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돌아가신 아버지께 바칩니다.
사랑한 만큼 표현해주지 못 한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동안 아버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못난 아들의 반성을 담아.
나에게 있어 아버지란, 당연한 존재였다. 여느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가족을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고, 희생하는, 그럴 의무와 책임을 부여받은 존재. 한 치의 의심 없이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버지가 말기 암 선고를 받은 것은 전역을 8개월 정도 남겨두었을 즈음이었다. 당시 나는 부대에서 인사장교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고, 평소처럼 야근을 하는 중이었다. 밀린 업무를 보며 이걸 언제 다 하나, 탄식하고 있는데 좀처럼 연락을 하지 않는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 왜?”
“통화되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때 엄마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피곤에 찌들어 있던 당시의 나로서는 아무것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응, 얘기해.”
퉁명스럽게 내가 말했다.
“휴가 내서 집에 좀 와야겠다.”
“언제?”
“내일 올 수 있겠니?”
“내일은 힘들 것 같은데. 왜?”
턱을 괴고 가늘게 뜬 눈으로 모니터 속에 밀려있는 업무들을 의미 없이 드래그 해대며 대답했다. 내일도 칼퇴하긴 글렀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오늘 검사 결과를 받았는데 간암 말기라는구나.”
며칠 전 엄마가 분명 그런 얘기를 했었다. 얼마 전에 둘이 같이 건강검진을 받았다고, 그 결과가 목요일 정도면 나올 거라고. 책상 위에 놓인 탁상달력을 보니 오늘은 21일, 목요일이었다.
“……말씀드리고 내일 가볼게.”
“그래. 조심해서 오렴.”
전화를 끊고 나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커다란 충격을 받아야만 할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다지 충격적이거나 슬프거나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생면부지의 어떤 이에게 일어난 갑작스럽고 슬픈 일을 우연히 듣게 된, 가슴이 약간 답답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충성, 인사장교입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혹시 전화통화 가능하십니까?”
가장 먼저 직속상관인 인사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어, 무슨 일이야?”
전화기 너머로 TV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내일 휴가를 좀 써야 할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내일? 왜, 무슨 일 있어?”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던 모양인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와 인사과장 말 사이사이에 숨어들어 내 귀에 꽂혔다. 당장 그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전화를 받을 수 없겠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아…, 아버지가 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다고 그래서….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내 이야기 같지가 않네, 따위의 생각을 했다.
“아이고…, 어쩌다…. 그래. 갔다 와야지. 연대장님이랑 작전 과장한테도 보고하고. 조심해서 갔다 와.”
이 역시, 내게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예, 충성.”
전화를 끊고 연대장과 작전 과장한테 차례로 전화를 걸어,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때서야 서서히, 강하고 빠르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시간을 피해 택시를 불러 지하철역으로 갔다. 집으로 가는 그 시간 동안 아빠가 어떤 모습으로 집에 있을지 그려보려 했다. 잘 그려지지 않았다. 말기 암 환자의 모습이라니, 아무리 지난 세월을 뒤져봐도 실제로 본 기억이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모습이라도 떠올려보려 했으나, 머리를 빡빡 밀고 누가 봐도 당장 죽을 것 같은 분장을 한 배우가 병원 침대에 누워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장면 외엔 떠오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말기 암 선고를 받은 다음 날, 50대 가장은 대체 어떤 모습으로 휴가 나온 아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그 아들은 대체 어떤 모습으로 아빠를 대해야 할까. 길다고 생각했던 거리가 짧게만 느껴졌다.
나 왔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집에 있을 아빠와 엄마에게 도착을 알렸다. 항상 10분이 빠른 거실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 아들. 왔어?”
거실에 누워 TV를 보던 아빠가 몸을 일으켰다.
“응. 엄마는?”
아빠의 눈을 오래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주위로 돌리며 괜히 엄마를 찾았다.
“잠깐 나갔어. 금방 올 거야. 잘 지냈어?”
평상시보다 조금 밝은 아빠의 말투.
“그냥, 뭐. 똑같지.”
