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웹소설 두 편을 출간하기는 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고, 쓸 당시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쓰기는 했어도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은 내가 뭔가를 열심히 쓰기는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니 결국 뭐든 글로 남기는 수밖에는 없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쯤에 내가 어떤 작품을 썼던 작가였는지 기억나게 해 준 작품이 바로 <카이로스>이다.
나의 두 번째 웹소설은 2년이라는 시간 차를 두고 소통하는 남녀의 이야기였다. 지금이야 흠이 많이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진짜 말도 안 되는 걸작을 만들어 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진짜 천재인 줄 알았다구요. 두 남녀가 하나의 휴대폰으로 연결되어 통화를 하며 사랑을 키워나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나름대로는 미스터리까지 섞어서 만들었었는데, 물론 내 작품을 본 사람은 몇 명 없다고 해도 개인적으로는 아주 만족하는 편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면에서 <카이로스>와 비슷한 점이 많아서 이 드라마를 처음 봤을 때 적잖이 놀라기도 했다. 주인공들이 복권 번호를 주고받는다든지, 과거의 사람이 미래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 회사로 찾아간다든지 하는 설정들이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드라마가 내 이야기를 베꼈다는 게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나혼자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드라마 후반부로 갈수록 나 같이 수박 겉 핥기 식으로 글을 쓰는 작가는 범접할 수 없는 퀄리티의 내용이 었기에 그저 부러운 마음 뿐이었다.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 항상 나보다 더 잘 쓰는 사람은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설정이 비슷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타임워프의 특성상 아주 드라마틱하게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런 작가님이 계시다면, 제가 많이 존경한다. 몇 년 전 겨울에 들었던 시나리오 수업의 선생님은 어차피 사람이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하니 무조건 빨리 완성시켜서 내뱉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작품이 나오고 나서야 '아, 나도 저런 거 생각했었는데.'라는 생각은 세상 마상 제일 쓸데없는 생각이다. 그리고 매우 안타까운 사실은 내가 생각한 것 유사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그 작품들은 항상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밌다.
체계적이고 개연성 있는 탄탄한 스토리의 결과는 '재미'이다. 궁극적으로 드라마를 보는 이유가 바로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가 아닐까. 재미없는 드라마, 재미없는 영화는 생각만 해도 싫다.
<카이로스>는 한 달 차이나는 두 개의 시간대가 잘 맞물려 돌아가며 진행된다. 주인공 애리(이세영 분)가 한 달 뒤에 살고 있는 서진(신성록 분)의 힌트를 받아 사건을 바꾸면 즉시 서진은 다른 결과를 마주치는데, 그때마다 시청자로서의 쾌감이 상당하다. 이 드라마도 물론 다른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두 명의 주인공이 엄마도 무사히 찾아 살리고, 딸도 되찾아 올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게 안 될 거라면 두 사람이 전화를 하게 되는 이유가 없다. 또한 다른 사람도 아니고 꼭 이 두 사람이 통화를 하게 된 큰 사건도 결국엔 밝혀지게 될 것이다.
타임워프에서는 시간을 초월해 소통하는 두 사람이 랜덤으로 선정되지 않는다. 반드시 두 사람이 연결된 이유가 있고, 있어야만 한다.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사건으로 인해 주인공들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것이다. 드라마에서 뿐만이 아니다. 타임워프 형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작품이 그렇다. 영화 <동감>도 마찬가지이다. 두 남녀 주인공이 아주 요상하고 아이러니한 관계인데 이것이 밝혀지면서 관객은 과연 어떤 결말이 나올까 생각하게 된다. 드라마 <신의 선물-14일>도 다들 그대로 인데 남녀 두 주인공14일 전으로 돌아와 다시 유괴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도 반드시 딱 두 사람만 14일 전으로 돌아온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런 종류의 드라마가 결국에는 주인공들이 원하는 대로 현재를 바꾸는 뻔한 결말을 가졌다고 해도, 진행되는 사건이 뻔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전체를 관통하는 이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어떤 식으로 복잡하게 꼬여있는 관계를 정리할 것 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즉, 원하는 결말로 가기 위한 사건의 배열이 바로 플롯이다. 어쩌면 뻔해 보이는 결말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플롯의 힘이다. 결국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플롯이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이더라도 그 결말을 향해 어떻게 달려가느냐 하는 문제이고, 그것은 다른 어떤 이도 건드릴 수 없는 작가만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타임워프 장르에서는 유독 작가의 능력이 요구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여행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에 신의 뜻이라고 하는 게 아닐까. 드라마 <신의 선물 -14일>의 제목도 그렇고, '카이로스' 역시 기회나 특별한 시간을 뜻하기도 하지만 기회의 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나의 과거가 그리 아름답지 않기에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도대체 왜 고등학교 시절의 나, 20살의 나는 그리 아름답지 않았던 건지 의문이다. 왜 그런 꼬라지로 돌아다녔는데 아무도 말을 안 해줬냐고, 대체. 그래도 딱히 지금의 내가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건 아니기에 다시 20살이 되고 싶지는 않다. 솔직히 말하면 고등학생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더 열심히 공부를 하지는 않을 것 같고, 그렇다고 소심한 성격에 더 많이 놀지도 못할 것 같다. 나란 인간은 참, 왜 이럴까.
