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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캐리 Feb 25. 2021

힘이 들 땐 동만이를 생각해.

너무 열심히 사는 사람들.


가끔, 너무 열심히 사는 것 같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왜 항상 나만 피곤하고 나만 게으르고, 나만 시간이 없는 걸까.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일 년에 한두 번 말도 안 되게 일찍 눈이 떠지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이면 어쩔 수 없이 스터디카페로 일찍 출근은 한다. 도착해서도 겨우 새벽 6시밖에 되지 않아 사람이 없을 때 신명 나게 청소를 해야겠다 다짐한 순간 책가방을 메고 들어오는 사람을 봤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란... 아니, 뭐 이렇게 일찍 와... 잠은 안 자고 오는 겨? 6시에 공부하러 오는 거면 도대체 몇 시에 자는 건데요, 손님... 사람이 평균적으로 7~9시간 정도는 자야 된대요.

나는 새벽에 공부하러 오는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또 한 번 궁금해졌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요? 무엇을 위해서. 당신의 꿈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런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늘 드라마 <청춘시대>의 대사가 생각났다.


"윤 선배 보면 정말 열심히 사는데, 어떻게 저렇게 사나 싶을 정돈데,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서 되고 싶은 게 겨우 회사원인가 궁금해서."

"그치? 나도 가끔 쪽팔려. 내 꿈이 우주비행사나 유엔 사무총장쯤이면 좋겠는데."


윤진명(한예리 분)은 누가 봐도 정말, 살짝 짠내가 날 정도로 열심히 사는 대학생이다. 등골 빼먹는 가족은 필수요, 연애는 사치고, 매일 공부에, 알바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런 그녀의 꿈은 다른 게 아니라 그냥 회사원이다. 





새벽 6시에 공부하러 오는 취준생의 꿈이 우주비행사나 유엔 사무총장은 아닐 것이다. 이곳은 경상도 귀퉁이에 붙어 있는 지방 도시일 뿐이었다. 무언가를 꿈꾸는 이들은 서울로 가야만 하는 것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순리였고, 어떤 공부를 하든 최고의 직장은 공기업이었으며, 모든 취준생들의 꿈은 회사원이다.

엄마는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고 기특하다며 스터디카페가 자신과 딱 맞는 사업 아이템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딱히 기특한 마음은 들지 않고 때때로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나도 나지만, 당신들도 참... 얼마나 갑갑하겠어요. 나가서 뭐라도 해야 되는데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뭘 공부하든 그래도 아침 일찍 나와 밤늦게 집에 가는 학생들을 볼 때면 대단하다는 마음이 들기는 했다. 천성이 게으르고 잠만보인 나의 눈에 그런 사람들은 아주 '열심히'사는 사람들 같았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청춘들을 보니 나중에는 나 자신이 한심해지곤 했다. 비교하는 순간 불행해지는 게 인간이었다.

내가 너무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그래도 나는 직장이 있으니까, 물론 내 돈으로 차린 스터디카페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명의의 가게가 있으니, 아직도 매일 불안해하며 취직 준비를 하는 사람들보다는 낫다는 나만의 위로를 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에도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스스로를 아직도 스터디카페 사장이라 여기지 않고 작가이자 작가 지망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스터디 카페 운영은 부업이고 글을 쓰는 것이 본업인데, 본업에 너무 힘쓰지 않고 있어 늘 자괴감이 밀려들곤 했다. 이러려고 무인 가게를 연 것이 아니오만.

그렇지만 짓누르는 피로감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은 매일 아침 들었다. 누가 깨우지 않으면 10시까지 자는 사람이 억지로 6시 반에 눈을 떠 매일 3시간씩 청소를 하니 아주 죽을 맛이 따로 없었다. 휴일도 없고 휴가는 더더욱 없는 일이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거기에 더해 가끔 진상 고객님들께서 괴롭히는 날에는 도대체 뭐가 뿌듯하고 뭐가 기특하다는 거냐며 엄마에게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게 다 체력이 부족해서 그런 건가 싶어 운동이라도 하면, 그거 아세요? 더 피곤해. 12시도 되기 전에 아주 꿀잠을 자요. 할머니도 아니고, 참나.






더욱 큰 문제는 공모전은 언제나 있다는 것이다. 매년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방송사 공모전을 제외하더라도 나같은 지망생들이 문을 두드려 볼 만한 공모전은 언제나 있었고 내가 할 일은 열심히 쓰는 것이었다.  나는 한 방송사의 단막극 부문에 응모할 예정이었다.  예전처럼 마감일이 다가와서야 다급하게 써서 제출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는 꽤 열심히 대본을 써 내려갔고, 마감이 일주일 정도 남았을 때도 충분히 전부 다 써서 한 번 검토까지 할 만한 여유가 있을 것 같았지만, 문제는 분량이었다. 

