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영화 "두 교황(The Two Popes)"을 보고
* 스포일러 주의: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친구와 눈이 마주쳤을 때,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내린다. 이 작은 몸짓을 그 친구가 이해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에는 엄청나게 큰 의미가 들어있었다. 그날은 바로, 그 친구의 생일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내내, 묵언 수행을 하다시피 말이 없던 자가 절친의 생일을 맞이하여 무려, '까딱 인사'를 건넨 것이다.
이런 재수 없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을까 싶지만, 그것이 나의 고등학교 생활이었다. 몇몇 친한 친구를 빼면, 대체로 인간관계에 신물이 나있는 상태였다. 사실 '사람'이란 것에 진저리가 난 것은 이미 그보다 더 어릴 때부터였다. 유난히 덩치가 작고, 얼굴이 하얀 편이라 '여자 같다'는 이유로 괴롭힘도 많이 당하고, 성적도 아주 낮아 자존감도 없었다. 그래도, 어릴 때는 친한 친구 위주로, 말을 많이 하는 수다쟁이였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나의 모든 약점을 학교 점수로 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높은 성적의 힘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일등에 집착하며 공부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공부 좀 꽤 한다는 정도, 그래서 인정을 받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쟤는 어떤 애야?
라고 물을 때,
쟤, 아무것도 아니야~~
라는 말만 안 나올 정도만 공부를 했다. 그러나 학년이 높아질수록 학교는 더 치열해졌다. 공부를 내 신변의 보호를 위해 '적당히' 잘하고 싶다는 어설픈 자세를 가지고는, 절대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자,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점차적으로 나에게 당장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것을 줄여갔고, 그 대표적인 게 '말'이었다.
헛소리 같지만, 말을 하루 종일 거의 안 하는 수준으로 줄였을 때 장점도 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많은 악이 세치 혀를 잘 못 놀려서 초래되는가? 거짓말로 속이고, 헛소문으로 상처를 주고, '인터넷 악플'의 사례처럼 사람을 죽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그렇다고 말을 금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 당신은 얼마나 좋은 말들만을 골라서 하는가?'
라고 당연히 반문할 것이다.
맞다. 말은 금지할 수도, 해서도 안된다.
다만, 그렇다면 '좋은 말', 다시 말해서 그냥 내뱉는 소리가 아니라, '좋은 대화'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가?
영화 "두 교황(The Two Popes)"은 265대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독일계로 본명은 존 요제프 라칭거. 이하 '라칭거'라 하겠다)와 바로 그 뒤를 이은 프란치스코 교황(아르헨티나인이며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그릴오, 이하 '베르고글리오'라 부르겠다)이 각자가 선출된 두 번의 '콘클라베'를 중심으로 어떻게 서로 반목하면서도 대화하고, 질책하면서도 서로를 알아가며, 인정하게 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사실 '두 교황'이라는 제목부터, 두 노인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잠깐 한 번 봐볼까?' 하는 생각을 가졌던 나조차도, 졸리게 하는 목소리로 대화하는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시종일관 그려질 것만 같아서, 한 손으로 화면을 꺼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초반부터 사실적이고, 화려한 시각적 묘사와 긴박감을 무기로 가지고 등장한다. 예를 들어, 라칭거, 베르고글리오를 비롯한 핏빛의 옷을 입은 수많은 추기경들이, 그와 대비되는 바티칸의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고 웅장한 건물 안에 모여, 금장식과 은 식기들이 빛을 내는 가운데, 크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그 자체로 감각적이다. 하지만, 뒤이어 고개를 돌려서는 누구에게 표를 몰아줘야 하는지를 놓고 은밀히 담합한다. 이건 또 마치, 정치 드라마를 보는 듯하고, 쉽게 '라칭거'라는 보수의 대표와 '베르고글리오'로 대표되는 개혁적인 세력이 충돌 중임을 알 수 있다. 이와 중에, 본인은 교황이 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베르고글리오와 대비되어, 라칭거는 대놓고 그에게 안부 묻기를 피하고 지나치는 모습을 보여 그에 대한 강한 경계심이 있고, 상대적으로 '교황'의 자리에 대한 야심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또, 이후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여러 번의 투표 과정을 마치 광고를 보는 것처럼 빠르고, 세련된 이미지로 그릴뿐만 아니라, 중간중간에 콘클라베의 결과를 추측하는 뉴스 리포트와 바티칸 광장에 몰린 수만 명의 모습을 끼워 넣어 생동감을 유지한다. 이러한 현실적이고, 감각적으로 세련됨을 유지하려는 노력들 덕분에 '종교 영화는 지루하다'는 편견을 깨고, 인터넷 영화로서 눈길을 주목시켜야만 하는 중요한 싸움에서 성공한다.
아무튼 이제까지는 내가 이 영화를 쉽게 꺼버리지 않았던 이유였고,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 아니다. 결국 라칭거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시간이 흘러 그는 온갖 추문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 교황을 베르고글리오가 찾아와서 추기경 자리에서 사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다.
정반대 되는 신념에 불타고 있는 두 할아버지가 단 둘이 만나 대화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더군다나, 이 둘의 사회적 지위는, 적어도 가콜릭 신자들에겐, 모두 신에 가깝다. 또, 한 사람은 성격적으로도 평생을 서적 연구에만 바친 독일계 학자이자, '난 나답게 행동하면 사람들이 싫어한다'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깐깐한 인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탱고와 축구를 즐기고, 방금 만난 정원사도 팬으로 만들 만큼 쾌활하며 많은 성도와 직접 소통하기를 선호하는 아르헨티나인이다. 주어진 조건만 놓고 보면, 둘은 상극이라고 할만하다.