하지만 과거의 나에게 한 번쯤은 더 기회를 줘보고 싶기는 하다. 진짜 신이 있다면, 신이 좀 찌질하게 살고 있는 나를 안타깝게 여겨 한 번의 기회를 준다면 스무 살의 나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우선,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해라.
어차피 학창 시절로 돌아가도 공부는 안 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내가 공부한다고 해서 서울대를 갈 만한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흥미 있는 일이나 꾸준히 파고들길. 그럼 지금쯤 뭐라도 되어 있지 않을까. 농구에 꽂혀 있었던 그때, 더 파고들었다면 지금 쯤 농구 전문 유튜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역사 과목을 좋아했다면 거기에 인터넷 소설 감성을 보태 유래 없는 하이틴 역사 로맨스 소설을 썼을 지도. 10여 년 전과 지금은 또 달라서 뭐든 하나만 잘 파고들면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을 테니.
그리고, 먹을 땐 먹더라도 꾸준히 운동해라.
서른이 되니 체력이 엉망진창이란다. 술 좀 그만 먹고, 그래 그건 불가능하겠지만, 어차피 건장한 체격을 가질 거라면 건강하기라도 해야지. 언제까지 네가 새벽 5시까지 술 먹고도 다음날 멀쩡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체력이 있어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단다, 얘야.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마라.
'어차피'라는 말을 많이 쓰게 되는데, 진짜 어차피 시간 지나 보니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더라. 무슨 일을 하든 다 먹고 산다고 스트레스받고, 돈을 벌어도 돈은 늘 없고, 일보다 더 짜증 나는 건 사람이더라.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 그렇더라고. 뭐 어쩌겠니, 그게 인생인 것 같은데. 그러니 나 자신이 못나 보일 때, 굳이 특별히 나보다 잘난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을 보며 질투를 하거나 의기소침해할 필요가 없다. 그 사람도 결국에는 나랑 같은 고민을 하고 나랑 같은 TV 드라마 보며 울고 웃을 테니까. 반대로 왜 저러고 사나 싶은 사람을 무시하거나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다. 그 사람도 이 나이 되니 어떻게든 자기 밥벌이는 하며 살던 걸. 결국,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나의 하루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더라.
언제나 다음 회차가 기다려지는 드라마를 만나면 굉장히 설레는 기분이 든다. 드라마 <카이로스>가 내게는 그런 드라마이다. 다음 회를 안 볼 수 없게 만드는 엔딩 장면을 보여주며 엔딩 맛집이라고도 불리던 드라마였다. 스토리가 중반부를 지났을 때 나는 매 회차가 끝날 때마다 소름이 돋았었다. 1회만 엔딩이 좋은 줄 알았더니 매회가 그랬다. 리스펙. 나도 언젠가는 그런 드라마를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하루를 보낸다. 늘 그랬던 처럼, 언젠가는 되겠지, 하는 생각.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반대로 조금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10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시간여행이라는 신의 선물은 딱히 필요가 없어 보인다. 내가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모든 말들은 지금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묵묵히 나의 길에 최선을 다하는 것, 잘 먹고 잘 쉬며 잘 놀 수 있는 체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언제나 몰라서 못 한 건 아니었다. 게을러서 안 한 거지. 자기 개발서 한 권만 제대로 읽어도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실천이 안 되어서 문제였던 건데(특히나 나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고), 실천이야 이제부터라도 하면 되겠지. 일단,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좋아하는 글쓰기나 좀 많이 하려고 노력해볼게요. 뭐 어떻게든 되겠죠, 뭐. 늘 그랬던 것처럼.
(모든 사진의 출처는 해당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