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0개 국어 구사 중
미국에 오기까지 여러 가지를 준비했지만 가장 어려웠고 중요했던 건 역시 영어였다.
간호사 미국이민은 여러 가지 자격을 필요로 한다. 당연히 간호사라는 직업과 관련된 자격들도 갖춰야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영어능력이다. 이전에 발행했던 다른 글에서 영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는데 다시금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사람을 상대로 전문적인 기술을 구사하는 직업이기에, 일상회화정도의 수준으로는 업무가 어렵다는 것을 일을 하면 할수록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업무상 사용하는 영어인 의학용어가 있기는 하지만 영어라고 해서 모든 미국인이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에 전문용어를 일반적인 언어로 바꿔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일상적인 대화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때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간호대학을 다닐 때에도 의학용어나 해부학용어 등은 모두 영어를 기반으로 배우고 임상에서도 사용하지만 어떤 것들은 콩글리쉬 일 때도 있고,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용어들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미국에서는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전문가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에 어설프고 부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신뢰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만큼 그저 영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 이상으로 필요로 하는 능력요구가 많기 때문에 미국으로 올 때는 이민프로세스를 진행하고 영주권을 확보한 상태에서 미국으로 입국하는 귀한 기회를 얻게 된다. 이러한 이민과정에서 필수로 요구하는 것이 일정 수준 이상의 영어실력이다.
재탕을 하고 싶지는 않으나 여전히 미국 간호사에 관심이 있거나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정보를 드리기 위한 의미로 영어시험기준에 대해 이야기를 잠시 넣어보려 한다.
미국으로 오기 위해 간호사가 획득해야 하는 영어시험종류가 지금은 몇 가지 더 늘어나서 내가 준비했던 때와는 조금은 쉽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아이엘츠 아카데믹기준 오버롤 6.5 & 스피킹 7.0 또는 토플 오버롤 86 & 스피킹 26을 받아야 하는 것이 최저기준이다. 이제는 토익(4 영역)이나 PTE, OET 도 인정이 되기에 조금 수월해졌지만 본인이 살게 될 주에 따라서 기존의 시험만 인정하는 융통성 없는 곳도 있으므로 여전히 아이엘츠나 토플을 준비하는 케이스도 많으며 이렇게 공부하고 시험점수를 받아도 실제로 미국에 오게 되면 실감할 수 있는 것이 영어점수는 최소한의 기준일 뿐, 우리의 영어실력은 현실에서 쓰기엔 너무나 기초적인 수준이라는 것이다.
나는 아이엘츠를 공부해서 오버롤 6.5 & 스피킹 7.0을 받은 상태에서 이민수속을 시작했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뉴욕주 간호사면허를 미시간 주로 옮기면서 OET 350점(B)을 받은 상태로 미국에 입국했다. 이 점수가 의미하는 바를 아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바로 이해가 될 것이다.
미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준비하는 분들이 최소로 받아야 하는 점수가 오버롤 6.0 & 스피킹 6.5 정도이다. 그 정도면 대학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 만큼의 최소 수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점수보다도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 미국간호사의 필요조건이다. 토플 역시 쉬운 점수가 아니다. 오버롤은 그래도 어느 정도 공부를 하면 채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스피킹에서 30점 만점 중 26점을 받는 것은 정말 어려운 편에 속한다. 나 역시 토플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나마 만만한(?) 아이엘츠를 도전한 것인데 징글징글할 만큼 힘들게 공부했고 겨우 점수를 받았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내가 언어적인 부족함이 많아서 일을 따라가고 돈을 벌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이 여러 번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구구절절 무슨 시험이니 점수가 어쩌니 하는 이유는 미국이민을 준비하는 간호사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좌절하는 부분이 영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듣기와 읽기만을 중점으로 하는 영어교육을 해왔고 쓰기와 말하기는 특별한 기회가 없는 한 경험할 환경이 거의 없다. 말하기는 자꾸 해봐야지만 실력이 향상되는데 12년 동안의 학창 시절에서 영어로 대화할 기회는 정말 드물기 때문에 설사 해외 거주 경험이 있거나 영어권나라에서 태어나서 자랐음에도 한국에서는 쓰지 않으니 실력이 퇴보하기 십상이다. 이건 내가 경험해서 잘 안다. 미국에서 잠시 교환학생을 하고 돌아왔는데 그때만 해도 나의 영어말하기 실력은 많이 올라가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귀국을 하니 꾸준히 영어를 쓰는 환경이 아니었고 그 결과, 단 1년 만에 말하는 실력이 아주 시원하게 내려앉았던 경험이 있다. 다시 아이엘츠를 공부하면서 끌어올려보긴 했지만 정말 고통스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이렇게 없었던가! 게다가 시험에서 요구하는 능력이 발음, 억양, 논리성, 유창성 등등 우리말로도 논리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주제들을 쉼 없이 영어로 야무지게 말해야 하는 것은 진짜 너무너무 힘들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아이엘츠는 아카데믹과 제너럴 두 가지 모듈로 나뉘는데, 아카데믹은 유학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응시를 하고 제너럴은 이민을 가는 사람들이 선택한다. 제너럴이 좀 더 쉬운 편이지만 스피킹은 공통과목으로 응시를 하기에 어떤 모듈을 선택하든 같은 방식으로 공부를 한다.
