내가 짐작하는 이유가 몇 가지가 있는데, 아마도 밖을 나서다 내가 예상치 못한 불편한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살던 동네의 이웃들은 은퇴하고 주택단지에 들어오신 분 들이거나 지역에서 꽤나 크게 사업을 하시는 유지들이셨고, 우리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젊은 부부였다. 그러다 보니 관심과 조언을 많이 받게 되었다. 처음엔 이런 부분이 고마울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솔직히 불편할 때가 많았다. 우리를 위해 해주는 말이니 좋게 들으려고 했지만 우리 부부는 평일에는 스트레스가 많은 직장생활을 하고 주말에 겨우 쉬며 여유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때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싶었다.


친정식구들과의 불통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나는 소위 K장녀로 살아왔고, 가족을 위해 내가 희생하는 것은 맏이로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느껴왔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친정가족들은 나의 노력과 배려가 고마움보다는 당연한 일이고 더 많은 것을 바라기도 한다는 것을 느낀 것이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그런 친정식구들이 이웃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마주치는 것을 불편해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런 여러 조건들이 문제였는지, 나는 혼자서는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있었고, 철저한 집순이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한다고만 생각해 왔다.




그러다 미시간의 한 마을에 정착하고선 내 마음이 실상은 달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남편과 아침을 먹고 손을 잡고 산책했던 날이 기억에 남는다. 쌀쌀한 밤기운이 여전히 남아있는, 하지만 따뜻한 햇살이 곳곳에 있는 동네를 천천히 걸으며 앞으로 이곳에서 잘 살아남아보자 서로를 응원하며 소소한 이야기를 하고 걸었던 그날이 나에겐 참으로 위로가 되었다.


아무도 나에게 무언가를 바라거나 요구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아무도 나에게 불편한 기분을 주지 않으며 그저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하고 지나치는 일상을 다시 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적어도 나는 성공하거나 멋진 인생을 보여주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행복한 일상을 선물하고 싶어서 온 것이라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의미를 깨달은 하루였다.


그리고 산책은 나에게,

아직은 밖을 나서야 한다는

두려움이 남아있지만

새로운 행복의 시간을 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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