그리고 평소와 같은 무미건조한 나의 대답.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방에 두고 거실로 다시 나와 아빠와 함께 왠지 모를 어색하고 낯선 침묵 속에서 TV를 쳐다봤다. 곧 엄마가 들어왔고 우리 셋은 식탁에 앉아 함께 점심을 먹었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애써 생각지 않으려는, 무언의 합의가 만들어낸 잔잔하고도 고요한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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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패딩을 입지 않고서는 나다니지 못할 정도로 날씨가 추워진, 선고를 받은 지 1년 정도가 지난 때였다. 장례식은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도시의 한 대학 병원에서 치러졌다.
“평생을 그 좁고 더러운 주방에서 일했는데, 갈 때만이라도 제일 깨끗하고 좋은 곳에서 보내줘야지.”
엄마는 장례식장 예약 전화를 끊고 나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조문객이 너무 없으면 어쩌지,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주었다. 처음에 적은 인원수를 예상하고 주문했던 음식들을 계속해서 추가해야 했고, 엄마와 우리 두 남매는 무릎이 아프도록 절을 해야 했다. 체력이 약한 누나는 쉴 틈을 주지 않고 간헐적으로 내 친구들이 계속해서 찾아오자 나중에는 원망 비슷한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기까지 했다. 하나 그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아빠의 친구가 없었다는 것이다. 예상을 훨씬 웃도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 명도.
결혼식을 보면 부모의, 장례식을 보면 자식의 덕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빠의 가까운 지인 한 명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빠 친구는 결국 한 명도 안 왔네.”
내가 읊조리듯 말했다. 아빠를 납골당에 안치하고, 친가 사람들과 마지막으로 늦은 아침식사를 한 후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내가 일부러 연락 안 했어.”
뒷좌석에서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엄마가 나직이 답했다.
“왜?”
“아빠 친구 없잖아.”
엄마의 어깨에 기대 눈을 감고 있던 누나가 주지 시켰다.
“있긴 있어. 오락실 친구.”
“아…”
엄마가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우리의 말문을 막았다.
아빠는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성인 오락실에 갔다.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쉬는 날이면 거의 매일을 예외 없이. 엄마는 아빠가 오락실에 가는 것에 넌더리를 쳤고, 당연히 우리는 누구보다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우리는 그럼에도 끊임없이 그곳을 찾는 아빠와 그럴 때마다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엄마에게 염증이 나있었다.
사실 엄마가 누나의 말에 ‘있긴 있어. 오락실 친구.’ 하고 대충 넘어가긴 했지만, 내 기억을 뒤지다 보면 —오락실과 관계없는— 아빠의 친구라는 사람들을 몇 번인가 봤던 장면이 남아있다. 당연히 엄마도 그들을 보았을 테고,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을 뿐. 엄마는 그들만이 아니라, 장사를 하면서 거래를 텄던 거래처, (우리 가게에서 일했던 종업원을 포함한) 중국집을 운영하면서 알게 된 모든 사람들에게도, 아빠의 부고를 전하지 않았다. 유독 다른 사람에게 빚지고 살아가는 것을 싫어하는 엄마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자면, 엄마는 앞으로 볼 일이 없는 그 사람들에게 빚을 지기 싫어서 그랬을 것이다. 사람들이 시간을 내서 장례식장에 와 부조금을 내는 일, 엄마에게는 그런 일이 언젠가는 그 사람들에게 다시 갚아줘야 하는 빚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니까.
장례식장을 찾아와 준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구도 아빠의 친구가 아니었음을, 아빠가 알게 된다면 무슨 표정을 짓게 될까. 못내 걱정스러운 자식들 곁에서 슬픔을 같이 해준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에 미소를 지을까, 아니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조금은 씁쓸한 표정을 지을까. 지금의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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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만 하는 일을 모두 치러내고, 할머니가 있는 양산에 내려가기 위해 영등포역을 향했다. 쌀쌀한 기운이 남아있는 3월의 어느 맑은 새벽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시계를 보니 정각 7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기차 시간까지는 20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담배 한 대 피울 시간은 충분하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땅한 장소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짙은 고동색 점퍼를 입은 아저씨 두 명이 먼저 자리를 잡고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둔 곳에 자리를 잡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며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곧 매캐한 연기가 입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그 온갖 유해한 물질로 가득한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지 못하고 입안에 머금다 토하듯이 뱉어냈다. 잡담을 나누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자취를 감추고 대신해서 의아한 눈초리가 공간을 채우는 것이 느껴졌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하얗고 얇은 막대기에 불을 붙여 빨아들인 후 투명한 공기 속에 백색의 숨을 뱉어내는 일, 아직도 이 모든 일련의 행위가 어색하고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아빠가 가는 날에 담배 하나 달라고 했는데 그걸 안 준 게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네.”