아이엘츠 스피킹 시험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보자면 3개로 나눠진 파트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총 15분 동안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파트 1은 일상회화에 속한다. 어떤 주제에 대해 서너 가지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해 간단하게 두 세 문장으로 대답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주제는 hometown이고 질문은 너의 고향은 어디니?라는 내용이라면 "내 고향은 어디고 어떤 곳이고 나는 거기를 어떻게 생각한다"는 식의 내 생각을 말하면 된다. 하지만 이 파트에서의 함정은 간단한 질문이기에 답변을 막힘없이 술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파트에서 어.. 음.. 이런 식으로 말을 끌거나 침묵의 시간이 있다면 스피킹 점수를 5.0 이상 받기가 어렵다. 나에 대한 생각이나 기분을 묻는 내용들이라서 사실 깊게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파트 2는 어떤 주제와 그 내용에 대한 질문을 눈으로 읽고 일정시간 동안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한 뒤 2분 동안 혼자서 주제에 관해 끊임없이 말하는 분야이다. 이때 시험감독관은 듣기만 한다. 기억나는 문제로는 '가장 기억나는 선물'이라는 문제였는데 누가 준 선물인지, 어떤 선물인지, 언제 받았는지, 왜 기억나는 선물인 건지 등의 세부문항을 하나씩 설명하면서도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 시험의 가장 큰 특징이 사실을 말하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어낸 이야기더라도 질문에 해당하는 정확한 답변을 해야 하고,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야 점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감독자는 어휘나 문법, 표현에 대한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고 특히 시험 치는 사람의 영어 유창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말로도 갑자기 받은 주제에 대해 2분 동안 프레젠테이션처럼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데 그걸 심지어 영어로 하라니.. 여러모로 쉽지 않은 시험인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파트에 비하면 이것도 어렵다고 할 수는 없다. 파트 3은 질문에 대한 의견을 답하면서 근거를 대야 하는 논리적인 분야인데 일단 문제 자체가 난해하다. 아직도 기억나는 질문 중에 하나는 '어린이들의 건강한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냐, 아니면 선생님의 역할이 중요하냐'이다. 처음에 공부하며 이 주제를 받았을 때, 아이엘츠라는 시험이 참 미웠다. 논술문제를 푸는 것 같은 막막함이 있었다.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심오한 주제에 대해서 듣자마자 생각을 정리하고 영어로 말해야 한다. 아주 속이 답답해지는 파트였다.
그런데 이 시험을 꾀나 오랫동안 공부하며 배우고 깨달았던 사실은 이 시험은 나의 똑똑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실력을 증명하는 시험이다. 그 말인즉슨 내가 제대로 된 답변을 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내 생각과 상황을 얼마나 영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를 보는 시험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런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솔직히 이런 질문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어. 그렇지만 대답을 해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왜냐하면.."처럼 모르더라도 모른다는 것을 영어로 잘 표현하고 말을 이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보는 시험인 것이다.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꼭 정답을 말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지만, 점수를 받기 위해 공부를 하던 시절에는 그게 참 이해가 안 되었다. 멀리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잘 말하려고만 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말 중에서 표현할 수 있는 답변도 어렵게 돌아가고 더 낮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공부를 하고 포기할 즈음에 이르러 나는 너무나 쉽게 원하는 점수를 받게 되었다.
