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4명에 허덕이는 듀티
매번 한국에서의 생활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이제껏 경험한 것들이 한국에서 살아오며 보고, 듣고, 느낀 것뿐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시작으로 오늘의 글을 시작한다.
한국의 병원에서 특히 병동에서는 아무리 적은 환자를 담당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한 듀티당(하루 근무마다) 최소 12명의 환자를 보는 것이 보통이다. 병원의 규모나 병동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25명 또는 그 이상의 환자를 맡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 경우에는 간호간병통합병동에서 근무했을 때 가장 적은 12명의 환자를, 동네 작은 종합병원의 내과병동에서는 25명의 환자를 담당했다. 적다면 적은 인원이고 많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인원이다.
간호사의 업무는 단순한 업무에서부터 이론과 경험을 다 끄집어내고 계산까지 해야 하는 복잡한 업무까지 아주 다양하다. 그냥 보기엔 금세 지나가는 것 같지만 환자를 대면하는 짧은 시간 동안 매의 눈으로 보며 찾아내야 하는 정보를 모으는 멀티태스킹을 하고 있다. 당연히도 그 이유는 많은 수의 환자를 모두 챙겨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쪼개 써야 하고, 한 번에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모든 업무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환경 때문이다.
병동도 부서를 세분화해서 내과도 호흡기, 심장, 내분비 등등 나누어져 있고 한 병실에 여러 명의 환자가 있는데 결국은 이것도 적은 수의 간호사가 한 번에 돌봐야 하는 환자가 많고 정해진 시간 동안 최대한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해야 하기에 만들어진 환경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는 내 외과를 통틀어 메드 서지(Medical-Surgical) 병동이 많고, 내과와 외과를 구분하는 곳이 있기도 하다. 여러분과의 환자를 다 받기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질병을 가진 환자를 만나는 경우도 흔하고, 세미프라이빗인 2인실 또는 개인실로 이루어져 있어서 한국에 비해서는 업무의 효율은 상당히 먼 이야기이긴 하다. 게다가 환자가 먹고 마시는 것도 간호사가 파악하고 확인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한국인의 시각으로 보면 물도 갖다주고, 커피도 갖다주고, 원하는 식사가 없으면 메뉴판을 주고 키친에 요청을 하는 일 등 이게 간호사가 굳이 해야 하는 일인가 싶을 만큼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렇게 일반 병동에서는 적게는 4명에서 5명, 업무강도가 적은 경우에는 7명까지 환자를 담당하게 된다. 엄청난 차이이다.
환자들이 먹는 약에 대해서도 차이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환자들이 자신이 먹는 약의 이름 따위는 그리 관심이 없고 그저 어디에 먹는 약인지 정도만 인지하고 있으며, 약국에서 챙겨주는 약을 담당 간호사가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시간에 맞춰 몽땅(?) 환자에게 쥐어주기만 하면 약을 주는 업무는 끝난다고 본다.
약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데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들고 오는 지참약(Home Meds)은 입원을 맡은 간호사가 파악하고 확인하며 약국에 전달하거나 병동에서 보관하며 챙겨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내가 간호사인지 약사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모든 일은 전문가가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려고 각기 다른 직업군이 있는 것이다. 병원에서 환자에게 주는 약은 무조건 의사를 통해 약사와 확인을 하고 간호사에게는 정확한 용량의 약을 정확한 환자에게 시간을 맞춰 잘 챙기는 것이 임무이다. 경력이 늘어나면 환자의 상태와 상황에 따라 스케줄 되어있는 약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럴 때조차 의사에게 제안 또는 조언을 할 뿐 주는 약을 결정하는 것은 간호사에게는 한발 물러난 업무라 볼 수 있다.
