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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준 Oct 22. 2021

발길 닿은 곳이 목적지

울업산 백패킹

차트 밖 소소한 산의 매력을 즐기기 위해 울업산으로 향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야트막한 산으로 들이는 노력 대비 터지는 경치가 일품인 산이다. 그날도 늑장을 부리다 늦게 출발했다. 그래도 고도가 높지 않은 산이라 해지기 전에는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호수를 끼고 도는 둘레길을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능선에 올라탈 수 있었다.

 

반대편에서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줄지어 걸어왔다. 길이 좁아 잠시 멈춰서 비켜 있는데, 내 커다란 배낭을 보며 한다는 이야기가 정상에는 이미 텐트가 세 동이나 자리를 잡아서 더 이상 텐트 칠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애써 올라왔는데 텐트 칠 곳이 없다니. 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무리의 마지막 사람이 말했다. 정상 도착하기 전에 데크가 하나 있는데 텐트 한 동 정도는 칠 만한 공간이 나온다고.

 

걸음을 재촉했다. 처음의 느긋함과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머릿속은 온통 그 자리를 누구보다 먼저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주변 경치고 뭐고 느낄 틈이 없었다. 거의 뛰다시피 해서 데크로 향했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시작했던 산행은 어느새 먼저 데크를 차지하기 위한 레이스로 바뀌어 있었다.

 

다행히 데크는 비어 있었고 텐트를 칠 수 있었다. 자리 선점이라는 급한 불을 끄고나니 그제서야 지나온 길이 아쉬웠다. 배낭을 매고 능선을 타고 걷는 적당히 숨가쁘고 기분 좋은 그때의 기쁨을 놓쳐버렸다. 

 

목표점을 하나 정하고 달리며 주변 풍경을 다 놓치는 그런 삶에 지쳐서, 애써 시간을 내어 찾았던 곳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악셀을 너무 세게 밟았다. 배낭 하나 짊어지고 산이라는 과속방지턱과 물길이라는 우회로를 따라 걸으며 애써 속도를 늦추자던 그 다짐이 오늘 발 뻗고 누울 자리 하나를 남보다 빨리 선점하겠다는 생각 하나에 전부 무너져 내렸다.

 

텐트를 설치하고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등산의 목적지가 꼭 정상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딱히 정해진 목표지점 없이 가는 만큼만 가고 되는대로 살아가는 건 어떨까. 발길 닿은 곳이 목적지였다 생각하고 그냥 좀 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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