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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 매니저 Jun 20. 2020

중국집에 얽힌 두 가지 이야기

브런치X우리가한식


 나는 ‘짱깨’였다. 적확하게 표현하자면 ‘짱깨 아들’이 맞겠지만, 초등학생들은 이런 사소한 것은 일일이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그냥 짱깨로 불리었다. 부모님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중국집을 운영하셨고, 때문에 나는 자연스레 중국집 음식을 김치만큼이나 많이 접하며 자라왔다. 나에게 있어 중국집 음식은 집밥이자 가정식이었다. 다음의 두 이야기는 중국집 아들로서 누릴 수 있었던 것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볶음밥>

그림: 보나 박(@_bona_park)


 ‘중국집’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짜장면, 짬뽕, 혹은 탕수육을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중국집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메뉴도 이 셋 중에 하나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중국집 음식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볶음밥이 떠오른다. 아빠가 주방 안에서 치솟는 불 위로 거대한 웍에 볶아주었던 중국집식 볶음밥이.


 할머니의 손맛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아빠는,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녀야 했을 나이 때부터 여러 가게를 전전하며 일을 했고, 기술을 배웠다. 이때 익힌 기술을 가지고 엄마와 결혼을 하면서부터는 사장님이자 주방장으로서 중국집을 직접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가게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음식은 언제나 ‘볶음밥’이었다. 나와 내 친구들 그리고 단골손님들은 가게에 올 때면 언제나 볶음밥을 주문했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고슬고슬한 밥알을 숟가락으로 가득 퍼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 맛을 못 잊어 이사한 가게를 수소문해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그 맛은 과연 자타가 인정하는 맛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맛이 특별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평범하고 기본에 충실한 맛이었다. 단지 먹을 때는 ‘뭐, 괜찮네.’하고 먹다가 그릇을 내려다보면 어느새 비어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 혹은 저녁 메뉴를 고민할 때 생각이 나면서 침이 고이는 맛이었을 뿐이다. 물론 밑면이 바삭하게 튀겨진 계란 프라이, 달콤함을 더해주는 짜장 소스, 얼큰함과 개운함을 주는 짬뽕 국물과 함께 먹었을 때는 감탄사가 종종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아빠는 플레이팅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단조롭고 투박하게 했다. 동그란 흰 그릇 위로 주황, 초록색 야채와 노랗고 흰 계란이 점점이 박힌, 노릇하게 볶은 밥을 반원 형태로 만들어서 올려두고, 그 위로 계란 프라이를 하나 올린 뒤 한쪽으로 짜장 소스를 한 국자 떠서 부은 게 전부였다. 아마 맛집 블로거가 우리 가게에서 볶음밥을 먹고 본인의 블로그에 글을 쓴다면, ‘보기에는 이렇게 보여도 맛은…’이라고 쓰지 않을까 싶은, 그런 모양이었다.


 언젠가 가게에서 볶음밥을 먹으며 아빠에게 지나가듯이 그 맛의 비법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아빠,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맛있지?”

 “센 불에 볶아서 그렇지, 뭐.” 아빠가 덤덤하게 답했다.

 “이거 어떻게 만들어?” 우물우물 맛을 음미하며 내가 다시 물었다.

 “별 거 없어, 돼지비계로 기름 낸 다음 계란 하나 풀어서 익었다 싶으면 야채 넣고 밥 넣고 볶으면 끝이야. 볶음밥은 이것저것 많이 들어가면 오히려 맛없어.”

 “돼지비계?”

 “그걸로 기름을 내야 맛이 고소해. 비법이라면 그게 비법이지.”

 그 뒤로 아빠가 말해준 방법대로 집에서 몇 번 볶음밥을 만들어봤으나 가게에서 먹던 그 맛을 재현할 순 없었다. 얼마 후 다시 볶음밥을 먹으러 가게에 들렀을 때, 아빠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아빠, 저번에 말해준 대로 만들어 봤는데 이 맛이 안 나던데?”

 “뭐가?”

 “이거 말이야, 볶음밥. 아빠가 말한 그대로 만들었는데 이 맛이 안 나.” 내가 숟가락으로 먹고 있던 볶음밥을 가리켰다.

