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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 매니저 May 25. 2021

술과 밤 그리고 좋은 친구

 오랜만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제나처럼 대뜸, "야 우리 집으로 와."라고 친구는 말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고민이 됐다. 친구도 느꼈는지 말을 덧붙였다.

 "저번에 말한 이쁜 애도 있어."

 반사적으로 뭐 사갈까?, 하고 대답해버렸다. 오래된 친구는 서로를 다룰 줄 안다. 친구는 니가 그럼 그렇지 혀를 차더니 “맥주나 좀 사 와.”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늦은 시간에 다짜고짜 나를 불러내는 이 친구와는 벌써 10년이 넘은 오래된 사이다. 달려 있지도 않으면서 항상 “내 불알친구야.”라며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하고, 나보다 더 잘났고 훨씬 더 잘 살고 있음에도 항상 마음이 쓰이는, 그런 친구. 가끔은 정말 –족 같은, 가-족 같은 친구(실은 나보다 1살이 더 많다.).


 맥주와 어제 만들고 남은 파스타를 손에 들고 문 앞에서 친구의 이름을 부르자 곧 문이 열렸다. 집 안에는 친구와 친구가 말한 그녀(역시 나보다 한 살이 더 많다.)와 친구의 어머니가 식탁 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나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맞아주시는 어머니보다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눈이 먼저 갔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저도 일단은 남자인지라. 장난으로 서운함을 표시하는 어머니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자리에 앉아 분위기를 살피는데 어째 왠지 모를 어색함이 감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좀 무거운 얘기 나누던 중이라. 얘가 며칠 전에 헤어졌거든.”

 언제나처럼 나를 불알친구라고 그녀에게 소개한 뒤, 친구가 나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친구 옆에 앉은 그녀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확실히, 다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니 눈가가 좀 촉촉해 보였다. 아하, 까지만 소리 내어 말하곤, 슬픈 얼굴로 이렇게 이뻐도 되는 건가 싶은 작은 궁금증(?)은 마음속에 넣어두고 굳이 꺼내지 않았다.


 새로운 주제(나)와 그리 무겁지 않은 이야기로 우리는 분위기를 풀어나갔다. 잔잔하면서도 부드러운, 애정이 묻은 미소를 자아내는 대화들. 시간이 11시가 넘어가자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시고, 우리 셋은 친구의 방에서 술을 좀 더 마시기로 했다. 밤이 짙어가듯 우리의 대화도 짙어가고, 술이 술을 부르듯, 속 이야기는 더 깊은 속 이야기들을 불러냈다. 술과 밤, 그리고 좋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마법이었다.

 우리는 상실과 후회에 대해 이야기했고, 상처와 슬픔을 공유하고 나눴다. 평소라면 절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았을 친구와 일면식도 없는 친구의 친구, 그리고 맥주 두 캔에 불콰해진 얼굴을 한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농담을 주고받고, 꼭꼭 숨겨두었던 눈물과 흉터를 서로에게 내비쳤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카타르시스였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 친구 집을 나섰을 땐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거리는 조용했고, 새벽 공기는 상쾌했다. 한껏 들이마신 공기와 함께 기분 좋은 충만함이 가득 차올랐다. 아-, 나는 정말 이 순간을 좋아한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를 읽었을 때처럼, 어바웃 타임을 봤을 때처럼, 오센의 오꼬노미야끼를 먹었을 때처럼, 진한 여운이 피어올라 나를 가득 채우는 이 순간을. 무미건조한 삶 속에 이런 봄비 같은 순간들이 존재하기에 나는 살아갈 수 있다.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맞이하게 될지 모를 이 순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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