언젠가 식탁에서 엄마가 고백하듯 털어놨다.
“왜 안 줬어? 아빠가 달라고 하면 그냥 주라고 했잖아.”
순간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내뱉어버렸다.
“계속 피를 토하는 사람한테 담배를 어떻게 주니. 그래도 그렇게 갈 줄 알았으면 그냥 줄걸 그랬어. 그날은 세 번이나 달라고 그랬는데….”
그것 봐. 그럴 줄 알았어. 지금처럼 후회할까 봐 아빠가 해달라고 하는 건 다 해주자고 그렇게 여러 번 얘기했던 건데. 엄마를 책망하는 말들이 입 어귀에서 끓어올랐지만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나에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고 생각했다. 매일을, 그녀보다 더한 후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수 0.5, 아빠가 초중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죽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못 했던, 지긋지긋한 담배. 의사와 간호사가 아무리 겁을 줘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무리 만류해도, 남겨질 가족이 아무리 우려를 표해도 놓지 않았던 그 담배. 엄마와 그 일이 있고 난 뒤의 어느 날, 나는 아빠가 미처 다 피우지 못하고 간 그 담배를 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일종의 의식처럼, 강물의 흘러감처럼, 당위성을 부여받은 발걸음과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이때를 기점으로 남아있는 담배를 모두 피우기 위한 흡연이 시작됐다. 스물여섯, 담배를 시작하기엔 퍽 늦은 나이에. 술은 입에도 대지 않은 양반이 평생 동안 하루에 한두 갑씩은 빼놓지 않고 꼭 피워야 했던 이유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꺼내 입에 물지도 못하는 담배를 생의 마지막 날까지도 기어코 피우고자 했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함을 담아. 그리고 어쩌면, 엄마의 후회를 약간이나마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담아.
“아직도 쓰네….”
마지막 모금을 내뱉고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잔뜩 일그러뜨린 얼굴로 비벼 껐다. 아빠가 마저 다 피우지 못하고 남기고 간 17개비 중 9번째 담배였다.
예매했던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꺼냈다. 곧 기차가 출발했고, 몇 장 읽지도 않았는데 책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같은 열을 맴돌았다. 책을 덮어두고 잠을 청했다. 부스스 잠에서 깨고 나니 시간은 10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목적지인 물금역까지는 아직 2시간도 더 넘게 가야만 했다. 찌뿌드드한 몸을 기지개로 풀어주고,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평화만이 존재할 것 같은 시골 풍경이 조화롭게 느껴졌다.
—아빠는 초등학교 때 뭐 했어?
언젠가 한국의 70년대를 추억하는 프로그램을 함께 보다 아빠에게 지나가듯이 물었다. 아빠는 그런 나를 힐끗 보더니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특유의 말투로 답했다.
—집 나와서 신문 팔았어.
—에엥, 초등학교 때 집을 나왔다고?
믿기지 않아 의심스러운 투로 되물었다.
—그래, 인마.
—그 나이에 집 나와서 신문을 왜 팔아?
—왜 팔긴 왜 팔아, 돈 벌려고 팔았지.
—아니, 그 나이에 돈 벌어서 뭐 했는데?
—하고 싶은 거 다 했지.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하루 종일 만화방 가서 만화도 보고. 그 나이에 적은 돈은 아니었으니까.
—아빠, 담배 언제부터 피웠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소파 앞 바닥에 드러누워, 나는 소파 위에 모로 누워 같이 TV를 보고 있었다.
—담배? 중학교 때인가? 초등학교 때인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그건 왜?
—아니 그냥, 궁금해서.
내 딴에는 누나가 있을 때는 거실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아빠에게 나도 매캐한 담배 연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 줄 심산이었다.
—너 담배 피냐?
아빠가 속셈도 모르고 넘겨짚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아니, 담배는 무슨. 나 담배 냄새 싫어해.
—너 담배 피다 걸리면 가만 안 둬. 좋은 말로 할 때 피지 마라.
얼굴을 돌려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 짐짓 엄격한 투로 아빠가 말했다.
