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미국에서 정전이라니
참 많은 일을 겪어보는 요즘이다. 간밤에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서 태풍이 오려는 건가 싶었다. 2층집보다도 훨씬 높은 크기의 엄청 굵은 나무들이 강아지풀 휘날리듯 휘청였으니 말이다. 비교적 작은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뒷마당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약간 무섭기도 했다. 미국은 정전이 되는 일이 종종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어서 휴대폰 충전부터 해두었다. 잠들기 전까지는 아무 일이 없었다.
출근할 시간이라 일어났다. 온 세상이 깜깜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더듬거리며 화장실을 다녀왔다. 자연스럽게 화장실 스위치를 올렸으나 여전히 암흑이었다. 정전이 된 것이다.
출근 때마다 내 도시락을 담당하는 남편은 휴대폰 손전등 기능으로 주방을 밝히고 아침을 준비 중이었고, 어둠 속에서 습관적으로 씻고 옷을 갈아입은 나는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뭐가 보여야 밥을 먹든 하지. 결국 바나나 하나를 집어 들고 출근길에 올랐다.
온 동네가 깜깜했다. 미국에서는 해가지면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집 밖에 있는 전등을 켜두는 문화가 있는데 여전히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덕에 우리 동네라인이 완전히 정전이 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가로등도 없는 동네라서 자동차 전조등만으로 어둠을 뚫고 동네를 빠져나왔다. 큰 도로에 나왔지만 신호등도 먹통이었다. 어느덧 가을이 내려앉은 아침은 칠흑같이 깜깜했고 전기가 나간 마당에 출근하는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괜스레 집에 있고 싶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전기를 만들어내는 자원이 없어 수입을 하는 나라이지만 정전은 아주 드문 편이다. 내가 좋은 동네에 살았던 덕인지 살면서 두세 번 정도 정전을 겪은 적이 있지만 그나마도 거의 반나절 이내에 복구되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위상을 가졌다던 미국이라는 나라는 정전이라는 이벤트에 며칠을 허덕였다.
출근을 했고 병원에서의 하루를 똑같이 흘러갔다. 병원은 정전지역에서 살아남은 것 같았고 혹시 정전이 되었더라도 수술이나 전기를 사용하여 작동하는 기계들을 꼭 써야 하는 환자가 있기 때문에 비상전력이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인계를 받기 전 전체인계 시간에 모여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동료들 중에도 정전이 된 동네에 사는 이들이 몇몇 있었고 다들 냉장고에서 녹아내리는 음식들을 걱정했다. 나는 정말 다행이었다. 후천적 미니멀리스트로 살아가던 중이라 어느 정도 냉장고가 차면 더 이상 장을 보지 않고 있는 재료를 다 소진할 때까지 냉장고 파먹기를 해왔기에 우리 집 냉장고는 정전이어도 버릴만한 음식은 거의 없었다. 어쩐지 코스트코나 샘스클럽 같은 큰 마트에 가면 제너레이터를 팔더라니!
점심을 먹으러 브레이크룸에 와서 집에 있는 남편에게 정전 상황을 물었다. 여전히 전기는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상황이 어떤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 동료가 DTE라는 회사에서 확인을 할 수 있다고 알려주어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전인데, 홈페이지에 접속하자마자 어제 정전에 대한 공지사항이 떴다. 우리 집 주소를 입력하니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어젯밤 강풍으로 인한 심한 파손으로 인해 직원이 부지런히 복구를 하고 있으니 기다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우리 집 라인에 있는 집들이 전부 정전이 된 상황이었다.
