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더 이상 여성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업종이 그렇듯 드라마 역시 지금도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성공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여성들은 서서히 연하남에게 스며들게 되었다.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이 더 나이가 많은 설정은 이제 특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많은 여성들은(대표적으로 나), 늘 그렇듯이 여자 주인공에 빙의해서 나보다 어린 남자를 보며 설레고 있다. 사실 나이야 남자가 많든 여자가 많든 그걸 따진다는 자체가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나보다 나이가 많은 든든한 남자에게 익숙해진 우리네 여성들에게 '어린 남자'는 신선한 자극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내 주변에서 연하를 만나봤던 여자들은 대부분 어린 남자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만나봤던' 사람들이기에 당연히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대가 자신과 정말 잘 맞고 괜찮았다면 지금도 '만나고 있는' 상태일 테니까.
연하를 만나봤던 그녀들은 공통적으로 그들이 생각이 깊지 못하고 감정적이라고 말했다. 물론 어리다고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고, 연상을 만난다고 해도 답이 안 나온다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사실 어리다는 것도 너무나 상대적인 것이 아닌가. 나한테는 아기라도 사회에서는 어엿한 아저씨일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나보다 어린 남자'는 결정적인 순간에 어린 티를 내곤 한다는 것이 연상녀들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이다. 중요하게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 주변 사람들이 느낄 기분이나 미래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즐거움만을 기준으로 삼아 선택한다거나, 화가 나는 순간이 올 때 여유를 찾지 못하고 감정의 바닥을 모두 보여주는 행동들 말이다.
대학 선배 H언니는 5년이 넘게 연하와 사귀다 온갖 진절머리를 내며 헤어졌다. 원래도 공부 따위에 관심 없었던 남자는 H언니가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해 이제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냐는 주변 사람들의 쓸데라고는 전혀 없고 짜증만 나는 오지랖을 겪을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자진 유급과 휴학을 반복하며 인생을 설계하지 않고 있었는데, 내가 봐도 저 인간 어쩌려고 저러나 싶은 수준이었다. 그래서일까, 남자는 H언니의 여유 있는 지갑과 넓은 인간관계에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 때문에 다투는 일이 잦아 젖으며, 이별에 이르게 되었다. 그 후에 H언니는 동갑의 회사 동료와 만난 지 1년도 되지 않아 결혼을 했고, 지금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내 친구 쩡은 스무한두 살 때쯤에 아주 짧게 연하를 만났는데, 그 뒤로는 연하를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되었다. 남자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티를 팍팍 내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드문드문 잘 안 되더니 나중에는 다른 여자와 연락한다는 걸 들키기도 했었다. 쩡도 어린 나이였는데 그것보다 더 어린 남자였으니 고작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개념이 없을 만도 한 나이지만, 어리다고 모두 그런 것은 아니기에 그냥 어쩌다 잘못된 인간 하나를 만났다 생각하라 했지만, 그녀는 연하남이라면 치를 떤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연하남에 열광하고 있다. 드라마에 연하남이 나오면 모든 랜선 연상녀들이 야단법석이 된다. 박력 있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는 직진 연하남에. 잘생기고 피지컬까지 좋은데 재력도 빵빵한 와중에 귀엽게 애교 부리며 나만 좋다는데 싫을 이유가 있나요? 환영. 대환영. 웰컴이요, 웰컴.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라는 명대사를 남긴 드라마<로망스>는 내 동년배들의 인생 첫 연상연하 스토리가 아닐까 싶다.