—허…, 참 나. 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태도에 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는 아랑곳 않고 확신에 찬 단호함으로 질문에 답했다.
—배워서 좋을 것 하나 없으니까.
—너보다 강해 보이는 애랑 싸울 때는 일단 머리로 코를 들이박아. 그럼 반은 먹고 시작하는 거야.
—여러 명이랑 시비가 붙었을 때는 한 놈만 조져. 한 놈만. 그럼 다시는 널 안 건드릴 거야.
—싸우겠다 싶으면 먼저 쳐야 돼. 선빵 치는 놈이 거의 다 이기게 돼 있어.
—눈빛이 중요해. 눈빛이. 네가 쫄았다고 해도 절대로 그걸 상대가 알게 하면 안 돼. 기세에서 밀리면 지는 거야.
…
…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게 분명해 보이는 확신으로, 아빠가 학창 시절의 내게 해주었던 조언들….
—중졸이지 뭐.
할머니 댁에서 집으로 가는 차 안, 최종학력을 묻는 내 질문에 아빠가 답했다. 새벽 3시에 가까운 시간, 고속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와 누나는 뒷자리에서 진작 곯아떨어져 있었다.
—고등학교는 아예 안 갔어?
내가 하품을 하며 담담하게 물었다.
—그런 셈이지.
조수석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아빠 역시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돈이 없어서?
—뭐 그런 것도 있고. 그때는 철이 없었지.
—검정고시는? 그때는 검정고시가 없었나?
—없긴 왜 없어, 있었지. 검정고시 학원도 다니고 그랬는데.
—근데 왜 중졸이야?
—시험을 안 봤으니까 중졸이지.
—시험을 왜 안 봤는데?
—노느라 그랬지, 뭐.
이 말을 끝으로 우리는 침묵을 맞이했다. 잠깐의 고요가 흐르고 아빠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또 모르지. 그때 공부를 계속했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됐을런지….
흘러가는 옛 생각에 넋 놓고 있다 보니, 기차는 어느새 도착을 앞두고 있었다. 물금역에 내릴 승객들은 미리 준비를 해달라는 방송에 책을 가방에 넣고, 주위를 한 번 살폈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자는 동안 설핏 인기척을 몇 번인가 느끼긴 했지만, 잠에서 깬 뒤론 내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았다. 오는 동안 어린아이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상황도 없었다. 운이 좋네, 기차에서 내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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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 초등학교로 가주세요.”
택시 뒷좌석에 몸을 넣으며 내가 말했다.
기사 아저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가 문을 닫고 자리를 잡자 부드럽게 출발했다. 차분하고 진중한 성격, 그가 운전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그렇게 추측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참기 힘들 정도로 고파왔다. 그때까지 먹은 거라곤 집에서 들고 나온 두유 한 팩이 전부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빨리 할머니의 밥이 먹고 싶었다. 할머니는 요리사였던 아빠보다도 음식을 잘했다.
“할머니, 나 왔어요.”
현관 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아이고—, 손주가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배고프지?”
할머니는 거실과 붙어있는 주방에서 반찬을 꺼내 식탁에 올려두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미리 전화를 한 보람이 있었다.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배고프네. 할아버지는요?”
겉옷과 가방을 소파 위로 던져 놓으며 고개를 돌려 집안을 둘러보았다.
“어, 잠깐 병원 가셨어. 어여 와서 밥 먹어. 차린 게 없어서, 뭐 먹을 것도 없다.”
의자를 빼서 앉으며 노릇하게 구워진 갈치를 비롯해 한상 가득 차려진 식탁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할머니들이란…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나는 곧 말없이 정겨운 음식들로 허기를 채웠고, 할머니는 그런 내 맞은편에 앉아 손수 갈치 가시를 하나하나 발라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먹고 있는 중에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울리더니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여어— 할아버지. 밥은? 먹었어요?”
몸을 문쪽으로 돌려 젓가락 들고 있는 손을 할아버지를 향해 흔들면서 내가 반갑게 맞이했다.
조부모 손에 자란 적이 있던 나는, 어렸을 적부터 허물없이 그들을 대했다. 나의 버릇없는 모습에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일곱의 손자 손녀 중 나를 가장 예뻐하고 아꼈다. 그런 만큼 나 역시 같은 항렬에서 가장 큰 애착과 애틋함을 가지고 그들을 대했다.