아니나 다를까, 둘은 만나자마자 불꽃이 튀는 듯 대립한다. 애당초, 베르고글리오가 사임하려는 의도를 라칭거는 '교황 당신의 잘 못을 못 견디겠다는 뜻이며, 그 뜻을 사람들 앞에 표명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 그가 사임하고 싶다는 뜻을 편지를 통해 전해받고, 애써 무시하고 있던 상황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들이 논쟁하며 언급하는 주제들, 즉 동성애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 신부들의 성적인 타락과 교회의 대처, 성도들이 자꾸 가톨릭을 떠나가는 이유 등 모든 면에서 그들은 부딪힌다. 사실, 라칭거의 입장에선, 베르고글리오가 교리를 무시하고 지나치게 대중에게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런 세력이 교황이 되지 않도록 막고, 그가 평생을 연구해온 교리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 교황이 된 이유이자 사명이었던 것이다. 결국 얼마 못 가서, 교황은
당신과 나눈 이야기 중 어떤 한 부분에서도 동의할 수 없소!
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 버린다.
당연한 전개로 이야기가 끝났다면, 굳이 영화로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난 단순한 사실을 '영화'가 되게 만든 부분, 다시 말해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행동 중, 전형성을 벗어나는 가장 특별한 '행동'은 그럼에도 라칭거는 베르고글리오를 '다시 찾아온다'는 점이다. 더해서, 자기 자신의 신념과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에 대해 질문한다는 점, 권력이 더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찾아온다는 점, 대화가 안 통한다면 대화가 가능한 주제로 이야기한다는 점이 영화와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의 가장 차별화된 부분이다.
영화를 '부패한 옛 세력이 지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새 세력이 뜬다'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베르고글리오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는 라칭거의 사임과 베르고글리오의 교황 선출을 그리면서 굉장히 급하게 밝은 결말로 향한다. 결론은 마치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의 느낌마저 들어서,
'영화가 결론에서 경쾌한 음악을 배경에 깔고, 주인공들의 웃는 모습을 보이며 끝날 때는 대충 다 해피엔딩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라고 웃는 얼굴을 들이밀며 애써 동의를 구하는 것 같다. 어쩌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이후에도 여전히 가톨릭 교회가 수많은 추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현실 바탕의 두 시간짜리 상업 영화에 큰 한계로 작용한 것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다. 정작, 이 영화가 맺고 있는 희망적인 결론에는 크게 동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라칭거를 중심으로 바라본다면 이 영화는 특별한 메시지를 가진다. 영화 후반부에서 그는 종신직인 교황의 자리에서 사임할 계획임을 밝히면서, 그 이유를 '더 이상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런 그가 평소 문제의 인물로 생각하고, 건강상의 이유로 이전부터 사임을 고민했을 때도, 후임자가 누가 될지 뻔히 보여, 그의 결정을 유보시켰던, 바로 그 주인공인 베르고글리오를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들으리라고는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당신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소.
라고 말한다. 더해서
당신의 어떤 말에도 동의할 수 없지만,
모든 면에서 나와 다르기 때문에
주님께서 당신을 쓰시려는 이유를 알겠소.
라고 말한다.
라칭거는 베르고글리오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생각이 든 이후에도 확신을 얻기 위해 고민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첫 만남에서 언쟁을 벌인 이후에도, 그가 돌아가지 않게 방을 마련하고, 밥을 혼자 먹기 고집하면서도 자기와 똑같은 저녁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추기경으로 하여금 알도록 하고, 결국에는 그가 가장 사적이고 깊은 휴식을 취하는 그 자리에서 베르고글리오를 마주한다. 바로 그 일련의 행동이 라칭거가 비록 베르고글리오의 신앙관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그'라는 '사람'을 외면하고 있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그는 대화하기 이전에 행동했고 그가 행동하고 있음을 상대로 하여금 알게 했다.
그는 그 자신의 의견을 쉽게 굽힐 정도로 호락호락한 노인네가 아니었다. 다만, 그도 그러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 한계로 인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자신과 정반대 되며 심지어 잘 못되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음성을 찾을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있었다.
보통 이런 영화에서는 두 남자가 어떠한 이야기를 하며 친해졌는지가 중요하게 그려진다. 이 영화에서도 상당 시간 그 부분을 집중하고, 그중에서도 베르고글리오의 성품과 나약하고 어두운 과거들을 비추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스스로의 괴팍함을 닮아서인지 라칭거에게 좀 더 애착이 가는 나로서는 길게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아니다.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사실 이 글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영화를 보는 대신, 이것을 읽고 리포트를 쓰려는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 줄거리를 요약해준다든가 하는 목적은 시작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
쏴리!
또, 이 글에 적기에는 위의 내용이 사족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라칭거와 베르고글리오가 서로를 인정하게 되는데 중요했던 것은, 어느 한 사람이 이야기한 '단어나 문장' 아니라, 두 사람이 거듭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 서로 다른 '삶의 모양'에 대한 이해와 태도의 변화가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글쓴이가 편애하고 있는 라칭거의 변화가 두드러지는데, 영화 초반 "당신의 파일에서 읽었소"라는 대사를 자주 하며 정작 눈 앞에 있는 사람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를 더 신뢰했던 그가, 중반에서는 그의 인간적인 취미와 생각에 대해서 묻고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더니, 영화 후반에서는 당신을 인정한다는 것을 넘어 "당신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라고 변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내가 부딪히게 되는 사람들은 생길 것이다. 그리고 모든 대화가 좋게 끝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내가 꼭 대화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런데도 애써 외면해버릴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분명한 건, 그런 상대를 감별하기 위해서는 언변보다, 컨버스 몇 켤레를 더 준비하는 편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