(MBC/ 극본 배유미 연출 이대영/ 김재원, 김하늘 주연)
솔직히 말해, 눈에 뵈는 거 없던 초딩 시절에 봤던 드라마라 내용도 잘 기억이 나질 않고 위의 저 대사밖에는 모르지만 지금도 이 드라마가 종종 언급되는 걸 보면 꽤 반향을 일으켰던 건 분명한 듯하다. 주인공들이 처음 만났을 때 남자 주인공 관우(김재원 분)이가 미성년자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기도 했다. 신분만 학생이고 몇 년 꿇은 복학생 같은 게 아니었나 싶었는데, 정말로 19살이라니. 고등학생 제자와 선생님의 사랑이야기가 너무 자극적인 것 아니냐는 우려에 연출을 맡은 PD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반복되었던 신데렐라 스토리나, 출생의 비밀과 같은 한정적인 소재를 탈피해서 오히려 다루지 못할 것 같은 소재를 찾아낸 것이라고. 2002년에 신데렐라와 출생의 비밀 이야기가 이미 진부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 놀랍다.
주인공 관우는 전형적인 2000년대 연하남이 아닐까 싶다. 저돌적이며 당돌하고 거침없다.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미성년자 제자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3년만 기다려달라고 말하며 사랑하는 여자의 옆에 서기 위해 노력한다. 물러나는 것이 없고 오직 그녀만을 위해 순정을 바친다.
또 한 명의 대표적인 2000년대 연하남이 있다면, 바로 현진헌이다. 지금 다시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본다면 그때만큼 현진헌(현빈 분)이라는 캐릭터에 빠져들 수 있을까?
(MBC/ 극본 김도우 연출 김윤철/ 김선아, 현빈, 정려원, 다니엘 헤니 주연)
아니, 자기는 전 여친이랑 깔끔하게 못 헤어지고 지지부진하고 있으면서 삼순이가 또 다른 남자 만나는 건 싫대요. 뭔 놈의 배짱입니까. 박력이 매력이다 이겁니까? 뭐, 잘 생기고 돈 많으면 다예요? 응, 그게 다지 뭐. 그래서 삼순 언니도 희진이랑 정리하고 올 때까지 잘 기다려준 거 아닙니까.
지금 다시 봐도 여전히 겨우 나이 서른에 온갖 노처녀 취급은 다 받았던 2005년의 삼순 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지만, 삼식이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연하남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 말란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고, 가지 못하게 막고, 관계가 조금 진전되는 듯하자 바로 말을 놓는다. 그래도, 그때는 현빈이니까, 삼식이니까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시대가 변했다.
2000년대의 연하남들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저돌적으로 드러내는 게 미덕이었다면, 2020년대의 연하남들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진짜... 잡혀가면 어떡해요, 좀... 하지 말라면 하지 마요.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를 히트시키며 시즌 2까지 만들어진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도 연하남이 등장한다.
(tvN/ 극본 이우정 연출 신원호/ 조정석, 정경호, 전미도, 유연석, 김대명 주연)
송화(전미도 분)를 오랜 시간 짝사랑한 치홍(김준한 분)은 서서히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선을 넘는 바람에 수많은 여성 시청자를 탄식하게 만들었다.
무슨 반말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이에요, 왜 그래요 진짜. 반말을 했으면 곱게 차에서 내리지 왜 어깨를 잡고 이름을 부르고 난리예요, 진짜. 그러지마 치홍이, 제발.
상대가 허락하지 않은 감정을 일방적으로 주는 것은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 2000년대에는 그게 순정이고 박력이었을지 몰라도 2020년대에 그것은 받는 쪽에서 힘겨워지는 부담이고 폭력일 수 있다.
나의 인생 드라마 중 하나인, 이쯤 되면 보는 것마다 인생 드라마인 것 같지만, 어쨌든 정말 TOP5 안에 드는 드라마 중 하나인 <사랑의 온도>의 두 주인공도 연상연하 커플이다.
