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쎈 오리엔테이션의 시작
드디어 나에게도 첫 출근이 다가왔다. 이미 직장인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출근이라는 것은 반복되어 익숙하지만 그만큼 피곤한 일이라는 생각이 더 컸던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에 여행이나 공부를 하러 온 경험이 다였던 나에겐 정말로 이번 출근이 반가웠다. 세상에, 내가 미국에서 돈을 벌게 되다니! 기특한 마음까지 들었다.
첫 주는 전체오리엔테이션이 예정되어 있어서 실제로 병동에 일하러 가는 것보다는 조금은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솔직히 오랜만에 종일 영어를 들을 생각을 하니 긴장이 되기는 했다.
미리 안내받은 장소를 찾아가면서 헤매다가 나와 같은 처지(?)로 보이는 사람들을 따라갔다. 우리나라로 치면 교육동 건물의 큰 강의실 하나를 간호사 전체인원의 오리엔테이션 장소로 준비해 두었는데 어림잡아도 거의 60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대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수업을 들었다. 교육이라서 마냥 편할 줄만 알았는데 앉아있는 것도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중간에 화장실이나 잠시 자리를 비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가뜩이나 영어가 부족한 내가 진행되는 교육의 내용을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두 시간에 한번 있는 쉬는 시간만 화장실을 다녀오며 꼬박 4일간의 교육을 마쳤다.
다시 학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기본간호학부터 병원 내 정책과 상황대처방법 등 다양한 주제로 교육일정이 가득 차 있었는데 첫날은 정말 영어 듣기 평가를 하는 기분이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듣기는 하지만 너무나 많은 정보가 끊임없이 지나가고 조금이라도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은 통째로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하나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에 들리는 대로 받아 적어보기도 하고 더 집중해서 알아들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다행히 듣는 것이 하루하루 나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기본적인 정보가 있는 전문분야에서는 눈치로 알아듣기도 해서 전체 내용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워도 어찌어찌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마지막날 치러진 시험이었다. 병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서 시험을 치르는데, 3과목의 시험에서 각각 80% 이상의 정답을 맞혀야지만 통과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재시험을 2번까지 응시할 수 있는데 따로 담당자를 찾아가서 치러야 하고 시험의 주제는 같지만 문제는 달라진다고 했다.
교육 이틀째, 나와 같은 해외출신 간호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들은 필리핀 출신으로 영어가 어렵다고는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나보다 훨씬 쉽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같은 나라 사람이기에 영어가 아니어도 통하는 모국어가 있으니 나는 옆에 있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처음으로 외로움과 소속감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영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오티주간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 드디어 시험을 쳤고 나는 수혈 관련 시험에서 70%를 받는 바람에 재시험에 당첨되었다.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속상했다.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시험을 틀린 것 같았다. 그리곤 필리핀 간호사들은 모두 합격했다는 것을 알고는 또 창피했다. 나만 여기서 모자란 존재인 것 같았다. 속상함과 창피함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이러다가 적응도 못하고 그만두게 되거나 쫓겨나는 것은 아닐지 두렵기도 했다.
재시험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있었고 나는 다시 재시험을 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 사이에 병동 오리엔테이션도 시작했기 때문에 첫 출근을 하고 난 이후에는 정말 몸과 마음이 너무나 바빴다. 그리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수록 자신감이 떨어졌다. ‘내가 정말 여기서 버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까? 어쩌다 운 좋게 오긴 했지만 결국 나는 여기서 이제 끝인 걸까?’하는 부정적인 오만가지 생각이 들면서 집에 오면 피곤함에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다.
이제 되돌아보면 내가 미국에 온 이후에 가장 불안하고 힘들어했던 기간이었다.
