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두 번의 만남
지난 2주간은 정말 어쩔 수 없이 브런치 글을 쉬었다. 사유를 말하자면 코로나와 다시 만났다... 미국까지 와서 또 만나다니 징한 놈.
이미 한국에서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코로나에 걸렸던 나였건만 여기까지 와서 다시 걸릴 줄은 몰랐음. 변이가 많을수록 덜 치명적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아닌 듯.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종종 코비드 때문에 입원한 환자를 담당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항상 PPE라고 부르는 보호장비를 잘 착용하고 일했기 때문에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 왔다. 퇴근 이후에는 쉬는 날에도 장을 보러 마트에 가는 것 이외에는 실내에 들어가는 일이 드물었고 그나마도 필요할 때만 외출하고 대부분 집에서 쉬었기 때문에 좀 억울하기도 했다. 병원이 아니었다면 마트에서 누군가에게 옮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코로나에 걸렸을 때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던 때라서 나같이 젊고(?) 증상이 대체로 가벼운(?) 사람들에게는 입원을 하거나 특정 치료제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너무 많은 확진자가 나올 때여서 보건소에서 생존물품들을 챙겨주는 것에서도 이미 밀려나있던 터였다. 그래서 약국에서 감기약, 두통약, 해열제 등등을 두둑이 사서 집에 칩거하며 남편과 둘이서 끙끙 앓으며 이겨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도 또 그 상황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가벼운 증상이었다. 목이 약간 칼칼한 것이 환절기에 얇은 이불을 덮고 자면 생기던 오한 같은 것이 잠시 있었고 아픈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서 점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컨디션이 점점 나빠지는 것이 느껴지면서 예전에 코로나에 걸렸을 때 겪었던 증상들이 겹치기 시작했다. 어째서 쎄한 기분은 틀린 적이 없는 건지 결국 그다음 날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증상이 심상치 않아 마스크를 쓰고 마트에 함께 붙어있는 약국에서 코로나 진단키트를 구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5천 원가량에 샀던 것 같은데 여기는 제일 저렴한 게 8불이었다. 한국돈으로 만원. 게다가 중국산... 그리고 차를 타자마자 집으로 가기 전에 검사를 했다. 그러자 너무도 빨리, 그리고 선명하게 두줄이 나왔다. 이런.. 코로나에 당첨되었구나.. 다행히 남편은 아무 증상이 없었고 괜찮을 거라 생각해서 앞으로는 집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격리생활을 하자고 했다.
나는 앞으로 며칠 동안 더욱 증상이 나빠질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바로 널스매니저에게 코로나에 걸렸다고 메일을 보냈다. 전화영어 울렁증이 있기도 했지만 그날은 아예 목이 아파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덜 머리 아픈 방법으로 스케줄 되어있던 근무를 뺄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 매니저는 근무를 나오지 않으려면 스태핑오피스와 차지널스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고 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짜내어 전화를 했다. 그 주에는 아직 두 번의 근무가 더 남아있었는데 내가 3개월가량 일하며 쌓인 연차를 소진하면 근무를 하지 못해도 급여를 받을 수 있었고 연차를 소진하기로 했다. 내가 있는 미시간 주에서는 한국에서처럼 해가 지나면 그냥 연차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근무를 하는 일정 시간마다 정해진 연차시간이 적립되고 휴가나 아파서 근무를 안 하게 되면 사용하는 개념이라고 지금까지는 이해하고 있다.