(SBS/ 극본 하명희 연출 남건/서현진, 양세종, 김재욱, 조보아 주연)
현수(서현진 분)와 정선(양세종 분)은 첫눈에 반한다. 정선은 거침없이, 하지만 차분하게 마음을 고백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걸 확인한다. 그리고 정선은 현수에게 유학을 다녀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하지만, 현수는 그 제안을 거절한다. 그녀는 29살의 보조 작가였고, 먹고사는 문제가 더 시급했으며,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시시한 사랑에 청춘을 바칠 수는 없다는 그녀의 말에 정선은 깔끔히 돌아선다. 매달리지 않는다. 울고 떼쓰지 않는다. 현수보다 6살이나 어리지만, 전혀 어린 티가 나지 않고 어른스럽게 현수를 놓아준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연하남들은 이런 식으로 발전해왔다. 드라마는 픽션이지만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상대의 의사를 파악하지 않는 일방적인 애정 표현은 범죄가 될 수 있는 시대이고, 사랑하는 여자를 쟁취하고 싶어 무작정 들이대는 감성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아니 그니까, 왜 이상하게 남자가 어린 커플은 다 반말을 하지요? 여자가 어리면 '오빠'라고 하는데요? 동방예의지국의 청년들 답게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그만큼 대접을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예?
이런 나의 꼰대 마인드를 알아채기라도 한듯이 최근에 등장한 많은 드라마들은 아예 제목에 연상녀를 의미하는 단어를 때려 박기 시작했다.
정해인 배우를 많은 여성의 이상형으로 만들어버린 드라마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제목만 봐도 여자가 더 나이 많은 커플이 등장할 것이며, '누나'라는 호칭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다. 준희(정해인 분)는 귀여움으로 상징되는 연하의 매력을 다 가지고 있다. 질투에 불타오르거나 애교가 넘치는 모습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스물스물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를 미친 듯이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면 동생 친구고 나발이고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남자가 그 와중에 정해인이여. 끝났지 뭐.
드라마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 역시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에서는 특히나 나이뿐만 아니라 사수와 부사수라는 직급체계까지 부여하면서 더더욱 연하의 이미지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물론 갑자기 입술을 쓰다듬거나, 이름을 부르면서 슬슬 기어오르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래도 선을 넘지는 않는다(짜식). 당연히 배우가 잘생겨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극 중에서 현승(로운 분)이 자신의 마음을 알린 후에도 조급하게 몰아붙이지 않기 때문에 시청자의 입장에서 부담스럽지 않게 드라마를 볼 수 있다. 회사에서는 공과 사를 구분해 열심히 일하고, 그러면서도 뒤에서는 잘 챙겨주면서 송아(원진아 분)에게 마음을 달라 떼쓰지 않는다.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상황을 지켜본다.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선배가 원하는 거리에 있겠다 말하며 가끔 훅 들어와 설레게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물론 드라마가 끝날 때쯤에는 '선배'라는 호칭도 개나 줘 버리겠지만, 지금은 2021년 버전의 올바른 연하남 루트를 걷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부담스럽지 않게, 적당히, 딱 그 정도만.
언제나 여자들은 사랑에 대한 환상을 지켜왔다. 똥차가 간 뒤에는 벤츠가 온다는 여자들끼리의 위로 문장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똥차가 간 뒤에 쓰레기차가 온다거나, 아무도 오지 않아 혼자 걷는 경우도 많다. 벤츠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그냥 내가 볼보를 사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는 세상이다. (왜 볼보냐면, 제가 사고 싶거든요. 힛)
그렇다고 환상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내 인생에 로맨스는 없을 거라는 상상은 얼마나 절망적인가. 현실에 잘 생기고 나만 바라봐주는 귀여운 연하남이 어딨냐며, 드라마가 여자들을 다 망쳐놓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너나 잘 사세요.
먹고살기도 팍팍해 죽겠는데, TV에서까지 아등바등 사는 모습만 봐야 돼요? 남편이 바람피우고 내연녀가 눈 부라리는 모습만 봐야 돼요? 울화통 터진다 정말. 현실에 현승이나 정선이 같은 남자가 없다고 해서 마음의 문을 닫을 수 없다. 비단 여자들뿐만이 아니다. 남녀 구분하지 않고 때로는 드라마를 보며 현실을 위로받을 수 있다. 그리고, 혹시 알아요? 진짜 우리들 인생에 어리고 잘 빠진 볼보가 나타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