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언제가 되었든 딱 한 번만이라도 옛날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보통 현실이 막막할 때 하는 상상이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순간은 2018년 3월쯤이었다. 스케줄 근무를 버틸 수 없었던 아니, 버티기 싫었던 저질 체력과 발전이 없는 일상을 반복하는 권태로움을 이기지 못해 얼마 다니지도 않았던 직장을 막 그만둔 무렵이었다. 재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여유가 넘쳤던 때라 얼굴 핀다는 소리를 매일 듣곤 했다. 일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지루한 일상이 반복된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제 지긋지긋한 일도 때려치웠으니 내가 원하는 만큼 글 쓰고 생각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직업이 지망생이라고 해도 웬만한 의지가 있지 않은 이상 글을 미친듯이 쓰지는 않더이다.
그 무렵 내 친구 애기와 썽은 일본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하고 있었다. 바다 건너에서 파트타임으로 3개의 알바를 하고 있는 20대 중반 여성의 유일한 취미이자 스트레스 해소법은 고국의 드라마 명작들을 정주행 하는 것이었는데, 그때 썽이 정주행 하던 드라마가 바로 그 이름도 찬란한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이었다.
(MBC/극본 이선미 장현주 연출 이윤정/공유, 윤은혜, 이선균, 채정안 주연)
무려 2007년에 방영된 이 드라마는 13년 동안 내 동년배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아 매년 여름이면 또 등장하고, 등장하고, 등장했다... 커피 좀비... 프린스 좀비... 늙지도 않는 공유도 좀비.
나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인생 드라마는 대체 무엇이요, 라는 질문을 하는데 신기하게도 대부분 비슷한 드라마를 이야기한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든지, <동백꽃 필 무렵>이라든지,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든지, <별에서 온 그대>라든지, <도깨비>라든지. 3명 이상이 모인 자리에서 이 다섯 개의 드라마 중 하나가 나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모두 자신만의 취향이 있는데도 입 밖으로 나오는 작품은 몇 개 없는 걸 보니 잘 만든 드라마는 역시 모두에게 통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 애기, 그리고 잉어(별명입니다, 별명)와 가졌던 맥주 타임에서도 나는 그들에게 각자의 인생 드라마를 물었고 애기의 입에서는 망설이지도 않고 커피 프린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앞서 언급한 드라마와 같이 <커피 프린스 1호점> 역시 그런 드라마였다. 내가 굳이 인생 드라마라 꼽지 않아도 옆 사람이 이 드라마를 이야기하면 절대 반박할 수 없는 그런 드라마. 20대 중 후반에서 30대 초 중반까지의 여성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드라마. 13년이나 지난 지금, 그 드라마를 추억하는 다큐멘터리가 2부작이나 방영된 걸 보면 정말 모두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13년 동안, 그리고 그 전에도 수많은 드라마가 쏟아져 나왔는데, 이 드라마가 유독 사랑을 많이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재밌어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 말고, 세월이 많이 지나도 계속 기억될 수밖에 없는 드라마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캐릭터 중심의 시나리오와 플롯 중심의 시나리오라는 것이 있다(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배웠답니다). 물론 시나리오라는 말 자체는 영화에서 쓰는 말이지만, 드라마도 마찬가지이다.
