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학을 전공해서 좋다고 느꼈던 건 유일하게 드라마 <김과장>을 볼 때였다. 대학을 다닐 때는 딱히 어떠한 목적이 없이 그냥 공부를 해야 했기에 했다. 놀 수는 없으니까. 지금에야 와서 도대체 무엇을 위해 나는 그렇게 쓸데없이도 학점 따위에 신경을 썼나 생각해보면, 드라마를 좀 더 재밌게 보려고 그랬던 것도 같다. 분식회계 뭐니 하는 것들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편리함은 드라마에 대한 흥미를 더 높여주었다.
대한민국의 많은 소년소녀들은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대학과 전공이라는 큰 선택을 해야 한다. 주입식 교육으로 똘똘 뭉쳐 자기 계발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대한민국 교육과정에서 아이들이 당최 어떠한 근거로 그 두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본인의 의지라기보다는 대충 성적 맞춰가는 것이 대학인 상황에서, 열아홉, 그 순간의 선택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도 크다.
삼십대가 된 지금은 대학 간판보다는 적성에 맞는 전공을 선택하는 것이 인생을 설계하는 데에 더 이롭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열아홉은 자신이 뭘 잘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는 게 문제다. 요즘이야,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보다도 훨씬 미디어가 발달했고, 야간 자율학습을 진짜 자율적으로 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이기에 일찍이 꿈을 찾는 아이들이 많을 수도 있다. 제발 그랬으면. 그런데 또다시 생각해보니 공무원 시험을 비롯한 각종 자격시험의 응시자 수가 날마다 늘어가는 상황에서 전공이고 나발이고 뭐가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그래, 난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 전공은 대학에서 억지로 배우지 않았다면 나 스스로 교양을 쌓기 위해서 공부했을 리가 절대 없는 분야임이 틀림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회계'라는 단어가 주는 지적인 허영심 때문에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무 살, 그 어린 나이에 부모의 뜻을 거스를 힘이 내게는 없었다는 것도 전공 선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타지에 있는 심리학과에도 합격했었던 나는 내 적성에는 회계학보다 심리학이 더 잘 맞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엄마는 집을 떠나 대학 생활하는 것을 완곡하게 반대했다. 물론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다면 과에 상관없이 당연히 가는 것이었겠지만, 심리학을 선택한다고 해도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갈 뿐이라는 사실은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지금까지도 다른 전공을 가졌더라면 내 인생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러지 못했던 것은 모두 내가 공부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책감에 괴로울 때가 있다. 공부를 더 잘해서 서울로 갔더라면 쉽게 허락받았을 텐데.
인생이 꼬일 때마다 결국 나 자신을 탓하며 스스로를 갉아먹곤 한 것이다.
엄마는 그 당시 나에게 심리학과 나와서 나중에 무엇을 하며 먹고 살 건지 물었고,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됐을 뿐인 나에게 인생 전체의 진로를 묻는 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대학에 가든 등록금을 비롯한 모든 비용은 어른들의 몫이 이었고, 몸만 크고 정신은 어린아이였던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엄마 말을 듣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두려웠다. 될 수 있으면 영원히 착한 딸로 남고 싶었으며 어른의 말을 듣는 것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결국 엄마의 선택이 나의 선택이 되게 해 버렸다.
내가 과를 고민할 때, 주위의 어른들은 한 목소리로 나중에 취업을 하는 데는 심리학보다 회계학이 낫지 않냐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슨 과를 나오던 인문 경상계열의 문과생들은 취업전선에서 총알받이로 죽어나간다는 걸 알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안일한 생각이었고, 슬프게도 대학은 자아를 실현하는 곳이 아닌 취업을 위한 수단이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래서 나는 19살의 소년소녀들에게는 꼭, 너의 적성에 조금이라도 맞는 공부를, 대학에서는 꼭, 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스터디카페에 매일 오는, 정확히 말하면 매일 와서 가방만 던져 놓고 어디론가 떠나 버리는 고등학생 남자아이 있다. 앞길 창창한 그 아이를 걱정할 처지는 아니지만, 공부는 안 하고 자꾸 쏘다니는 학생을 보니 꼰대 마인드가 발동한 건지 속이 답답해지곤 했다.
얘야, 공부를 하렴. 그래야 서울에 있는 대학 가지. 여기 남아 있으면 니 인생 고만고만해지는 거 한 순간이야. 누나, 아니, 이모가 다 해봐서 알아, 임마. 게임 좋아하면, 뭐, 컴퓨터 무슨 그런 걸 전공해서 네가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는 거잖니?
어떤 사람은 또 히터 온도를 좀 조절할 수 없냐는데,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답답해서 그렇단다. 그래서, '온도를 좀 낮출까요?'라고 물으면, 온도는 괜찮단다. ...뭐 어쩌라구 그럼. 온도를 낮추지는 않고 시원하게 만드는 방법을 저는 모릅니다. 해리포터는 알까요? 순간적으로 뭐 어쩌라는 건지 몰라 결국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며 히터 온도를 조절하는데, 남자가 공부하고 있는 책이 눈에 띄었다. 'IFRS 중급회계'였다.