그런 경험들은 그냥 힘든 시간과 고난의 아픔으로만 남지는 않았다. 이 시험에서 어려움을 겪은 경험을 덕분에 아이엘츠라는 시험을 준비하고 공부하는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디에서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을 느끼는지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경험들을 통해서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이후에는 스피킹 과외 선생님이 되는 기회도 생겼다. 생각보다 성인을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았고, 이후에는 꼭 아이엘츠가 아니어도 다른 종류의 시험을 치고 미국에 올 수 있는 방법이 생겼기에 더 이상 과외 경력을 유지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경험은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그렇게 영어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나는 미국에서 잘 적응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장착하고 이민생활을 시작했는데 요즘 나에겐 '0개 국어'의 시간이 왔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한국어도 생각이 안나는 요상한 상황. 짧은 영어로는 생각나는 단어가 갑자기 우리말로는 뭔지 전혀 생각이 안나는 거다. 심지어 어려운 단어도 아니었다.
예를 들면, scale이 우리말로 뭐였더라...? 그리곤 초록창에 영어로 scale을 친다. 검색결과에 나온 '체중계'라는 한국어를 보면서 멍청함을 느낀다. 이런 식이다. 어려운 단어이거나 한국어로 표현하기 힘든 영어라면 이해라도 하겠다. 이제 겨우 여기 온 지 몇 개월 차인데 무슨 교포인양 우리말이 생각이 안 난다. 어쩌면 그만큼 내가 영어환경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여기서 영어를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이도 저도 아닌 진짜 0개 국어 구사자로 남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도 든다.
그리고 또 하나 생긴 이상한 버릇은 생각나지 않는 우리말 단어 때문에 자꾸 영어와 우리말을 섞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면서도 재수가 없다. 누가 보면 영어 엄청 잘하는 줄 알겠다 싶다.
어디선가 본 글귀가 생각난다. 자신의 언어 수준을 지키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한 가지는 한 번에 한 가지 언어로만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과 이야기를 할 때에는 최대한 우리말로만 표현하려고 한다. 생각이 안 나면 "그거 뭐였지? 이렇고 저런 그런 거 있잖아"처럼 스무고개로 설명하더라도 굳이 우리말로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이전의 나는 우리말로도 조리 있게 말하고 표현력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그런 나의 우리말실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 영어는 영어대로 잘하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노력 중이다.
분명 영어를 써야만 하는 환경에서 사는 것은 시간이 걸릴지언정 실력을 높여주기는 한다. 듣는 영어가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면 반복해서 따라 하고 배우려고 하면 언젠가는 내 것이 된다. 하지만 그만큼 내 모국어는 사용할 기회가 적어지고 때로는 두 언어가 섞이면서 어떤 언어에도 속하지 않는 외계어가 되기도 한다. 어른이 되어 외국어를 배우고 사용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기준을 가지고 접근하다 보면 비록 어려서 배운 외국어처럼 자연스럽지는 않을지언정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구사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처음 알파벳을 배운 세대이다. 이전에는 영어라는 언어를 알기는 하였으나 메모, 캘린더와 같은 외래어로 표기하고 사용하는 단어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고, 모국어와 같은 수준으로 배울 수 없는 제법 늦은 나이에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꾸준히 공부하고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가면서 지금의 나는 영어를 들으면서 머리로 해석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닌, 영어로 듣고 영어로 이해하는 수준이며 내가 하고 싶은 말 중에 정리가 필요하거나 어려운 내용인 경우에는 어느 정도 우리말에서 영어로 바꾸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시간 역시 길지 않으며,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은 어렵지 않게 바로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이다. 물론, 내가 보통사람들에 비해 청력의 민감도와 정확도가 조금은 좋은 편이고 그로 인해 언어를 듣고 모방하는 실력이 있기는 하다. 어려서는 음악을 좋아했는데 몇 번 들어봤거나 한번 들었어도 너무 마음에 드는 멜로디가 있으면 배운 적이 없는 피아노 건반을 눌러 그 음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소리에 관련된 것은 조금 자신이 있긴 하다. 예민한 성격 때문이었던 것 같지만 그 덕분에 다른 언어를 배우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누구든지 나처럼 참으로 평범한 축에 속하는 사람도 목표가 있고 의지가 있으며 노력을 한다면 못 이룰 것이 없다. 사람마다 걸리는 시간과 얻는 결과의 만족도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결국에는 포기하지 않으면 원하는 목표에 다달을 수 있다. 지금도 어디선가 지긋지긋한 영어시험에서 해방되어 미국으로, 또는 외국으로 가고자 하는 많은 분들에게 나의 경험을 나누며 파이팅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