“그럼. 벌써 먹었지. 시간이 몇 신데 밥도 안 먹고 있었을까 봐?”
할아버지가 나와 할머니 사이에 있는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으며 답했다.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근데 병원은 왜 갔다 왔어요? 어디 아파요?”
“아 그럼, 이 나이에 안 아픈 곳이 어디 있어. 다 아프지.”
피식 웃음이 났다. 내 퉁명스러운 화법은 할아버지에서부터 내려온 게 확실했다. 따뜻하지 않은 할아버지의 말투와는 반대로, 살갑고 온화한 기운이 집안 가득 퍼져 할머니의 음식과 어우러지며 고향집에 왔다는 따스한 편안함이 기분 좋게 내려앉았다.
“이것 봐라.”
할머니가 내게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을 불쑥 건넸다. 분명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연속극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커다란 사진첩을 가져와서는 무릎 위에 펼쳐두고 있었다. 내가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중에 가져온 듯했다.
“응? 이게 누구예요?”
핸드폰을 옆으로 치워두고 사진을 받아 들었다. 흑백사진 속에는 표창장을 든 한 어린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라기에는 젊어 보이는 한 명의 여성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누구긴, 네 애비지.”
“엥, 아빠요? 옆에는 할머니고?”
놀란 나는 자세를 고쳐 잡아 앉고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다시 보니 앳된 얼굴에서 할머니와 아빠가 보였다.
“그럼. 초등학교 졸업식 때지, 아마.”
할머니는 1963년, 18살의 나이에 결혼을 해서 바로 그 해에 아빠를 낳았다. 사진 속 어린아이와 여성은 13살의 아버지와, 30살의 할머니였다. 불현듯 지금껏 아빠의 어린 시절 사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앳된 모습의 아빠는 그 나이였을 때의 나와 닮아있었다. 아빠를 보내고 셀 수 없이 많이 들으며 위로를 받았던, 어느 노래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외로운 어느 날 꺼내본 사진 속 아빠를 닮아있네
확실히 내 어릴 때랑 닮긴 닮았네, 라고 신기해하며 감상에 젖어 낯선 모습을 하고 있는 아빠의 어린 얼굴을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그 밑으로 품에 안고 있는 표창장이 눈에 띄었다. 내가 아는 아빠는 표창장이랑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표창장도 받았네.”
의외라는 듯이 내가 중얼거리자,
“그래도 애비가 머리는 좋아가지고 공부는 했다 하면 잘했어. 반장도 하고 그랬지.”
할머니가 어머니로서의 자부심이 묻어나는 투로 넙죽 말해주었다.
“반장을 했다고요? 언제? 초등학교 때?”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내가 재차 물었다. 반장이라니, 도통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럼. 두 번인가 세 번인가 했지, 아마? 애가 운동도 잘하고 똘똘하잖아. 또래보다 키도 크고.”
“전혀 몰랐네….”
확실히 사진 속 아이는 13살의 초등생이라고 하기에는 듬직한 풍채에 의젓함이 엿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난기 없이 가지런히 다문 입술, 그즈음의 나와는 달리 순진함이 결여된 눈빛…. 나는 아빠에 대해 생각보다 알고 있는 게 많지 않구나,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구나, 그런 늦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빠 순 망나니처럼 산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네.”
“아니긴, 걔는 완전히 이걸로 살았어. 이걸로.”
드라마를 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대뜸 꽉 쥔 주먹을 들어 올리며 내게 들이밀었다. 그리곤 진절머리를 치며 말을 이었다.
“깡패 같은 새끼들하고 돌아다니질 않나, 고등학생을 줘 패서 파출소에 가질 않나….”
“고등학생을 팼다니요?”
“그 왜, 중학교 때, 바로 옆에 고등학교가 하나 붙어있었는데, 무슨 공업 고등학굔가 뭔가. 하여간에 거기 학생을 두들겨 팬 거야. 그놈이. 그래 가지고 웬 밤에 파출소에 끌려가서는. 아휴, 내가 파출소 달려가서 빌고, 퇴학시킨다고 하는 거 또 학교 쫓아가서 빌고…, 그랬었지.”
생각하기도 싫다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문 할아버지 대신 할머니가 설명해주었다.
