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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국간호사 Sophia Jul 22. 2024

드디어 미국이다

집에 안전히 도착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

 드디어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오헤어공항에 도착했다. 원래 우리가 정착할 도시는 아니었지만 반려동물을 여럿 데리고 가야 했기 때문에 국적기를 이용했다. 역시 우리나라 항공사의 배려와 친절은 세계적이라는 것을 실감하며 편안하게 미국에 오게 되었다.


하지만, 입국심사 때 이유를 모른 채 세컨더리룸으로 끌려가기도 한다는 경험담이 가끔 있어서 괜히 겁이 났다. 그래서 입국할 때 필요하다고들 하는 서류들을 한가득 챙기고 마음의 준비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입국심사는 허무하게 끝이 났다. 강아지를 데리고 심사줄에 서 있어서인지 모두에게 친절한 인사를 받았고 딱딱하기로 소문난 입국심사관은 내 직업과 영주권을 받을 주소만 확인한 뒤 미국에 온 걸 환영한다며 보내주었다. 시작이 좋았다.


이제 다음 할 일은 대가족을 이룬 우리 고양이들을 챙기는 일이었다. 그동안 10여 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한국의 집 근처에서 떠돌던 아픈 고양이들을 구조하고 치료하며 돌보던 나는 어느새 고양이를 가족으로 맞이하게 되었고, 그중에 입양을 보내고 보내다 끝내 남아있던 아이들을 모두 입양하기로 선택하면서 7마리의 고양이 집사가 되었다. 이민을 결정한 것은 고양이 집사가 되기도 전의 이야기였으니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이사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이건 무모할 수도 있고 한편으론 용감한 결정일 수도 있지만 엄마길냥이가 집에서 낳은 아기들은 더 이상 길냥이가 아니었고 내가 책임져야만 하는 가족이었다. 남편과 내가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이 들었지만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 아이들을 매일 보며 잘한 결정이라 믿고 있다.


검역관은 우리 부부와 아이들을 보며 몇 가지를 확인한 뒤 문제가 없는지 출국장을 나갈 수 있게 해 주었고, 케이지안에서 눈만 꿈벅이던 냥이들은 그제야 나를 보고 울기 시작했다. 안도의 울음이었다.


사람 2명의 짐은 얼마 안 되었지만, 노견 한 마리와 7마리 고양이의 짐은 너무나 많았다. 우리는 아이들을 케어해야 했어서 짐을 옮겨주시는 포터를 한 분 섭외해서 입국장을 빠져나왔고 그렇게 우리의 이민생활 실전 편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미리 예약한 렌터카를 가지러 가야 했지만 렌터카 사무실까지 이동하기에는 짐이 너무나 많았고, 공항에서 렌터카사무실들이 모여있는 곳까지는 트레인을 타고 이동해야 했기에 도저히 함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둘 중 한 사람은 짐과 반려동물을 지키고 한 사람은 차를 대여하러 가야만 했다. 여기서도 우여곡절이 시작된다. 나는 영어를 할 수 있지만 차를 몬 지 너무 오래되어 운전이 자신 없었고, 남편은 운전은 베테랑이지만 영어가 전혀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한참 고민을 한 끝에 남편이 가기로 했다. 영어는 도저히 안되면 통화를 해서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남편을 보낸 뒤 공항바닥에 널브러져 쿨쿨 잠든 강아지를 쓰다듬고 고양이들을 진정시키며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남편은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해서 나에게 전화를 했고 혹시 모르는 염려에, 기존에 들어두었던 보험에다 추가로 안전장치를 더 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소위 눈탱이를 좀 맞긴 했지만 아무 사고 없이 안전히 온 것에 돈을 쓴 것이라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차를 빌렸다는 전화 이후 한참만에 남편이 보였는데 오자마자 짐카트를 하나 가져간 남편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곤 오기는 오는 건가 싶을 때쯤 한참만에 나타났다. 그리곤 다시 다음 짐카트를 밀고 총총 사라지더니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대화할 시간도 없이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갔다.