책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대학교 때가 생각났다. '회계원리'라는 과목을 처음 듣고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어영부영 시간은 흐르고 흘러 중급회계를 넘어 고급회계에 고급 관리회계에 법인세법까지 공부를 했던 나 자신이 떠올랐다. 시험 때마다 육성으로 욕을 내뱉으며 특수 계정과목의 분개를 해대던 내가 드럭 스토어 직원을 하다 작가 지망생이 되었다가 갑자기 웹소설 작가가 되었다가 지금은 스터디 카페 사장이 된 인생 스토리를 어떤 작가가 지어낼 수 있을까.
드라마 <김 과장>은 대기업 경리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KBS/ 극본 박재범 연출 이재훈, 최윤석/ 남궁민, 남상미, 이준호 주연)
주인공 김성룡(남궁민 분)은 아주 똑똑한 사람이지만 그 똑똑함을 좋은 쪽으로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회계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들어 어떤 식으로든 삥땅(?)을 처먹던 사람이었다. 착하던 사람이 어떤 사건을 겪으며 복수를 위해 흑화하는 이야기가 있는 반면, 이 드라마처럼 못되게 살던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각성하고 정의를 찾는 경우도 있다. 드라마 <빈센조>역시 같은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데, 같은 작가가 쓴 작품이다.
현실 오피스 드라마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드라마 <미생>은 무역 회사를 바탕으로 각종 스펙이 짱짱한 회사원들이 다수 등장한다.
(tvN/ 극본 정윤정 연출 김원석/ 임시완, 이성민, 강소라, 강하늘 등 주연)
다들 왜 그렇게 외국어들은 잘하는지, 독일어며, 러시아어며, 부전공으로 언어 하나씩은 떼고 와서 외국 바이어들과 유창하게 소통한다. 아무리 대학 간판이며 스펙보다는 업무 능력을 보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취업을 준비해 봤다면 모두가 알 것이다. 아직도 이 세상은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 무엇을 전공했는지가 너무도 중요하다. 그렇기에 장그래(임시완 분)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에는 정직원이 되지 못하고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각종 능력을 기반으로 회사의 갑이 된 계약직이 등장하는 드라마 <직장의 신>도 있다.
미쓰김(김혜수 분)이라 불리는 슈퍼갑 계약직 사원은 워낙 업무 능력이 뛰어나 누구 하나 그녀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각종 자격증을 무기로 완벽하게 일을 해내니 동료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날마다 칼퇴를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업무 관련 능력은 물론이고 하다 하다 무슨, 굴삭기 자격증까지 있으며, 회식자리에서도 특유의 무표정으로 기가 막힌 탬버린 댄스를 보여주니 누가 그녀에게 욕을 할 것인가. 세상의 수많은 스펙, 즉 자격증들이 그저 자소서에 한 줄 채우기 위한 형식적인 공부가 아니라 미쓰김처럼 진짜 업무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능력이 있는 건 김성룡 과장, 즉 김과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회계 쪽 지식이 남다르기에 티 나지 않게 장부를 조작할 수 있다. 사실, 배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재무제표라는 것은 조금만 허술하게 작성되어도 그 허점을 다 파악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능력이 더욱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미쓰김과는 다르게 김 과장이 가진 자격증은 아마 딱 하나이지 않을까?
나는 대학시절, 회계사 자격증이 있는 김 과장이 절대 딸 일이 없는 전산 회계라든지, 재경관리사와 같은 각종 회계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다. 딱히 따고 싶어서 딴 건 아니고 그냥 놀기 뭐하니 스펙이라도 쌓자 싶은 마음이었다. 사실 드럭 스토어에서 일할 때까지만 해도 전공 살려가며 먹고 살 건도 아닌데 뭐하러 그 자격증들을 다 땄나 싶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고작 책 한 권을 보고 단번에 추억 여행을 한 걸 보면 내가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평생 남는 기억임이 틀림없다.
어떤 작가이든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무시한 채로 글을 쓸 수는 없다. 완벽하게 자신을 버리고 객관적인 자세에서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AI가 아닌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가치관이나 관심사가 글에 묻어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싫든 좋든 4년이나 공부한 분야는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가 없게 되었고 그렇기에 아직도 극 중에 전문직의 엘리트 캐릭터를 넣고 싶을 때는 언제나 그 캐릭터에 회계사라는 직업을 부여한다. 대한민국의 많은 드라마 속에서 변호사, 검사, 의사 등이 판을 치는 와중에 내가 회계사라는 직업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는 건 그 공부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겠는가. 법학과를 졸업했다면 당연한 수순으로 변호사들끼리 치고받는 이야기를 생각했을 것이고, 스페인어학과를 졸업했다면 인간에게 상처 받고 저 멀리 아르헨티나로 떠난 여자가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썼을 수도 있다. 내가 무엇을 공부했는지, 어떤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지는 생각보다 작가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SNS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상식을 많이 아는 것은 세상을 보는 시력을 높이는 일이라고. 여러 분야를 공부한다는 건 쓸데없는 일이 아니라 흐릿했던 세상을 조금 더 선명하게 보는 일일 수도 있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전공과목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이 리셋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기억 저편에 남아 있는 회계 지식들은 내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데 조금의 기반을 만들어주곤 했다.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고 싶기에 여러 분야의 사람들은 만나고 많은 지식을 가지는 것은 당연히 중요할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것을 놓치지 말고 새로운 분야에도 도전하는 바람직한 자세를 언젠가 가지게 된다면, 내 글도 <김과장>과 같은 드라마가 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