다만 PRN이라고 부르는 필요시 약물은 간호사의 판단에 따라서 환자에게 지급할 수 있는데, 이것조차도 대부분의 정보가 이미 있는 상태에서 제공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임상경력이 있다면 불필요한 약을 줘서 문제사 될만한 일은 거의 없다. 예를 들면, 타이레놀을 통증을 위해 쓰기로 한 경우 통증의 수준을 0-10까지의 숫자로 정해서 이 중 1-3 수준의 통증에 주기로 한다. 그런 뒤 통증이 있다고 말하는 환자에게 통증정도를 숫자로 또는 정도로 묻고 줄 수 있으며, 마약성 진통제의 경우는 지급 한 이후에 일정시간 동안은 재지급하지 못하도록 정해진 시간간격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환자들은 대부분 아무리 많은 약을 먹어도 브랜드네임 정도는 알고 있으며 약을 주는 것조차 하나하나 확인하고 혹시 먹고 싶지 않은 약이 있으면 당당히 거부하기도 한다. 건강상태에 큰 영향을 주는 약은 환자가 거절하더라도 설득하게 되고, 그럼에도 거절하면 어떤 이유로 지급하지 않았는지 기록해 두면 문제가 없다. 이렇듯 약만 주는데도 정말 많은 시간소비가 있다. 반대로, 이런 업무환경은 환자중심적인 간호가 이루어지는 것에는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한국의 의료체계와 간호가 미국보다도 참 배려 깊다 느낄 때가 있는데, 환자가 산소치료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퇴원을 시키거나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에 배액관을 남긴 채로 집에 가는 일은 거의 없다. 경험 상 우리나라에서는 수술한 상처에 남은 실밥이나 철심 이외에는 의학적인 문제가 있을만한 기구들을 몸에 달고(?) 집에 보내는 것은 안될 일로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국에 오니 참 충격적이었다. 홀푸즈에 장 보러 간 날 내 앞에서 계산을 하던 어떤 할머니는 가방에 휴대용 산소를 넣고 산소줄을 코에 걸고 계셨고, 병원에서 일하면서도 집에서 스스로 알아서 의료기구들을 사용하고 가져오며 익숙하게 사용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오랜 지병으로 스스로 자신에게 필요한 의료기구를 능숙히 다루는 분들도 많다. 하지만 그 수와 범위가 정말 다르다. 재원기간이 병원의 수입과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큰 고비를 넘기고 안정화가 되었다면 모두가 한마음으로(?) 환자 퇴원에 대한 계획을 적극적으로 한다. 우습기도 하고 용감해 보이기도 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여러모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나라의 의료상황은 너무나도 다른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한국에서 간호하던 환자의 수보다 압도적으로 수가 적기는 해도 이곳에서는 4명의 환자를 맡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바쁘고 힘겨운 하루를 보내기가 충분하다. 특히 데이근무를 하는 간호사는 어마어마한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환자를 간호하며 숨 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나 자신을 위해 할 수 없는 미친 듯 바쁜 하루일과를 보내는 것이 익숙하다.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식사를 하는 시간 동안 환자를 보기 때문에 식사량과 약 챙기기, 배변활동, 입퇴원, 다른 직군의 병원인력들과의 플랜, 보호자와 방문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업무처리 등등 하루를 보내고 퇴근하는 길에는 멍 때리고 나 자신을 충전해야 하는 일들이 참 많이 생긴다. 아직 밤근무는 해보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밤에 일하는 것은 낮에 일하는 것과 결이 다른 바쁨이 있다. 게다가 다들 자는 시간에 깨어있어야 한다. 무엇하나 쉬운 게 없는 일이 간호사의 일상이다.
그럼에도 집으로 돌아오면 더 이상 업무에 매여있을 필요가 없고, 퇴근한 간호사에게 업무를 묻느라 전화를 하는 일은 결코 없으며, 근무시간이 길기 때문에 출근하는 날짜는 적어서 충분히 쉬는 날을 즐길 수 있다. 체력이 꽝인 나는 초반에는 쉬는 날은 며칠이 되더라도 먹고 자는 것만 최선을 다하며 지내왔는데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되었는지 점차 이곳저곳 놀러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고 있다.
이런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럼 어디서 일하는 것이 더 만족스러우냐 묻는다면 아직은 망설임 없이 미국을 선택하겠다. 가장 압도적인 차이는 급여이다. 두 곳 모두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일한 만큼의 대가가 아니다. 아무리 물가가 비싸고 생활수준이 다른 미국이라 해도 간호사로 이민을 와서 병원에서 근무를 하는 환경이라면 충분히 중산층으로 시작할 수 있다. 70-80년대 미국으로 이민 와서 어렵게 정착하고 영주권을 받아온 우리 부모님 세대에 비하면 너무나 안정적인 시작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환자들과 보호자들도 간호사에게 고마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화가 난다고 돌발하는 환자도 거의 없으며 때로는 가끔 나타나서 얼굴 비추는 의사보다도 간호사를 더욱 신뢰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나의 노동과 가치를 알아주는 곳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간호사가 있다면 미국을 비롯한 의료선진국으로의 이민이나 취업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물론 준비하는 길이 아주 어렵고 오래 걸릴 수 있겠지만 입이 닳도록 강조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인정해 줘서 우리 국민을 위해 희생하고 노력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해외로 나가지 않을 만한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나 역시 우리나라의 환경이 미국과 어느 정도 닮아있다면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40대가 넘어서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아직 발전해야 할 부분이 남아있고 또 분명 발전할 것이라 믿는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당연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미래가 오기 바라며 오늘은 그간 느낀 환자수와 업무의 차이를 공유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