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국간호사 Sophia Mar 11. 2024

지난 10년간 뭘 했나요?

나의 꿈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올해가 2024년이니, 내가 처음 해외간호사가 되기로 결정하고 미국간호사국가시험인 엔클렉스(NCLEX)를 접수하게 된 2015년으로부터 10년이 되었다.

사실 간호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런 계획이 전혀 없었고(해외간호사가 되는 방법도 모르기는 했다) 간호사가 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제2의 인생계획이었다.


학부 1학년때 방학을 이용해 학교에서 모집한 재학생 어학연수 프로그램에서 호주를 가게 되면서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 홈스테이 마미가 뉴질랜드사람(키위)이었지만 간호사였기 때문에 호주에 정착하며 일하는 것을 보고 나라를 이동해서 일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우연히 3학년 선배에게 국비장학생 지원으로 미국 대학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고 그때부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그 선배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앞서 호주에 가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기회가 주어졌어도 갈 생각이나 준비 따위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학부공부만으로도 매우 벅찬 일상이었기 때문에...


정부지원사업이기에 항공료부터 학비, 체류비 일체를 모두 지원받아서 말 그대로 몸만 가면 되는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런 기회를 아무에게나 줄 리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지원했던 해부터 영어인터뷰가 신설되었고 그래서 예년보다 적은 학생이 지원하기도 했다고 들었는데 오히려 그 상황이 나에게는 기회라 느껴졌다. 우리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교환학생을 와있던 필리핀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과외를 받기도 하고 영어수업을 해주던 원어민 선생님께 지원서 영어버전을 도움받기도 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부끄럼도 많고 누군가에게 스스로 나서서 뭔가를 부탁하고 찾아다니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었는데, 나에게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평소의 나라면 하지 못했을 일들을 경험했고 그 경험 또한 나를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도록 만든 것 같다.


국비장학생 선발은 지역구를 나누어 이루어졌는데 듣기론 서울경기수도권은 엄청난 경쟁률이었다고 했다.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학교 중 학비가 제일 저렴한 곳으로 진학했기 때문에 지방에 속했고, 그나마 경쟁률이 조금은 낮은 지역에서 지원을 할 수 있었다.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영어인터뷰를 앞두고 인터뷰에서 나올만한 내용을 공부하던 중에 내 룸메가 인터넷으로 재밌는 뉴스를 들려줬다. ‘한국인이 가진 성의 인구비율’에

대한 기사였는데 그 친구와 나는 김, 이, 박에 해당하지 않는 성씨였기에 많이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나는 희귀한 성씨에 해당하기에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한국에 얼마나 되는지 듣고는 매우 놀랐는데, 며칠 후 인터뷰에서 이런저런 질문 끝에 성씨에 대한 질문을 듣게 되었다. 나는 촉 또는 감이 좋은 편인데,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나는 인터뷰에 통과했다’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안 그래도 친구와 우연히 이번주에 그 내용을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는데 내 성씨가 매우 적은 수였더라는 말을 할 수 있었는데 나의 영어실력을 파악하려고 인터뷰를 했던 것이기에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할 수 있는 대답이 있어서 실제로도 인터뷰를 통과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고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더라도, 최대한 준비하고 노력하는 마음이 있고 실제로 과정을 겪어낸다면 누구든지 내가 겪은 상황처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떠난 미국에서 나는, 한국에서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느낌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되었고 자유롭지만 그 자유 안에서 질서와 규칙이 있는 해외의 생활이 잘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5년짜리 학생비자를 받았기에 미국에서 정착하고 공부를 할 방법도 알아봤으나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학부과정은 인정을 해주지 않아서 한국으로 돌아오면 졸업반인 나에게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고 나는 졸업 후 미국면허를 따고 취업이나 대학원진학의 방법으로 다시 미국에 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에 가서 수업과 실습을 하고, 해외간호사(당시는 미국간호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 2010년이기에, 어쩌면 내가 해외간호사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은 15년이 된 것이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도 결국 꿈을 이룬 것은, 단지 나만 잘살고 싶고 남보다 우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간호사라는 직업은 열정과 열의가 없더라도 한국에서 특히 여성에게, 비교적 나이의 제한을 받지 않으면서 직장생활을 하게 해주는 좋은 직업군에 속한다. 하지만 그만큼 아픈 사람과 그들의 보호자, 병원내외에서 만나는 여러 직군들과의 의사소통사이에 감정소모가 많고 체력적으로도 힘든 직업이기도 하다. 그래서 단지 돈을 벌 수 있다는 마음만으로는 할 수가 없고, 기본적으론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이 수반되어야 하며 나보다 약한 이들을 돌보며 책임지는 엄마의 마음이 깔려있어야만 한다. 이론과 술기는 노력과 경험에 비례하여 능숙해질 수 있으므로 앞서 말한 기본이 바탕이 된다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는 분야이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불황이 지속되고, 직장인들의 주머니가 가벼워지고, 대학을 졸업한 인재들이 홀대받을 만큼 학위가 높아진 지금의 상황에서 좀 더 나은 대우와 조건을 누리고 싶거나 자녀들에게 경쟁 없는 학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이유로 해외이주나 취업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나 역시 동감하는데 다만 그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과 중간에 포기하게 될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을 자책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드린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간호사들이 예외 없이 모두 비슷한 어려움 속에서 이뤄낸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축하할 일이고 대단하게 볼 수 있겠지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서, 또는 중간에 포기했다고 해서 그들이 인생에서 실패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생의 앞날은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가 없다. 그러니 남과 비교할 때는 내가 뭔가를 하고 있을 때 잘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는 용도로만 쓰고, 이외에는 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만을 비교하며 내가 꿈꾸는 미래를 위해 방향키를 돌리기 바란다.


[미국간호사, 이민 가기]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미국에서 새로 시작하는 이야기들로 채워보겠습니다.


궁금한 것이나 정보가 필요한 내용은 언제든 댓글로 질문 주시면 답을 드리겠습니다^^



이전 16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