플롯이 중심이 된다는 말은 외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극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뭐, 예를 들자면, 납치당한 아이를 과연 구할 수 있을 것 인가, 국가 재난 상황에서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들이다.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주인공 내면의 갈등을 주로 그려낸다는 것이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이라든지, 친구와 애인 중 한 명만으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선택으로 인한 결과로 만들어지는 상황들 같은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플롯 중심과 캐릭터 중심을 완벽하게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찌되었 건 주인공은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내적이든 외적이든 갈등을 겪어야만 한다. 그래야 이야기가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가진 특유의 성향이라든지 과거의 경험 등으로 인해 어떤 결심과 선택을 하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사건의 계기가 되는 방식으로 스토리라는 것이 전개되며 그 과정에서 시청자는 캐릭터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재미와 감동, 분노와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플롯과 캐릭터가 기가 막히게 맞물려 돌아가면서 시청자의 정신을 빼놓는 작품이 바로 우리의 인생 드라마, 인생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엄밀히 따지자면 캐릭터 중심의 이야기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플롯이 아예 무시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인생 드라마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한결(공유 분)과 은찬(윤은혜 분), 두 사람이 만나게 되고, 은찬이 남자인 줄 알았던 한결은 그를 카페에 취직시켜 주고, 그 와중에 한결은 자꾸 은찬이가 자꾸 눈에 아른거리고, 그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는 모든 과정들이 애틋하면서도 귀엽게 그려지고 있다. 특히나 남자인 은찬을 보며 설레는 자신의 마음이 혼란스러운 한결의 감정이 아주 섬세하게 묘사되어 여성 시청자들을 쥐고 흔들었다. 한결이 자신의 감정을 계속 부정하다가 결국에는 인정하게 되는 그 과정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드라마틱함의 정점을 찍었다.
"네가 남자건, 외계인이건 상관 안 해. 갈 때 까지 한 번 가보자."
이 대사는 지금까지도 드라마를 대표하는 대사이고, 그 장면에 몰입한 배우가 보여주는 표정은 절대 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어떤 것이 중심이 되든 간에, 드라마에서는 등장인물 간의 감정교류가 잘 드러나야만 한다. 남녀 간의 애정과 가족 간의 정이 중요시되는 한국 드라마의 특성상 더욱 그렇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들의 감정 교류 부분에서 거의 독보적인 수준이다. 그래서 시청자를 더욱 흔든 것 같기도 하다.
...한결아, 은찬이는 사실 여자야. 그냥 빨리 결혼이나 해버려.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는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면, 바로 그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다. 굳이 시대물이 아니더라도 옛날 드라마를 보면서 드라마를 보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따라서 우리는, 커피 프린스를 보며 각자의 2007년을 떠올린다.
2007년에 나는 고등학생이었는데, 17살 그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 드라마가 너무나도 재밌다는 건 알아버려서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곤 했었다. 그때는 요즘 고등학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롱 안에 들어가 있는 거대하고 뚱뚱한 텔레비전으로 17살의 여고생들이 모두 모여 두 남녀를 감상하곤 했다. 그렇게 TV를 보던 기억은 드라마뿐만 아니라 음악 방송을 보던 기억까지 끄집어 내 그 시절의 노래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더불어 그 당시에 쓰던 폴더 폰과 카카오톡 대신 주고받던 촌스러운 폰트의 문자 메시지를 떠올리게 했다. 아마 당시에 캐릭터들과 나이가 비슷했던 20대 초 중반의 사람들은 풋풋한 연애의 감정을 떠올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한성(이선균 분)과 유주(채정안 분)의 성숙한 연애도 조금씩 이해하게 됐을 수도 있다. 어른들의 연애라고 하기엔 캐릭터 나이가 고작 31살이지만, 분명 그때 서른 살들은 지금과는 다른 감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드라마는 2G 폴더폰 시대의 서울 모습을 아주 싱그럽고 사랑스럽게 담아냈다. 한결의 옥탑방에서 보이는 이른 아침 남산타워 뷰는 아주 예뻤고 한성의 집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시내의 모습도 꽤 싱그러운 모습이었다. 그때는 뭐, 미세먼지도 없었나 보죠?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며 어렸던 자신의 청춘을 떠올리고 그때의 그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진짜 좋은 드라마는 탄탄한 스토리와 배우의 미친 연기를 힘에 업고 시청자를 그 시절로 언제든 소환시켜줄 수 있는 드라마인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드라마를 만드는 것은 모든 작가의 소망일 것이다. 냐 역시 조금 어설프더라도 꼭 그런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글을 쓴다.
(모든 사진의 출저는 MBC 다큐플렉스 <청춘 다큐 다시, 스물> -커피 프린스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