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좋은 드라마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사회적 문제를 꼬집는다는 점에서, 드라마 <산부인과>는 꽤 잘 만든 드라마이다. 실제로 이 드라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에피소드인 선천적인 질병이 감지된 아이를 낙태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낙태죄가 폐지된 이후에도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논쟁이 펼쳐지고 있는 부분이고, 강간당한 미성년자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쭉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병원과 의사들의 현실을 확실하게 반영한 드라마를 보고 싶다면 <라이프>를 추천한다.
(JTBC/극본 이수연 연출 홍종찬, 임현욱/이동욱, 조승우, 원진아 주연)
이 드라마는 과연 악역이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시청자들에게 고민하게 만들며 우리 사회에서 병원이라는 곳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묻는 드라마이다. 병원은 부의 격차와 상관없이 국민 모두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공공재인가 아니면 반드시 이익을 창출해야 해야만 하는 기업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누가 쉽게 찾을 수 있을까.
처음에는 그저 새로 온 사장 구승효(조승우 분)가 나쁜 놈인 줄 알았다. 성공에 눈이 멀어 환자를 위하기는커녕, 돈이 되는 사업만 추구하는 속물 중에 속물인 인간인데, 묻어놓고 이 인간만 욕하기에는 의사들도 만만치 않게 답이 없는 상황이다.
"이 집단은 실수를 인정을 안 해. 없을 수가 없는데, 없대. 무조건 없대. 의사들도 실수를 인정해야 해."
예진우(이동욱 분)의 이 말은 병원과 의사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는 분명 의사의 실수로 죽었는데, 아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드라마 속에서 이런 문제점을 다 밝히고 환자에게 상황을 알리는 것은 구승효의 몫이다. 우리 사회에서 소위 말하는 엘리트들만 가질 수 있는 전문성 뒤에 숨어, 제 식구 감싸주기에 급급한 의사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탄식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적자가 당연시되는 대학병원의 수입 구조,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각종 문제들을 어찌 의사들에게 오롯이 감당하라고 할 수 있을까. 흔히들 말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또다시 반복될 문제들이었다.
나는 아빠의 수술 날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그날의 전공의가 떠올랐다. 별안간 벼락을 맞은 가족들이 수술 후 중환자실 앞에서 아빠의 수술 경과를 들으려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을 때, 수술에 참여했던 전공의가 그새 사복으로 갈아입고는 참담한 표정의 우리 가족을 슬쩍 본 후 모르는 사람처럼 그냥 나가버리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저 의사는 지금 우리가 어떤 심정으로 여기에 있는지 모르는 걸까. 수술은 끝났고, 수술 상황에 대해 설명했으니 이제 본인의 할 일을 끝났다 이건가. 그래, 이게 우리 가족한테나 청천벽력이지 너는 이런 장면 매일 본다 이거지. 역시 드라마 속에 나오는 살가운 주치의는 정말 드라마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환자 가족이 이도 저도 못하고 병원 복도에서 낙동강 오리알처럼 떠 있는데 주치의라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갈 수 있을까. 나는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냥 앉아서 기다리시라는 정도의 말을 기대한 것뿐이었다. 초조했던 우리는 제대로 앉을 수도 없었기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며 나는 섭섭하고 황당한 마음을 잠재우려고 노력했다. 그래, 당신도 집에 오랜만에 들어가는 거겠지. 당직에 수술까지 혹사당하고 겨우 집에 가는 거니 그럴 수도 있지. 모든 직장인에게 퇴근은 보장되어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나는 또다시 궁금해졌다. 우리는 의사에게 어떤 것까지 바라야 하는가. 의사에게 병원은 봉사하는 곳인가, 그저 돈을 버는 직장일 뿐인가.