마지막 짐을 다 싣고 고양이와 강아지를 차에 태우면서 알게 된 사실은 공항바로 앞의 도로에서는 운전자가 자리를 떠나지 않는 조건으로 잠시 정차를 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사실이었다. 많은 짐에 지켜줄 사람도 없어서 남편혼자 눈치를 보며 짐을 하나씩 챙겼다는 걸 알고 나니 짠해졌다. 아무튼 우리 모두는 공항에 도착해서 빠뜨린 짐 하나 없이 안전하게 집으로 가는 렌터카에 몸을 실었다.


다음으로는 우리 고양이들 중 두 마리를 먼저 데려가주신 고마운 분을 만나서 아이들을 픽업하는 일이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인연들이 있다. 그리고 그 인연들은 내가 의도하거나 노력만 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부부가 이민을 오면서 감사했던 것은, 일면식도 없는 분들의 고마운 손길을 정말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내외가 데려올 수 있는 반려동물의 최대숫자는 6마리였다. 그러니 나머지 두 마리는 카고를 통해 업체에 맡기거나 우리 대신 데려가주실 지인을 수소문하는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부탁할만한 사람이 없어서 업체에 연락을 몇 군데 했다. 하지만 우리가 출국하는 날짜가 공휴일 바로 다음날이었고, 검역소가 운영을 하더라도 업체에서는 업무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떠나는 날 아이들을 픽업해서 검역소에 데려가고, 하루를 데리고 있다가 그다음 날 비행기를 태운다고 했다. 도저히 우리에게는 맞출 수 없는 일정이었다. 그래서 결국 플랜 b로 지인을 찾기로 했다.


남편은 내가 이민을 결정한 이후에 다니던 대기업에서 마침 예정이던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그리고 16년 가까이 다니던 곳에 안녕을 고했다. 이후에는 자신이 잘할 수 있으면서도 앞으로 이민생활에서 체득하면 좋을만한 기술을 하나씩 배웠고, 자연스럽게 자격증콜렉터가 되었다.

우리 아이들을 데려다주신 분은 마지막 남편의 자격증공부를 위해 만난 선생님의 어머니셨고, 평소에도 미국의 친구분을 만나러 종종 다니셨기에 해외에 혼자 가는 것에 부담이 없으셨다. 더욱 신기한 것은 미국의 친구분들이 다 한국에서 간호사로 일하시다 미국에 가셔서 그곳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정년퇴직을 하셨다는 점이었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을 보니 인연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아이들을 업체에 보내는 비용과 비슷한 금액으로 왕복 미국행 국적기를 결제해 드렸고, 필요에 의해 만났던 인연이었지만 이제는 정말 고맙고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데려가주신 선생님의 친구댁에 도착하여 아이들을 만났는데, 세상에 미국까지 먼 길 왔다며 한식으로 넘치게 식사를 준비해 주셨다. 오자마자 우여곡절을 겪은 뒤라서 그런지 더 감동하고 맛나게 밥을 먹었다.


같은 직업이고, 앞으로 내가 겪어야 하는 일들이기에 미국에 계신 선생님의 친구분께서는 여러 가지 조언과 본인의 경험담을 들려주셨고 새삼 우리나라 간호사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 한국을 대표하는 간호사로서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환자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어 내 이후에 우리 병원에 오는 한국인에게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잘 적응해서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며 인사를 하는데 눈물이 살짝 났다. 나는 감정이 풍부한 편이라 우는 일이 많은데, 괜찮은 척하느라 아주 힘들었다.


그렇게 많은 분들의 도움과 배려로 우리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미시간주 디트로이트까지 열심히 달려 무사히 미국 우리 집에 도착했다. 고양이 화장실과 밥, 물을 챙겨주고 강아지와 짧게 산책을 하며 야외배변을 챙겨준 뒤 우리는 장렬하게 기절하여 꿈나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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