세상에 내가, 분량이 너무 많아서 단막극에 응모하지 못하다니.

그동안 나는 부족한 필력과 엉성한 스토리 라인으로 넉넉하게 분량의 뽑지 못하는 것이 초보 작가들이 흔히 겪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가진 이야기가 과연 단막극에 어울리는지, 16부작 드라마에 어울리는지, 2시간짜리 영화에 어울리는지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새롭게 생각해낸 스토리가 정식 드라마로 만들기에는 내용이 부족하고, 단막극으로 만들면 딱이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대본을 쓰기 시작하니 1부작으로는 절대 완성시킬 수 없는 분량이었다. 뭐 그렇게도 쓰고 싶은 것이 많은지 아직 쓸 내용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이미 30쪽이 넘어가고 있었다. 젠장, 어떡해.





단막극을 포기하고 이제 다부작 드라마로 제출을 하려고 했지만, 그러려니 이제는 시간이 없는 게 문제였다. 난, 돈 벌어야 되니까 스터디카페 청소도 해야 되고, 이벤트 관리해야 되고, 작가니까 책도 읽어야 하고, 감 떨어지면 안 되니까 드라마도 봐야 되고, 이 나이에 엄마한테 밥 해달라고 할 수 없으니까 밥도 해야 되고, 살찌면 안 되니까 운동도 해야 되고, 글 쓰는 게 중요하니까 브런치도 써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요. 정말 바쁘고 피곤하다구요. 근데 어떻게 일주일 만에 대본을 다 쓰고 시놉시스까지 완성합니까. 포기예요, 포기.

결국 인물 설정부터 싹 다 다시 세세하게 정리한 다음, 조금 나중에 있을 공모전에 단막이 아닌 드라마로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시기가 조금 늦춰졌으니 지금보다 더 나은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공모전을 미루자마자 또 나태로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갑자기 조별 과제 발표 시기가 미뤄진 같은 여유로움. 다른 학생들 다 발라버릴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하지만 '지망생'이라는 단어는 가능성의 상징은 동시에 정체의 상징이었다. 피곤한 상태에서도 매일 글을 쓰지만, 결국 공모전에 당선되거나 정식 작가가 되지 않으면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우물 안에서 아무리 열심히 헤엄친다고 해도 우물 밖으로 나가지 못하면 사실상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천방지축 얼렁뚱땅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의 하루 속에서 나는 오늘도 이상하게 멈춰 있는 것 같기만 했다.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술에 취한 차현(이다희 분)이 넋두리하듯 중얼거린다.


"너무 힘들었다가 성취감에 짜릿했다가 그러다 또 실패하고 좌절하고 죽겠다 한숨 쉬고... 또 그러다 웃긴 거 보면 웃고, 밥 먹으면 맛있고, 좋아하는 사람 보면 좋고... 이런 게 다 삶이겠지? 근데요, 언니. 때론 이 모든 게 너무 고단해요. 이 모든 게 힘에 부쳐."


그럼 배타미(임수정 분)가 말한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 되잖아."


차현이 대답한다.


"맞아요. 삶은 징그럽게 성실하고, 게으른 나는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죠."


삶은 징그럽게 성실하다. 내가 멈춰 있어도 시간은 잘만 흐르고, 이 바쁜 세상에서 나는 너무 게을렀다. 늘 피곤하고 잠이 왔다. 과연 내가 지금보다 얼마나 더 열심히 살 수 있을까. 이 성실한 세상에서 과연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쓰기가 게을러질 때마다 난 첫 번째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를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쌈 마이웨이>의 고동만을 생각했다.

(KBS/ 극본 임상춘 연출 이나정, 김동휘/박서준, 김지원, 안재홍, 송하윤 주연)

임상춘 작가의 대표작이라 하면 이제는 모두가 <동백꽃 필 무렵>이라 하겠지만(잊지 말자 용식이), 나의 심장은 여전히 <쌈 마이웨이>를 품고 있다.

이 드라마가 방영될 때 나는 극한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펑펑 놀다가 이제 진짜 더 이상 노는 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싶어 어찌어찌 취직을 했는데, 그 일이 너무 재미가 없어 하루하루를 정말 그냥 흘려보내기만 했었다. 쉬는 날이 들쑥날쑥인 스케줄 근무는 몸을 지치게 만들었고, 틈만 나면 만나게 되는 진상들과 발전이 없어 보이는 패턴화 된 업무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쉬는 날에는 정말 쉬기만 하고 일하는 날에는 정말 일만 하다가 지나가버리는 세월에, 나 같은 망상 종자는 금방 환멸을 느끼고 말았다. 억지로 견뎌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을 때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나의 대변인들이었다. 





