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고초려의 미학
미국에 와서 첫 아침이 밝았다. 오늘의 할 일은 디트로이트 공항에 렌터카를 반납하는 일이다. 이제 차가 없으니 뚜벅이로 다녀야 하기에 차를 반납하기 전 집 근처 마트에 가서 먼저 필요한 것들을 급하게 사서 집에 넣어두고 공항으로 향했다.
미국 우리 집에서 공항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지만, 선택권이 없어서 공항반납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불렀던 우버비용이 거의 9만 원이나 했다. 그래도 무사히 반납을 하고 집에 오니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 출근을 하기 전까지 약 한 달이 남았는데 그때까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가장 큰 이유는 영어였다. 잘하든 못하든 이곳에서 이제는 우리말로만 살아갈 수가 없다. 전화든 직접 대면을 하든 내가 가진 영어실력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와서 덜컥 겁이 났다. 아마 이민이 아니더라도 여행이 아닌 일정기간 거주의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오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겪을 만한 일일 것 같다. 내가 오자마자 영어에 대한 부담감을 더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신분증을 다시 받는 과정 때문이었다.
나와 남편의 여권에는 1년간 유효한 이민비자가 붙어있지만 미국에 와서 신분의 제약이 없이 살아가려면 이곳에서 다시 신청해야 하는 신분증이 있다.
SSN, 운전면허증, 영주권.
SSN은 일종의 주민등록번호인데, 소셜넘버 또는 소셜카드라고 부른다. 근로 등의 수입이 있는 경우에 특히 필요한 번호이다. 영주권수속 시 함께 신청이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신청자체가 누락이 되며, 미국에 도착해서 재신청의 과정을 거쳐 받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때, 미국의 느려터진 행정속도를 실감할 수 있는데 입국 후 2주간은 처음 신청이 들어간 것을 확인할 수가 없어서 무조건 기다려야 하고 그 이후에는 누락여부를 확인해서 누락 시 재신청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가입해 있는 한 포털 카페에서 여러 정보를 수렴한 뒤, 일단 소셜오피스에 가서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산 넘어 산이라던가. 가기도 전에 생긴 또 다른 문제는 자동차였다. 우리는 렌터카를 이미 반납해서 걷는 것 이외에는 장기렌터카나 우버, 또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는데 뭐든 만만치 않았다. 렌터카는 편하지만 비용이 비쌌고, 우버는 잠깐 이용하기엔 편했지만 항상 나가야 할 시간보다 훨씬 일찍 준비를 하고 대기해야만 했으며 대중교통은 없다시피 했다.
이곳에 오니 다들 자동차를 신발에 비유했다. 없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차를 사려고 해도 신분증이 필요하고, 신분증을 받으려면 차가 있어야 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현실을 고민하다 걸어서 편도 한 시간 정도니까 운동삼아 걸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걸어서 왕복 3시간이나 되는 그 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세 번이나 왕복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얼마나 먼지도 모르고 이 넓디넓은 땅을 보며 그저 감탄하며 걸었다. 나중에는 추억이 될 거라는 농담도 하면서.
첫 소셜오피스 방문은 입국 11일째였는데, 원칙주의자 오피서를 만나는 바람에 입국 이후 비즈니스데이로 14일을 기다리고 오라는 말에 소득 없이 발길을 돌렸고, 그날 저녁 포털 카페글에서 담당자의 재량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보고 이틀 뒤 다시 그 길을 걸어가서 다른 담당자를 만나게 되었다. 입국 13일째에 SSN이 누락되었음을 확인 및 재신청을 했고 빠르면 7일에서 늦으면 10일 정도 뒤에 발급된 카드가 집으로 갈 거라는 말을 듣고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기다린 지 7일째 되던 날,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빨리빨리 민족 두 사람은 또다시 걸어서 오피스를 가게 되고 다시금 원칙주의자 선생님과 조우하게 된다. 그렇게 세 번째 방문에서도 아무 소득이 없자 앞으로는 사무실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고 우습게도 딱 열흘 째 되던 날 우편으로 온 소셜넘버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첫 삼고초려가 끝났다.