스태핑오피스는 나뿐 아니라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모두 전화를 걸고 스케줄을 조절하기 때문에 아주 사무적으로 필요한 것만 물어보고 근무를 조정해 준다. 그래서 나 근무가 있는데 못 나가겠어 그랬더니 아픈 거니 아니면 다른 사유니?라고 물어보았다. "나 코비드 걸렸어"라고 하니 아파서 근무 못 나가는 걸로 설정해 줄게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더 묻지 않아서 오히려 고마웠다. 그리곤 곧바로 차지널스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 그날 차지가 누군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냥 나 코비드 걸려서 근무를 뺐어. 이틀 못 나갈 거야라고 말하니 우리 착한 차지는 내 걱정을 해주었다. 이제 나는 합법적으로 이번주 근무를 다 빼고 요양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사실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고 전문의약품을 좀 받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아프거나 건강검진을 위해 병원을 가려면 내 주치의를 먼저 만나야 한다. 의료보험이 없는 경우에는 주치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증상이 심하면 얼전케어를 가게 되는데 우리나라 응급실을 가는 정도의 비용이 나온다고 생각하면 조금 비슷할 듯하다. 아니, 사실 그보다 더 비싸긴 하다. 나는 직장을 다니면서 의료보험에 가입을 했고 남편도 내 보험에 포함시켜 두어서 주치의를 만날 수는 있는 상황이었지만 사실 내 주치의가 누구인지, 그 의사를 만나려면 뭘 해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열이 계속 나고 두통이 지속되어서 정상적인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었고, 한국에서 비상약으로 가져온 감기약과 해열제를 증상에 따라 시간을 지켜 먹는 것 말고는 할 정신이 없었다. 아프니 비로소 우리나라의 병원 접근성이 얼마나 편리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보험이 있지만 의사를 만날 방법을 모르니 하는 수 없이 있는 약을 최대한 먹으면서 푹 쉬고 내 몸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실 미국에 오기 직전까지 일을 하다가 왔고, 그 와중에 우리 털둥이들까지 무사히 데려오려고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느라 정말 긴장된 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도착해서도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어서 내가 아니면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해결되지 않는 상황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한국에서 정착금을 아주 적게 가지고 무모하게 왔기에 첫 근무를 시작할 때까지 한 달 반동안 최저생활비로 살아야 했고, 일을 시작한 뒤에도 첫 2 주급을 받을 때까지 거의 두 달 동안 생존에 필요한 것 이외에는 전혀 돈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고생도 많았다.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하면서는 제대로 배워서 잘 일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쉬는 날은 녹초가 되는 일상이었다. 그렇게 미국에 온 지 4달 만에 나는 코로나에 걸려 장렬하게 넉다운되었다.
아픈 기간은 거의 10일 정도였는데, 약을 먹어야 하니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최대한 단출하게 음식을 만들어 먹고 약을 먹고 또 누워서 끙끙 앓는 순서로 일주일을 보냈다. 그 와중에 격리해서 지냈던 남편도 증상이 시작되어 함께 외부와 격리되어 동지가 되었다. 아픈와중에도 강아지 산책을 거르지 않았던 남편의 체력에 감탄을 하면서 말이다. 일주일정도 지나니 두통은 나아졌지만 열이 수시로 올라서 정상적인 생활은 여전히 힘들었다. 다시 출근할 날짜가 다가왔는데 전날까지 이미 모아둔 연차를 다 소진 한 상태였어서 급여를 못 받더라도 더 쉬어야 할지 고민을 엄청했다. 결국 출근을 했지만 퇴근할 시간이 되자 또 머리가 깨질듯한 두통이 몰려왔다. 돈이 뭔지 아픈데도 쉬지 못하고 다시 출근한 내가 바보 같았다. 그 와중에도 하루 나왔으니 돈을 벌었다는 생각을 하다니.. 둘째 날 다시 출근을 해서 약을 먹으며 일을 했는데 도저히 일을 마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12시간 예정된 근무 중에 8시간만 하고 4시간은 취소를 하고 집에 돌아왔다. 오자마자 안도감이 들어 약을 먹고 잠에 빠져들었다.
자고 일어나도 컨디션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인들이 정보를 주고받는 카페에서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미국에서 어떤 약을 먹는지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걸린 병이어서 그런지 한국에서 가져온 약으로는 극복이 안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약 이름을 알아내고 힘을 짜내어 남편과 함께 다시 약국에 갔다. 여기는 약도 비쌌다. 종합감기약과 증상별 감기약 3가지 정도를 제일 작은 패키지로 샀는데 60불이 나왔다. 그래도 병원 가면 한방에 200불씩 나올 텐데 이만하면 싸다고 생각했다. 집에 오자마자 약을 먹고 다시 잠이 들었는데 다행히 새로 사 온 약이 나에겐 효과가 무척 좋았다. 며칠간 나를 괴롭혔던 두통이 사라지고 있었다.
