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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캐리 Aug 17. 2023

미생이기도, 완생이기도.

내가 만족하면 됐지, 뭐.

아빠가 아픈 후로 우리 가족은 건강에 대해 깊은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특히나 엄마는 나와 오빠의 건강을 걱정하며 좋은 음식을 먹고 주기적으로 운동할 것을 강조했다. 나도 작년에 건강검진을 한 후로 적잖이 충격을 받아 진짜 몸관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인생이 그렇듯 모든 것이 쉽지는 않았다. 








뭐든 마음먹고 해보려 하면 체력이 문제 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피곤해도 금방 어깨가 뭉쳐 담이 걸렸고, 일을 마치고 이제야 내 작품을 좀 쓰려고 하면 잠이 쏟아지는 게 루틴이었다.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의욕이 안 생기고 겨울에는 너무 건조해서 콧속이 다 말라 피 맛이 느껴져 또 불편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는, 그저 나약한 인간일 뿐이로구나.


SNS를 보면 새벽에 일어나서 영어 학원을 다니고 퇴근하고 나면 운동까지 한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던데, 그런 분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신 건가요? 온 세상이 나를 기만하는 듯한 이 기분... 나만 그런 거 아니죠?








드라마 <미생>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tvN/극본 정윤정  연출 김원석/ 임시완, 이성민, 강소라, 강하늘, 김대명, 변요한 등 주연)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먼저 체력을 길러라. 네가 종종 후반부에 무너지는 이유, 대미지를 입은 후에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 후 복구가 더딘 이유, 다 체력의 한계 때문이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리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네 고민을 충분히 견뎌줄 몸을 만들어. 정신력은 체력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 돼."


워낙 유명한 대사라 많은 사람이 이미 가슴속에 새기고 있는 말일 것이다. 이 드라마는 매 회차마다 명대사가 쏟아져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다. 먹고살기 힘든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지, 현생을 살고 있는 모든 미생들이 이 드라마를 보며 공감하면서도, 너무 현실적이라 가슴이 찢기는 것 같다며 일부러 외면하기도 했었다. 


나도 저 대사를 마음에 새기며 다이어트와 운동을 시작했다. 날씬해지는 건 진작에 포기했고, 건강한 뚱뚱이라도 되자는 마음이었다. 샐러드 같은 걸 먹어가며 그래도 건강한 식단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 노력이 오래가지는 못하고 매번 같은 다짐들이 반복됐지만 상관없었다. 뭐든,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어느 날, 멍하니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마을버스는 목적지까지 굽이굽이 돌아가고, 어르신들이 많이 타기 때문에 어차피 앉아서 가는 것도 불가능이라 웬만해서는 타지 않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마을버스를 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작은 정류장에는 할머니 몇 분이 앉아 계셨다.


"뭐 배우고 오시나 봐요? 머리가 예쁘네요."


배낭을 멘 할머니가 물었다. 

나는 살짝 주위를 둘러봤다. 정류장 바로 뒤편에 노인복지회관이 있었다. 어르신들이 무언가를 배우고 만드는 프로그램이 있는 모양이었다. 

백발의 할머니가 대답했다. 


"팔십이 넘으니까요, 사는 게 허무하고 한숨 나고 서글퍼요. 눈도 침침, 귀도 어둑하고... 그래도 힘을 내자 싶어서 나이가 필요 있나 뭐라도 배우자 싶어서... 어디 써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이겨내야 되니까. 일부러 화장도 하고 누가 봐주냐 생각하지 말고... 추레하기 싫어서요. 옷도 깨끗하게 입고, 파마도 하고..."


백발의 할머니는 실제로 날씬한 몸에 곱게 파우더를 칠한 얼굴이었다. 배낭을 멘 할머니가 칭찬한 대로 머리도 깔끔히 드라이가 된 모습이었다. 나는 그 할머니가 예뻐 보이기도 하고,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팔십이 넘어도 완성되지 못하고 날마다 허무함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는 게 인생이라니. 인간이라는 존재는 왜 태어나서 이토록 오랫 동안 고통스러운 거냐고.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위로가 되기도 했다. 어차피 나이 들어도 답이 없는 게 인생인데 뭐, 얼마나 잘 살겠다고 고민하고, 스트레스받고... 어우, 지겹다. 지겨워. 그냥 대충살까 봐.







결국 따지고 보면 모두가 미생이다. 동네 할머니들도, 나 같은 지망생도, 매일같이 공부하러 스터디카페에 출근하는 학생들도 모두 미생이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완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생은 어차피 자기만족이 아닐까. 


누가 봐줘서가 아니라 스스로 힘을 내려고 무언가를 배우고 립스틱을 바르는 할머니처럼, 누군가의 시선보다는 나의 삶을 위해서 뭔가를 하는 게 중요한 거였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은 미생이기도 하고 완생이기도 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 기준에 이 정도면 꽤 열심히 살고 있는 걸 수도. 이거보다 열심히 살면 죽어... 코피 쏟고 죽는다고... 일찍 죽을 수는 없지. 내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엄마는 항상 내가 바쁘다고 하면, '세상을 구한다고 욕본다.'라고 말하곤 했다. 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내 인생을 구하고 있었으므로 충분히 바빴고, 이 정도면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러니 바보같은 생각은 버리자.


"잊지 말자. 나는 어머니의 자부심이다."


드라마 <미생>의 명대사처럼, 잊지 말자. 나는 우리 엄마의 자랑거리라는 것을. 나는 언제나 가치 있음을.











(사진의 출처는 드라마 <미생>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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