이때는 아직 낮기온이 27-8도 더운 시즌이어서 털둥이 강아지가 더워할 것에 걱정이 되었다. 남편도 참다못해 에어컨이 나오는 근처 몰에 구경 겸 피난을 다녀왔다고 했다. 오후 늦게까지 복구가 될 거라 기대했던 우리에게 미국의 정전은 자비롭지 않았다. 퇴근을 할 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오늘은 무조건 해가 지면 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은 쉬는 날이어서 하루정도 샤워를 하지 않아도 지장이 없었으므로 집에 가자마자 저녁을 먹고 간단히 씻은 뒤 얼른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매일 자려고 누워서도 휴대폰을 보고 검색을 하며 업무 넘치는 현대인인 척했는데 오늘은 다 의미 없고 그냥 해가 지면 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아주 오랜만에 경험한 정전이라서 재밌다고만 생각했다. 좀 모지란 것인지 긍정적인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렇게 칠흑 같은 밤을 맞이하며 쿨쿨 잠만 잘 잤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여전히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고 냉동실에 들어있던 음식들도 이미 녹아있는 상태였다. 오전시간 동안 냉장고 정리를 하고 전기 없이 할 수 있는 집안일을 했다. 냉동실은 텅텅 비어있다 싶었는데도 결국 버릴 것이 나왔다. 냉동식품을 거의 안 사 먹는 편인데 호기심에 구입했던 후라이드치킨 한 봉지는 결국 맛도 못 보고 버려졌다. 덕분에 냉장고 대청소를 해서 기분은 좋았다. 냉장고에는 쌀과 김치 이외에는 반찬을 쌓아놓고 먹지 않아서 양념들 이외에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대신 재료를 이미 소진한 상태라 밥반찬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점심을 뭘 해 먹어야 하나 고민하던 그 순간 갑자기 전기가 들어왔다! 드디어 문명의 생활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역시 휴대폰 충전이었다. 인터넷 와이파이가 잡히자 갑자기 보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사람은 역시 망각의 동물인가 보다. 문명으로 돌아오니 불편함은 사라졌고 이내 정전이전의 생활로 빠르게 회귀했다. 그리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유튜브를 보며 라면을 끓여 먹었다.
사소한 일상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꼈다. 다시 DTE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우리 동네는 다행히 전기가 복구되었다고 되어있었지만 여전히 몇만 가구의 전기는 끊겨있는 상태였고 복구에 여러 날이 더 걸릴 거라는 안내가 보였다.
이민을 오기 전까지 미국은 뭐든 양이 넉넉하고 일상도 여유로우며 선진국다운 무언가가 있을 거라 막연히 기대했다. 그러나 이 넓은 땅덩어리에 자연재해가 오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고 우리나라가 작고 미국에 비해서는 별 볼 일 없을 정도의 미약한 나라일지 모르나 한편으론 오히려 작은 나라이기에 편리한 부분이 빨리 적용될 수 있고 크고 거대한 나라에 비해 좋은 점이 될수도 있다 느끼게 되었다.
이런 찰나의 깨달음을 통해서 별것 아닌 것이 때로는 대단한 것일 수도 있고, 대단한 것도 사실은 별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나라에서 살아보겠다고 온 작은 나라의 쪼렙 간호사가 때로는 이 나라에서 태어나서 살아온 오랜 경력의 간호사보다도 능력 있고 열심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번졌다.
나도 여전히 젊은 세대에 속한다고 스스로는 말하고 있지만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고 젊음이 무기인 2030 세대들마저 노력과 진심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막막한 시대이다. 그러다 보니 거창한 목표를 만들거나 무작정 열심히 살기보다는 소확행을 추구하며 어떻게든 그냥 지금을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고 나와 다른 것들을 모방하거나 아예 부러워하지 않는 재미없는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건, 진심을 다해 노력하고 발전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맞닦뜨리는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그런 사람에게는 분명 빛을 발하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론 사소한 사건들 속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와 값어치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 생각들 속에서 나는 초라하기도 하고, 조금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 미국을 오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우리나라보다 좋은 나라에 가서 소속되어 살겠다는 긍정적인 마음과 한국에서의 삶이 너무 괴롭고 힘들어 도피하는 마음이 함께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 동안 미국간호사가 되기 위하여 넘어야 하는 산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씩 준비하고 진심을 다해서 노력하니 지금의 시간을 맞이했다.
여전히 이곳에서의 삶은 때로는 불안하고 두렵다. 알걸 다 알만한 나이에 전혀 모르는 곳에서 새로 태어난 기분이 이럴까?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도 불편할 것이 없는 일들이 이곳에서는 너무나 힘들고 어렵다. 안 할 수도 없다. 여기서 살고 싶으면 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미국이민생활에 전반적으로 만족하고 좋은 부분만 보려고 하는 이유는 내가 한국에서 어려움을 이겨내려 노력하고 미국에 이민을 와서 느낀 만족감과 보상, 내가 원했던 자유로움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지금 느끼는 찰나의 불안과 어려움들도 언젠가는 지나가고 더 좋은 것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만일 지금 나의 생활에 만족과 행복보다는 불안과 낙심이 큰 사람이라면, 내가 나의 인생에서 무언가 진심으로 노력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다. 그리고 그 진심의 진정성이 있다면 나처럼 그 결과를 꼭 얻게 될 거라는 사실을 먼저 겪은 사람으로서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겪은 일들을 나보다 아직 많은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도구로 사용하길 바란다.
쓰다 보니 너무 거창해졌다. 대단한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닌데 무튼 내 진심이 전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