중학생이 고등학생을 대체 어떻게 팼다는 건지 의아했지만, 돌이켜보면 확실히 아빠는 본인보다 실력이 안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하고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겨루지 않는 성미였다. 설령 아들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어렸을 때 한창 장기에 빠져 아빠에게 한 판 두자고 게임을 청할 때면 ‘너랑 하면 재미없어’라고 딱 잘라 거절하며 상대를 해주지 않았었다. 아들과 오붓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본인보다 못해서 재미없다는 이유로 마다하는 아빠였기에 어느 정도 이해는 됐지만, 그럼에도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그거 하나면 다행이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까불고 다니면서 놀은 거야, 걔가. 순 건달 같은 애들하고 어울려 다니면서. 있는 애들 잠바 같은 거, 좋은 거 입고 오면 뺏어서 가난한 애들 나눠주고. 근데 이 웃긴 놈의 새끼가 또 지는 기껏 뺏어가지고는 입질 않아요. 참 나. 비싼 옷 사줘서 학교 보내 놨는데 웬 거지 같은 옷을 입고 돌아오면 걔들 엄마가 가만있냐? 당장 학교로 쫓아가지. 그럼 내가 또 학교로 달려가서 비는 거야. 아휴—, 그거 다 말로 못하지….”
반장 이야기를 할 때만 해도 은근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나던 할머니가 넋두리를 늘어놨다.
아버지의 부모인 할머니는 철없었던 옛이야기에 학을 뗐지만, 반대로 아들인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아빠가 느껴져서 좋았다. 아빠는 분명 —어떨 때는 아들인 나조차도 철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른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 세상의 객관적인 기준에 따르면 성공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정한 선은 결단코 넘지 않으려 애썼고, 당당하고 부끄럽지 않게 살길 바랐다. 강자에게 굴복하지 않고, 약자를 괴롭히지 않으며, 비겁하고 비굴한 모습 없이 떳떳한 자세로. 아빠의 이런 삶의 태도와 방식은 나의 가치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이는 내가 아빠에게서 받은 가장 값진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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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빠한테는 자주 가니?”
첫째 고모가 내게 물었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날 저녁, 양산에 있는 어느 돼지갈비 집이었다.
“아빠요? 한 서너 번 정도 갔다 온 것 같은데….”
아빠는 집에서 1시간 조금 넘는 거리에 있는 화성과 평택 사이의 한 추모공원에 안치되었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자주 가게 되지는 않았다. 아빠의 유골함 앞에 서서 혼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는 것이 아직까진 영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요?”
“아니…, 그냥. 자, 다 익은 것 같다. 많이 먹고 가. 어머니 아버지도 많이 드시고.”
석쇠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잘 익은 고기를 내 쪽으로 밀어주며 고모가 얼버무렸다.
첫째 고모는 강직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정이 많고 마음이 약했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지근거리에서 살며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사람도, 아빠의 소식을 듣고 난 뒤 시간이 날 때마다 집에 찾아온 사람도,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우리만큼 많은 눈물을 보인 사람도, 첫째 고모였다.
“오, 여기 맛있네요. 고모.”
앞에 놓인 고기를 한 점 집어먹고 나서 맞은편에 앉은 고모에게 눈길을 건넸다.
“그럼. 조카 맛없는 곳 데려와서 밥 먹일까 봐?”
고모는 여전히 내게 시선은 주지 않은 채, 핀잔을 주었다. 첫째 고모 역시 할아버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것이 분명했다.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면 다들 이렇게 똑같은지. 새삼 피가 진하긴 진하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친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빠를 떠오르게 하는 모습들이 조금씩 보인다. 아마 고모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화하지 못하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이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건 그렇고, 아빠가 초등학교 때 반장도 하고 그랬다는데.”
조용한 분위기 속 운을 뗐다. 고모가 서빙된 5인분의 돼지갈비 중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석쇠 위로 올리는 참이었다.
“아마 그랬었지. 그때는 공부도 잘했을 걸?”
그제서야 고모가 나를 힐끔 올려다봤다. 그러나 눈길이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무슨 표창장도 받고 그랬던데요. 안 어울리게.”
“얘는. 오빠가 사고는 많이 쳤어도 머리는 똑똑했어. 그치 엄마?"
"뭐 멍청한 편은 아니었지. 공부를 죽어라고 안 해서 그렇지."