다행히 나는 두 번째 시험에서 통과를 했고, 여러 번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은 그저 실력을 평가하려는 것만이 아닌 중요한 내용을 제대로 알고 업무에 투입될 수 있게 하기 위함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결과로만 평가받던 것에 너무 익숙해서 시험에 떨어진 것만 속상해했는데 모르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일하는 것이 결국 나에게도 훨씬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좋은 경험을 했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래도 그런 마음이 제대로 느껴지기까지는 여러 날이 걸렸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힘든 마음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신앙에 의지하는 것과 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 이 두 가지뿐이었다. 나에겐 내가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 있고, 이렇게 힘들게 이곳에 왔는데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일을 못하더라도 열심히만 하면 쫓아내지는 않겠지 하는 심정으로 눈물을 꾹 참고 견뎌보기로 했다.
병동 오리엔테이션 첫날. 나의 프리셉터가 되어주기로 한 L을 만났다. 그저 평범한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부자연스러웠던 나는 첫날은 병동을 안내해 주고 큰 부담감을 주지 않고 하루를 보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착각은 첫날부터 무참히 깨져버렸다. 나는 해외에서 오긴 했지만 이미 경력이 있는 간호사이기에 첫날부터 바로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데이근무(아침시간대)에는 수많은 일들을 겪는 것이 일반적이다. 밤동안은 최소한으로 흘러가던 모든 스케줄이 정상적인 속도로(?) 정신없이 진행되고, 새로운 플랜이나 예상치 못한 상황 등 아주 다이내믹한 일들을 죄다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무슨 일이 계속 있다. 밤에 잘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업무강도는 가장 높은 시간대가 아닐까 싶다.
미국에서는 교대근무가 없는 대신, 데이근무 또는 나이트근무로 자신의 근무일정이 고정되어 있으며 12시간 근무가 기본이다.(부서에 따라 예외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병동은 그렇다) 근무시간이 길다 보니 퇴근하면 최소 만보 이상 걸었던 다리도 아파오고 종일 미친 듯 바쁜 업무를 마치고 평화를 찾으면 멍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집에 오면 바로 씻고 잠에 들어야 다음날 아침까지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늦게까지 깨어있거나 늦은 저녁을 먹는 것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사실 병동에서의 경력이 매우 적은 편이었기에 한국에서도 학부 때 기본간호학에서 배운 술기들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경력을 채우던 병원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해보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내가 적응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고는 느낀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할 만큼 여러 번 경험해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무작정 시도해 볼 자신이 없는 술기들도 있었고 특히 미국에서는 내가 해온 것들과 얼마나 다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해야 했던 거의 모든 술기를 프리셉터 L에게 시범을 보여달라고 부탁하며 일을 배웠다. 자신 없는 일을 무작정 덤벼서 하는 것은 나의 업무 스타일도 아니었으며, 이곳에서는 내가 하는 것에 따라 나의 면허 존폐가 달려있기에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L은 내 의견을 존중해 주었고 우리가 함께 맡은 환자들에게 해야 하는 거의 모든 간호행위의 시범을 보여주었다. 나는 보면서 내가 알고 있는 것과의 차이가 있는지, 하면서 가장 염두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인지를 판단하면서 최대한 한 번에 모든 것을 배우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다 보니 내가 기억하고 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하루하루 일하며 나가떨어질 만큼 힘들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그리고 나는 특히, 환자와 보호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어려웠는데 일단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기가 너무 힘들었다. 우리가 영어공부를 하면서 듣게 되는 듣기 평가처럼 또렷하고 천천히 말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픈 사람들은 말하는 것도 불분명하게 작은 소리로 말하기도 하고 우리말로 하자면 신조어나 줄임말을 쓰는 사람들도 있어서 정직한(?) 영어표현만 쓰는 나에겐 또 하나의 장벽이 느껴졌다. 그래도 한 번은 다시 되물어보면서 그 뜻을 파악하려고 했고 도저히 모르겠으면 프리셉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영어로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어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거기다 또 다른 문제는, 지금 일하고 있는 부서인 내과경력이 내 경력 통틀어 거의 몇 개월에 지나지 않다 보니 약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도 많이 버거웠다. 우리나라와 이름이 같은 약도 있고, 성분명으로 약을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정말 다양한 약물을 복용하는 내과환자들의 약을 열개 이상 준비해 가면서 일일이 설명하고 주는 것에 식은땀을 엄청 흘렸다. 이제는 반복되는 약들이 있어서 많이 익숙해졌지만, 초반에는 약 이름과 효능은 숙지하고 환자에게 가야 하니 환자방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약을 외우는 것도 정말 오래 걸렸다.