 “그럼 그냥 가게 와서 먹어.” 아빠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아빠를 한 번 바라보고, 볶음밥을 한 번 내려다보고, 잠깐 생각에 잠긴 뒤에 ‘별 수 없지, 그냥 가게에서 먹어야겠다.’라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나는 이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백 번도 넘게 먹었던 그 볶음밥을 먹을 수가 없다. 부모님이 더 이상 중국집을 운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빠는 해가 지날수록 일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환기시킬 창 하나 없는 좁은 주방에서 하루 온종일 무쇠로 된 커다란 웍을 가지고 불 앞에서 요리를 하는 일, 그 누구라도 힘들어할 일이지만 자신의 건강을 전혀 돌보지 않고 살아온 50대 중년 남성에게는 특히 더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반평생을 넘는 세월 동안 해왔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아빠는 가게를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시기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두 자식 모두 대학교까지 졸업시켜 놓았으니 앞으로 크게 돈 들어갈 일은 없었다. 

 “아들 전역하면 가게 처분하고 일 좀 쉬자.” 내가 휴가 나온 어느 날 아빠가 가족을 한 데 불러 모아 놓고 얘기했다. 나와 누나, 그리고 엄마가 아빠의 말에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이제는 부모님이 그들 자신의 인생을 향유할 차례였다.


 그러나 아빠의 소망은 그보다 좀 더 일찍 이루어지게 되었다. 전역이 8개월 정도 남았을 때, 아빠가 말기 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내가 태어나서 가장 즐겨 먹은 메뉴이자 좋아했던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

 .

 . 


 나는 아직 아빠가 만들어주었던 것에 견줄 볶음밥을 먹어 보지도, 만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 맛이 너무 그리워 중국집에서 식사를 할 때면 항상 볶음밥을 주문하고, 요리를 할 때 자주 볶음밥을 만들어 먹는데도 말이다. 같은 중국집 요리사가 한 음식인데도, 같은 레시피를 가지고 만든 음식인데도 맛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언젠가 아빠를 만나게 된다면 꼭 다시 한번 더 그 맛의 비법에 대해 물어볼 것이다.



<졸업식>

그림: 보나 박(@_bona_park)      


 시린 바람이 불어오는 2월이면 어김없이 그날이 찾아온다. 그간 정들었던 일상, 공간, 사람들과 작별하고 새로운 하루와 장소, 그리고 친구들을 맞이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그날이. 떠나는 아쉬움과 내딛는 설렘이 나란히 차오르는 그날엔, 그곳을 떠나는 이들이 익숙한 공간을 배경으로 함께했던 사람들과 지내왔던 일상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남기곤 한다. 그리고는 가까운 미래 혹은 먼 훗날에, 당시의 여러 사건들을 환기시키는 그 사진들로 아련한 추억에 잠길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학창 시절을 떠올릴 그날의 사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식이 모두 끝난 후, 나와 같은 이들이 그들의 부모님과 꽃다발을 든 채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하면, 슬며시 그곳을 빠져나오기 바빴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 꼭 집어 표현할 수는 없지만(아마도 치기 어린 자존심과 부끄러움, 외로움 같은 감정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왠지 모르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졸업시즌이 시작되면 밀려드는 손님 덕에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고, 일이 모두 끝난 늦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올 때면 녹초가 되어 있기 일쑤였다. 그런 날들 중 어느 날, 나는 지쳐 돌아온 엄마에게 며칠 뒤에 있을 졸업식에 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졸업을 앞둔 13살의 어린 나이였다. 엄마는 피곤한 목소리로 ‘꼭 가야 하니?’라고 내게 되물었고, 나는 ‘꼭 올 필요는 없어.’라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 답했다. 그 뒤로 3번의 졸업식이 더 있었지만, 나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부모님에게 꺼내지 않았다.


 더 이상 졸업할 일이 남아있지 않은 지금에 와서 그때를 생각해보면, 여러 후회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왜 나는 어린아이답게 좀 더 칭얼거리며 매달리지 않았을까, 사진이라도 찍게 가게를 잠시 비우고 30분만이라도 들렸다가 가라고 강력하게 말하지 않았을까.


 사진이 있었다면, 그때 찍어두었던 사진이라도 있었다면, 그때의 나와 부모님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떠올릴 수 있었을 텐데. 지금보다는 더 많은 장면들을 추억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사진 속에 담긴 것들을 통해 좀 더 진한 기억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시린 바람이 불어오는 2월, 환한 얼굴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중국집을 향하는 학생들을 보면 나는 부러움과 아쉬움, 그리고 흐릿한 그리움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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