그 맞은편, 내 옆에 앉은 할아버지가 눈을 감으며 조용히 혼자 고개를 젓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누르며 왼손을 펴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 살포시 얹고는, 그를 향해 두세 번 짧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마치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 후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 맞다. 그럼 고모 학교를 아빠랑 같이 다녔겠네요?”
고모는 아빠보다 2살 어리다.
“같이 다니긴, 퍽이나. 집에도 잘 안 들어오는 인간이 학교라고 잘 다녔겠니?”
고모가 내 말을 듣고는 가볍게 코웃음 치며 웃어 보였다.
예전에 아빠에게 들었던, 초등학생 때 집을 나와 신문을 팔았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도 들어오기 싫었을 거야. 하나 있는 방에는 동생들이 바글바글 하지, 오면 잠 잘 데나 있나. 어쩌다 하루 들어와서 눈 좀 붙일라치면 애비라는 사람이 이놈 새끼가 나가 돌아다니다가 자빠져 잘 데가 없으니까 집구석에 기어들어왔다고 욕을, 욕을 해대질 않나. 그 성격에 그걸 듣고만 있냐? 그러면 또 뛰쳐나가는 거야. 아—휴.”
식사를 하던 할머니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눈앞의 할아버지를 흘겼다.
아빠에게는 2살, 4살, 8살 터울의 여동생만 셋이 있다. 가난한 집안에 하나뿐인 방,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운 나이 어린 여동생들과 군인 출신의 살갑지 않은 아버지. 방황하기에 참 좋은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옛날에 아빠가 초등학교 때인가 집 나가서 신문 팔고 그랬다고 하긴 했었는데.”
“몰라 우리는. 걔가 나가서 어떻게 살았는지. 벌어야 뭐라도 먹고 사니까, 배고프니까 했겠지…”
물기 밴 목소리로 할머니가 말끝을 흐렸고, 정적이 그 뒤를 따라 스며들었다. 그 시간 속, 할머니는 고인 눈물을 훔치기 위해 휴지를 빼내었고, 고모는 고기 굽던 집게를 잠시 내려놓았으며, 나는 갈 곳 잃은 젓가락으로 애꿎은 허공을 헤집었다.
“지가 뭐 신문팔이를 했느니 어쨌느니 그건 지가 한 거지, 우리가 안 돌봐준 게 아니야. 솔직한 얘기로는.”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할아버지가 대뜸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감정이 격해져 있던 할머니가 평소와 달리 강하게 맞받아쳤다.
“무—슨, 안 돌봐준 게 아니기는. 당신이 애를 안아 주기를 해봤어, 아니면 한 번이라도 애들 데리고 어디 놀러를 가봤어. 하여간 입구멍은 뚫렸다고 말은….”
“뭐? 아니 그럼 내가 애들 학교를 안 보냈어, 그렇다고 집에 돈을 안 갖고 왔어? 지가 집이 없어 부모가 없어. 왜 길바닥에 나가서…”
“에이, 됐어. 아버지. 그만하셔. 어머니도 그만하시고.”
첨예하게 치닫는 분위기를 고모가 중재하고 나섰고, 나 역시 ‘아이고, 내가 괜한 말을 꺼내 가지고…’ 하며 가벼운 투로 말을 더했다. 그러나 이미 한껏 가라앉은 공기는 아랑곳 않고 무게를 더해갔다.
조금 지나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고모가 먹기 좋게 구워진 고기가 석쇠 위에 아직 몇 점 남아 있음에도 2인분만 더 먹고 일어나자며 호출 벨을 눌렀다. 배가 불러 더 못 먹는다 만류했지만, 서울 가면 못 먹으니 지금 많이 먹어두라는 고모의 애정 어린 잔소리만 들을 뿐이었다.
“그래도 고모가 학교 다닐 때 오빠 덕 많이 봤어.”
갈비를 추가로 주문하고, 고모가 처음으로 내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선 망설임 뒤에 오는 후회와 용기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듯했다.
“학교도 잘 안 나갔다면서 무슨 덕을 어떻게 봐요?”
“오빠가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거든? 사고를 하도 치고 다녀서. 근데 또 여자 애들한텐 인기가 무지하게 많았어요. 그때는 진짜 잘생겼었거든. 그래서 무서운 언니들이 내가 동생인 거 알고는 엄청 잘해줬지. 처음에는 쪽팔려서 그게 너무 싫었는데 나중 되니까 뭐, 편하고 좋더라야. 괴롭히는 애들도 없고. 덕분에 학교 하나는 진짜 편하게 다녔지.”