자, 다음은 운전면허증이다. 미시간주는 한국과 면허교환이 가능해서 국문/영문 면허증을 소지하고 있으면 바로 미시간주 면허증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너무 좋았다. 시험 치지 않아도 된다니!
우리나라의 운전면허시험장 민원실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이곳은 SOS(Secretary Of State)라고 하는데, 집에서는 도저히 걸어갈 수 없는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우버를 이용했다. 실제로 이동거리는 15분 정도였지만 그에 비해 비용은 아름답지 못했다. 그래도 면허증이 있어야 차도 살 수 있고 미국에서는 신분증으로 쓸 수 있기 때문에 얼른 처리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곳에도 한 번의 방문으로는 일을 처리할 수가 없었다.
첫 방문에는 뭣도 모르고 예약 없이 갔었는데, 다행히 마지막타임에 자리가 비어서 현장에서 예약을 해주셨다. 도착한 시간으로부터 세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는데 우리는 갈 곳도 없었고 우버비용도 아까워서 그냥 대기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현장예약을 해주셨던 분께서 그런 우리가 안타까워 보였는지 계속 여기 있을 거냐고 물으시고는 예약에 노쇼한 사람이 생기자 중간시간에 끼워주셔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업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도 원칙주의자 오피서가 있었다. 그 당시 소셜카드가 오지 않아서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월세계약서와 여권, 여권에 붙은 영주권비자로는 불가능하다며 소셜카드를 가져오라고 했다. 아쉬웠지만 이 나라의 방식이니 따르기로 했다.
두 번째 도전에서도 소셜카드 없이 다른 담당자를 만나기를 기대하며 이번엔 선예약 후 도전했지만 또 거절당했다.
마지막으로 소셜카드가 도착한 뒤 면허증을 받으러 갔을 때에는 다행히 운전면허증은 받았지만, 원칙주의자 같던 담당자를 다시 만나면서 은근한 인종차별을 겪기도 했다.
잠시 그 스토리를 적어보려 한다. 모든 미국인이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본인이 특히 어느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한다면 언행을 조심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내가 방문한 SoS는 한국인이 제법 많은 지역이었는데, 남편이 영어를 할 수 없어서 내가 통역을 해줘야 한다고 하니 “미국에 왔으면 영어를 해야지 그것도 못하면서 영주권만 있으면 다인가?”라는 발언을 해서 참으로 놀라웠다. 그래서 나는 “남편은 영어를 공부하는 중이야. 누구나 처음은 있는 거잖아”라고 답했지만 그 담당자는 “글쎄 나는 이해 못 하겠는데”를 시전 했다. 당시에는 화가 났지만 솔직히 그런 인간을 상종하며 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면허를 받고 나면 다시 안 볼 사이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지금 다시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싸우지는 않았어도 차분하게 그 사람이 잘못된 편견을 가졌다는 것을 설명하고 이 지역을 대표하는 기관에서 일하는 담당자로서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는 말을 해줄 것이다. 이제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지 어렴풋이 알고, 나의 의무를 지키고 권리를 주장하는 법에 대해 알아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곳에서도 삼고초려 끝에 면허증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운전면허증을 교환해 주는 조건은 모든 나라가 해당되지 않으며, 우리나라가 일종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필리피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필리핀의 면허증은 미시간주에서는 통용되지 않으며 다시 모든 면허시험과정을 다 통과해야 하는데, 시험일정을 잡는 것도 꽤나 오래 걸린다고 한다. 입국한 지 두 달 가까이 되어가는 필리핀 친구는 아직 도로시험일정을 기다리고 있고, 중고차는 이미 사서 주차장에 있다고 한다.
이렇게 두 번의 삼고초려를 겪고 나니, 영주권은 언젠가 오겠지라는 마음으로 배송조회만 했다. 경험은 스승이라더니 마지막 신분증은 안달하지 않고 기다리게 되었고 한 달이 조금 넘은 시점에 집으로 도착했다. 그렇게 신분증 3종세트가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