코로나라는 녀석은 나에게 2024년 9월의 2주를 빼앗아갔다. 뭘 하다 가을이 왔는지 모를 지경으로 진심 많이 아팠다. 게다가 그동안 내가 긴장하고 강박적이었던 일상까지 겹쳐서 크게 앓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다행히 나는 다시 건강한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이번 일을 계기로 느낀 점이 있다. 아프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일명. 아하! 모먼트였다.
첫 번째는 건강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나는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잔병치레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한 번씩 아프면 죽다 살아나는 기분을 느낀다. 그러면서 평소에 건강했던 내가 얼마나 행복했던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는데,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아픈 경험을 하면서 앞으로는 더욱 건강을 위해 좋은 습관과 운동을 꾸준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병원에 가는 것이 쉽지 않기에 미리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고 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 쉬는 날이 오면 내 주치의를 확인하고 변경이 필요하면 새로운 주치의를 선정해서 미리 예약을 하고 건강검진을 다녀와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곳에서는 생명의 위협이 있는 정도일 때는 응급실을 가고, 우리나라에서 갑작스레 아플 때 의원에 가듯이 얼전센터를 갈 수 있지만 증상이 심하지 않으면 이 조차 진료대상에서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평소에 내가 지병이 있거나 병원에 가야 할 만큼 문제가 있으면 주치의를 만나는 것만이 현실이다.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임에도 여전히 미국의 의료체계는 어렵다.
세 번째는 내가 꾸준히 해왔던 루틴을 지키는 것이 나에겐 소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쉬는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 우리 털둥이들과 느긋하게 오전을 보내고, 맛있는 집밥을 해 먹으며 남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몰고 나가서 맛있는 커피를 한잔 하는 오후의 휴식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알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내 경험을 글로 적으며 소통하는 것 또한 나에겐 중요한 루틴이었는데 이를 하지 못하고 날짜가 후루룩 지나가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속상하게 느껴졌다. 글을 멋들어지게 쓰거나 솜씨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나는 글쓰기를 참 좋아한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프기 전에는 무료하기까지 했던 내 자유시간이 이제는 참 많은 것을 도전하고 경험해 볼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체력적으로 일이 힘들어서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쉬는 첫날은 어영부영하며 하루를 보내기 일쑤였다. 그런데 증상에서 회복되고 처음으로 쉬는 날, 단 하루의 휴일일 뿐이었는데 정말 바지런히 많은 일을 했다. 아침에 늦잠은 잤지만 일어나서 아점을 간단히 먹고는 대청소, 빨래, 설거지, 반찬 만들기, 털둥이들 발톱 깎기와 귀청소하기 등등 그간 해주지 못했던 집 가꾸기에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집안일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오후에는 남편과 커피를 마시러 외출을 해서 앞으로의 우리의 앞날에 대해 건설적인 대화도 했다. 보통은 일하다 중간에 하루 쉬는 날은 다음날 다시 일하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껴서 집안일도 거의 안 하고 쉬기만 하다가 해가 지는 일상이었는데 모처럼 보람 넘치는 하루를 보낸 것 같다. 그리고 그동안 미국에 가면 해봐야지 했던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계기를 통해서 배운다. 사소한 일상의 변화이거나, 큰 목표의 달성이거나, 때로는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어쩌면 항상 우리 곁에 있던 것까지도 새삼스레 배움의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좀 더 나은 내가 되려는 다짐과 실천을 하기도 한다. 그런 것들이 모여 일상이 되고 인생이 된다. 그렇기에 실패한 인생은 없다. 그리고 항상 더 발전하는 기회가 된다.
좀 거창하긴 하지만,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병치레를 하게 되면서 그냥 아팠고 나았다에서 끝나지 않고 건설적인 생각을 해봤다는 것이 좀 기특했다. 이제야 어른이 된 건가 싶기도 했고 어쩐지 나 자신이 멋져 보이기도 했다. 작은 포인트에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방향을 정하고 실행해 보려는 부분이 그랬다.
미국에 왔다고 해서 그랬던 건 아닌 것 같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간 너무 여유 없이 힘들게 지내왔어서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모든 부분이 다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국에 이민을 와서 전문직인 간호사로 병원에서 근무를 하면서, 나는 내 정체성과 자유를 더 많이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내가 소망하고 꿈꾸는 일들도 하나씩 실현하고 표현할 수 있는 날을 만나기를 바라며 코로나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다시 만나 황당했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