제가 모르는 얘기가 많네요, 라 말할까 했지만 어쩐지 쓸쓸한 뉘앙스가 담길까 싶어, 아 그래요 하고 그냥 웃어넘겼다. 슬쩍 바라보니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미동도 없이 침잠해있었다. 할머니에게서는 연민과 안타까움이, 할아버지에게선 서글픔과 속상함이 읽혔다.
추가로 주문했던 고기는 당분간 돼지고기 먹을 일은 없겠다 싶을 정도로 입에 집어넣었지만 끝내 다 먹지 못했다. 식당에서 나와 우리는 고모가 자주 가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도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할머니 친정에 맡겨졌던, 큰할아버지 댁에서 지냈던, 그리고 입대하기까지의, 모두 내가 알지 못했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녹슬고 바랜 기억의 파편들 속 아버지의 어린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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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게요, 라고 말하며 할머니 할아버지를 각각 안아주었다. 그래 조심해서 올라가라. 두 사람 모두 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길에서 아쉬움과 애정 같은 눅진한 감정이 묻어났다. 시야에서 사라져야 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어여 들어가요 추운데, 다음에 올 때도 챙겨줄 것을 짐작하면서도 아 자꾸 돈 주지 말라니까 나 돈 많아요, 하고 헤어질 때마다 건네는 안녕을 전하고 나서야 택시에 오를 수 있었다. 잠시 후 차가 출발했고, 마지막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위해 열어 놓은 창문으로 봄을 앞둔 남쪽 지방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그 바람은, 언젠가 아빠와 나누었던 대화의 한 조각을 실어 왔다.
—아들,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잘해라.
—나? 나는 이미 잘하고 있는데?
—알아 인마, 잘하고 있는 거. 그니까 앞으로도 잘하라고.
—아빠가 직접 잘하면 되잖아. 왜 잘하고 있는 나 보고 잘하래?
—내가 못 하니까 니가 더 잘하라고, 시끼야.
이때만 하더라도 ‘못 하긴 뭘 못 해, 안 하는 거겠지.’라고 단정 짓고 불만 아닌 불만을 가졌었지만, 아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고 나니 ‘어쩌면 아빠는 안 했던 게 아니라, 그 말 그대로 못 했던 걸 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연쇄 작용하듯 이런 가정으로 이어졌다. 그때 아빠가 내게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잘해라’가 아닌 ‘고맙다’였을 지도 모른다고.
그때, 아빠의 표정과 말투는 어떠했지, 그게 언제였더라, 그런 말이 오간 맥락이 있었을 텐데… 아른거리는 장면이 초점이 맞춰지며 선명해질수록 가정도 확신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래, 아빠는 분명 그때 내게 고맙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입이 아닌, 다른 것들을 통해. 아빠는 할아버지가 그러하고, 내가 그러하듯 솔직하게 말하지도 못 하면서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 철부지 심보가 가득했던 사람이니까.
다 왔다는 기사 아저씨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역전이었다. 내어드린 카드를 돌려받고 차에서 내려 시간을 확인한 후 담배 피울 만한 곳에 잠시 눈길을 주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합실로 들어섰다. 실내에 있을까 하다 어쩐지 갑갑함이 느껴져 미리 서울 방면 열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에 가서 바람이나 쐬기로 했다. 두터운 외투를 벗고 따뜻한 햇살 아래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자니 더없이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 열차가 굉음을 내며 달려오다 끼이익-, 하고 자기가 설 자리를 찾아 멈추었다. 길고 긴 시간을 충실하게 철로 위에서 보냈을, 세월이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있는 무궁화호였다. 열차는 목적지가 존재하는 사람들을 태우고는 육중한 몸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서서히, 서서히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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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도 파란만장하게 살았다. 짧은 인생 살다 갔지만…
할머니의 아린 음성이 며칠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삶 주위를 서성이며 아른거렸다. 당연한 존재였던 아버지에겐 당연하게도 아버지가 아니었던 시절이 존재했다.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 그 얘기들로 짐작해볼 뿐인 그간의 심정….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아버지의 나이에 다가감에 따라, 더욱더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란 예감이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