주인공 고동만(박서준 분)은 촉망받는 태권도 선수였다. 이런저런 사건이 생기면서 선수 생활을 그만두었고, 운동을 그만두어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 격투기 선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원래도 운동을 잘했으니 금방 자리를 잡는데, 문제는 애라였다. 

최애라(김지원 분)는 동만과 죽마고우이자 그의 여자 친구인데, 격투기를 한다고 동만이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는 걸 보기가 너무 힘들어했다. 하긴, 남자친구가 매일 얻어 터지고 귀가 잘 안 들린다는데, 말리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냐고요. 제발 운동을 그만두라는 애라의 말에 동만은 울먹이며 말한다.


"지금까지 싹 다 개꿈 꾼 거고, 내일부터 다시 진드기 잡고 택배 돌리고 이삿짐 싸라고 하면 나는 진짜, 진짜 하루도 못 살 것 같아. 난 다신 들러리로 살긴 싫어. 꿈도 없고 벨도 없는 등신처럼 그냥 숨만 쉬며 살긴 싫다고"


동만이는 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삶의 가치를 느꼈다. 택배를 나르고 진드기를 잡을 때는 느끼지 못했고,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자 진짜 숨을 쉬는 것 같은 기분이다. 무언가를 꿈꾸고 있는 사람은 한번쯤 느껴보는 감정일 것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사는데, 별로 진전은 없고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잘난 인간들 들러리만 서주고 있는 기분. 건설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그냥, 살아있으니 숨만 쉬고 사는 것 같은 기분. 동만은 다시는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돈을 조금 못 벌고 매일 같이 멍투성이가 되어도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일을 그만두고 처음 웹소설을 출간했을 때처럼.


그렇기에 항상 마음이 해이해질 때마다 동만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백화점 안내데스크 일을 하면서도 아나운서의 꿈을 놓지 않은 애라를 생각했다. 꿈을 위해 마이웨이로 달려가는 그들을 보며 함께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쌈 마이웨이>가 특별한 이유는, 우리네들의 꿈이라는 게, 애초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동만의 꿈은 태권도 선수였지만, 격투기를 하게 되었고, 애라의 꿈은 방송국 아나운서였지만, 뉴스를 진행하는 대신 스포츠 장내 아나운서가 되어 선수들을 인터뷰하게 되었다. 나 역시 드라마 작가가 꿈이었지만 어찌어찌 웹소설부터 출간하게 되었다. 우리네 인생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와중에도 꼭 내가 꿈꾸던 모습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꿈을 이어나갈 수 있다. 그 가능성에 많은 청춘이 힘을 내지 않을까. 







휴일도 없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꼭 시험에 합격하길 바랐다. 내가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 세상이 아직 살만하다면 응당 열심히 사는 사람이 성공해야 맞는 거니까. 

열공 중인 사람을 매일 구경하는 가운데 종종 내게 '열심히' 관리해주셔서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 되는 것 같다며 고맙다는 말을 쪽지에 적어 과자 같은 걸 놔두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쪽지를 받을 때마다 나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저 먹고살기 위해서 내 일을 하는 것일 뿐인데, 그게 이렇게 세심하게 감사 인사를 받을 일인가.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지, 어떤 사명감이 있어서 일하는 건 아니었다. 더구나 자기 돈을 직접 결제하고 공부하러 오는 사람이 직원에게 먼저 감사함을 표시한다는 건 나로서는 조금 생소한 일이었다. 

나는 그들의 감사 인사가 내가 정말 일을 '열심히'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이 배려심 깊고 정이 많은 인성을 가졌기 때문에 나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인사가 이상하게 용기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비록 내 글쓰기는 지지부진한 상태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열심히' 살고 있는 상태일 수도 있다는 위로가 되곤 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들... 사... 행복하세요. 






원래 모든 분야의 지망생들은 급격한 감정 기복을 겪는다. 눈 앞이 캄캄하다가도 갑자기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며 미친 듯이 글을 쓰다가 또 어느새 다 엉망진창인 것 같아 실망하기도 한다. 우물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이런 감정도 '열심히'느끼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매일 한 줄씩 쓰는 글이 모여 내 필모그래피의 초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마이웨이를 걷는 동만, 애라와 함께 나도 너무 열심히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의 마이웨이를 걷는 수밖에. 










(모든 사진의 출처는 해당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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