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쉬고 싶은 마음에 잘 보지 않는 TV를 켰다. KBS 열린 음악회에 최백호 님이 나왔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 매일 그림을 그리고, 라디오 프로그램도 하고 있다는 기사를 최근에 접하고 놀랐던 터라 더반가웠다.
희끗희끗자연스러운 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멋졌다. 몇 년 전 코로나로 우울했을 때 최백호 님이 내레이션을 맡은 다큐를 본 적이 있다. 바닷가 노부부의 이야기에 그의 깊은 목소리와 노래가 더해져 풍덩 빠져들었다. 푸른 바다 뗏목 위에서 부부가 노 젓는 엔딩 장면에 '길'이 흘러나왔을 때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했다.
실연의 달콤함도 모르고 도라지 위스키를 본 적도 없는데 '낭만에 대하여'는 나를 추억 속으로 끌고 간다. 타임머신을 타고 노래 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바다 끝'을 눈 감고 들으면 순간 이동해서 망망대해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목소리의 힘, 이야기의 힘이 조용하지만 세다. 목소리가 근사한 사람, 이야기가 있는 사람에게 나는 무작정 끌린다.
퍼포먼스도 화려한 의상도 없이 가만히 서서 노래를 불러도 무대가 꽉 찼다.신곡 '책'은 단순한 제목부터 신선하다. 노래라기보다는 마주 앉은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에 가깝다.
최백호 노래 '책'
책을 읽으면 머리카락 몇 올이 돋아나는 것 같아,
아주 큰 무엇은 아니고 딱 그만큼만 아주 작은 그만큼만
그래도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신발 끈을 조여매는 힘은 생기지
노래도 그래
먼 기적소리처럼 가슴 뛰던 젊은 날의 울림은 아냐
그냥 헌 모자 하나 덮어쓰고
바다가 보이는 언덕으로 가고 싶은 정도이지
책을 읽으며 노래를 들으며 아직은 눈물 흔적 지우고 살아
내가 그래
너는 어때?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첫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를 펼쳤다. 그를 닮은 나무와, 어머니 같은 바다 그림이 있는 책에는 축구, 만화, 그리기를 사랑하는 열정적인 최백호가 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가수 최백호는 환갑이 돼서야 화가의 꿈을 이루었지만 멈추지 않는다. 프랑스 남부에 가서 그림을 그리는 꿈도 품고, 여든이 되고 아흔이 되어도 노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부를 노래는 무엇일까 기대가 된다고 한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젊은 날의 낭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보니 낭만은 잃어버린 게 아니라 과거에 내가 사랑했던 것, 그리고 지금 내가 좋아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찾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