유닛 오티가 3주 차에 접어들자 도망가고 싶을 만큼 힘든 상황은 조금 나아졌다. 여전히 환자 신체사정을 하고 간호계획을 짜는 일에 시간이 매우 많이 걸렸지만 그래도 첫 주보다는 장족의 발전이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12시간 내내 항상 종종거렸고 프리셉터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초조했다. 엄마 없는 아이처럼 자신감 없고 불안해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이러다가 독립은 할 수 있을지, 미국까지 와서 다시 백수가 되는 것은 아닐지 너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이미 먼저 미국에 온 다른 지역에 있는 간호사들의 소식을 카페에서 보며 위로할 거리를 찾기도 했고, 내가 부족함이 많아서 이렇게 힘든 것인지 눈물이 나기도 했다. 내가 너무 늦은 나이에, 너무 준비도 없이 온건 아닐까. 내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너무 만만히 본 것은 아닐까. 애초에 간호사라는 직업이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은 아닐까.. 정말 많은 생각으로 나 자신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내 카카오톡 프로필의 문구를 보게 되었다.
- This too, will pass away.
이 또한 지나가리라.
처음 간호대학을 가겠다고 마음먹었던 27살의 나도,
간호사가 되어 처음으로 대학병원에서 일을 시작했던 32살의 나 역시,
미국에 와서 겪어보지 못한 힘든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는 44살의 나에게,
그동안 이렇게나 잘 이겨내 왔다고, 그리고 이 또한 지나간다고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소심하고 걱정 많은 완벽주의자인 나에게 이제는 너무 겁먹고 힘들어하지만 말고 그동안 이만큼 잘해왔으니 나를 믿어주고 힘을 낼 수 있게 응원해 주자며 나 자신을 토닥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에 고생했지만 위로와 응원을 해주지 못했던 나에게 이제는 무언가 해주기로 했다.
우선 쉬는 날은 충분히 늦잠을 잤다. 그리고 일어나서는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어떤 날은 일어나자마자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셨고, 어떤 날은 뒷마당을 거닐며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여유를 즐겼고, 또 어떤 날은 강아지와 고양이들을 맘껏 쓰다듬어주면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질 좋은 재료로 만든 맛있는 집밥을 먹으며 남편과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고,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장보기를 하러 외출을 했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좋아하게 된 산책도 즐겼다.
참 별것 아닌 일들이 나를 편안하게 했고 기분 좋게 했다.
그 뒤로도 나는 여전히 열심히 일하는 중이고, 아직은 갈길이 먼 것들도 있으며, 예상외로 선전하는 부분도 있다.
어쨌든 나는 남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이왕 비교를 하자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는 것을 선택했고 또 그것이 어떤 모습이 든 간에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떼돈을 벌기 위해서 미국에 온 것도 아니고, 잘난 척하고 싶어 이 길을 택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선택한 삶에서 나 자신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을 방법을 찾기 위해 선택한 길을 묵묵히 걷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이 될지 알 수 없으나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가끔 뜬금없이 내 부족한 모습이 내 안정과 만족감을 무너뜨리고 한없이 무기력하고 보기 싫은 나로 되돌아가 버릴 때도 있지만 오늘도, 내 인생은 우상향 한다는 걸 알기에 소중한 내 마음을 다독이며 내일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