어떤 것이 정답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와중에도 의학드라마는 계속 만들어져 왔다. 유튜브만 봐도 방구석 전문가들의 각종 리뷰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의학드라마는 진짜 전문가들의 성지가 되곤 했다. 특히나 많은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일반 사람들에게 의학이 더욱 친숙하게 와닿기를 희망하는 의사 유튜버들에 의해 더욱 세밀하게 분석되었다. 그렇기에 의학드라마는 현실성이란 요소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시대가 발전한 만큼 대충 이렇다더라, 식의 이야기는 씨알도 안 먹히게 되었고, 전문 분야에 대해 쓰려면 대충 뭉개지 말고 무엇보다 현실적이게 써야 한다. 병원이 소재가 되는 드라마에서, 대충 눈물만 뽑아내는 스토리에 시청자들이 먼저 거부감을 느끼는 시대가 되었다.
2020년 첫 방송을 시작으로 시즌2까지 제작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여러 유형의 병원 사람들에 대해 보여주었다.
(tvN/극본 이우정 연출 신원호/ 조정석, 정경호, 전미도, 김대명, 유연석 주연)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캐릭터 중심의 이야기이다. 5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병원과 관련된 여러 사람들을 각 회사마다 특별한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많은 캐릭터 중에서도 특히나 이익준(조정석 분)은 현실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 완벽한 캐릭터지만, 아주 현실적 에피소드들과 입체적인 캐릭터 묘사를 바탕으로 그를 진짜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의사로 만들어 놓았다.
2번이나 간 이식을 받고도 또 술을 마신 환자에게 화를 내는 장면은 익준이 그저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와중에 수술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의사라는 드라마틱한 설정에 조금 현실성을 불어넣어주었다.
"자식이 간 기증 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니에요. ... 기증자 수술도 목숨 걸고 하는 간 수술이에요. 딸 둘이 아버지를 위해서 목숨을 건 거라구요.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기증할 사람이 없어서 돌아가시는데! ... 전 앞으로 환자 분 수술, 진료 못합니다."
어마어마한 감정의 폭발과 절제를 보여주며 조정석이라는 배우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 배우인지 보여준 이 장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세상이 이익준 같은 의사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의사들에게, '죽은 사람을 살려 놓을 것이 아니라면 무조건 공감해라.'라고 말하고 싶었다. 같이 울어도 약한 사람이라 흉보지 않고, 화를 내도 기분 나빠하지 않을 테니 제발 환자와 보호자들이 느끼는 감정에 조금이라도 공감해달라 부탁하고 싶었다.
아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이익준이 <하얀 거탑>의 장준혁을 만난다면 하고 싶은 말도 이런 말이 아닐까.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일을 겪고 있을 환자와 보호자에게, 이미 당신의 수술 실력은 다 알고 있으니 의사의 전문성만을 강조하며 자신의 성공에만 눈을 돌리지 말고, 절대적으로 그들의 슬픔에 공감해 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라는 말.
나는 익준에게 아빠의 주치의를 만나면 꼭 그렇게 말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당신의 인생이 너무도 피곤하다는 건 이미 환자와 가족들도 각종 매체와 드라마를 통해서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힘을 내 한 번이라도 더 환자 가족들에게 말을 건네주세요.
그리고, 익준이 우리 아빠를 만난다면 간 이식 수술 환자에게 했던 것처럼 화를 내거나, 혹은 원래 그러는 것처럼 다정하게 달래기라도 해달라고 꼭 부탁하고 싶었다.
뇌출혈이라는 병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병이고, 그걸 직접적으로 경험한 본인도 너무 겁이 나고 힘들겠지만, 자신의 남은 인생을 위해서, 평생 고생한 엄마를 위해서, 아직도 바보처럼 부모에게 빌붙기만 하는 염치없는 자식들 때문에 울화통 터져서라도, 죽을힘을 다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주세요. 뇌 수술 후 재활 치료는 모두의 몫이지만,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고, 제발, 마음대로 가눌 수 없는 몸과 정신에 망연자실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모든 사진의 출처는 해당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