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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툰자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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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툰자 Apr 06. 2023

매운맛이 아니라 따뜻함으로

생강을 심어 놓고 떠나신 이유

요즘 날씨가 내 기분처럼 변덕스럽다. 지난주부터 아들은 여름 교복을 꺼내 입었다. 주말에 만개한 벚꽃을 보러 갔더니 많은 젊은이들이 벌써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꽃들도 일찍 찾아오고 꽃샘추위는 없나 보다 그랬는데 이틀 내내 봄비가 내리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산책을 나갔다가 손이 시려 혼났다. 얼굴과 상체는 열이 많은데 유독 손발이 차다. 이불속에 한 시간 먼저 들어가 있어도 나중에 들어온 사람보다 더 차가울 정도다.


친구 선영이도 손발이 차서 생강차를 자주 마신다고 했다. 생강청을 한꺼번에 만들어 놓고 1년 내내 차로 마시는데 효과가 있다고 여러 번 권했다. 하지만 나에게 생강은 따뜻함이 아니라 '매운맛'이다. 차로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양념으로 사용하지만 마늘이면 몰라도 생강은 넣어도 그만이다. 그래서 2년 동안 냉동실에 잠들어 있는 생강을 잊고 지냈다.


"어머니, 대나무 잎처럼 생긴 저건 뭐예요?"

"막내는 여태 생강도 몰랐냐?"

"우리 고향에는 인삼은 흔해도 생강은 없었어요."

"서리 내리는 상강 지나면 생강을 캐니까 그때 와서  봐라."


결혼한 그해 추석에 시댁에서 난생처음 푸른 생강잎과 줄기를 보았다. 상강이 지난 11월 초, 부모님께 점수도 따고 일손도 보태려고 혼자 시골에 갔다. 생강을 뽑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했지만 흙을 털고 줄기를 다듬어 자루에 담는 일은 허리도 아프고 만만치 않았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밭에서 일하다 보니 손발도 시리고 코도 매웠다. 일은 밭에서 끝나지 않았다. 무거운 생강 자루를 옮겨 생강굴에 넣어야 했다. 처음 마주한 생강굴은 우물처럼 깊어 보였다. 아버지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자 어머니는 두레박을 내리듯 끈으로 묶은 자루를 아래로 보냈다.


고된 일이 끝났을 때, 아버지는 생강굴에서  포도주를 꺼내왔다. 서늘한 땅속에서 숙성된 포도주는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매운 생강 대신 달달한 포도주로 생강굴을 다 채우면 좋겠다고 상상하는데 어머니가 한숨을 토했다. 봄에 굴에서 꺼낸 생강이 절반 넘게 썩어서 속상했다고. 겨울잠을 잔 생강이 건강하게 나와 귀한 대접을 받으면 좋겠지만 썩어서 버리는 게 많을 때는 값이 좋고, 건강하게 나온 해에는 값이 헐하다고 했다. 품값도 안 나오는 생강농사는 그만둬야겠다 하시더니 거짓말처럼 도시로 이사 온 뒤에도 이어졌다.


시멘트로 덮은 마당에 텃밭은 없었다. 작은 화단뿐이었는데 꽃 대신 어머니는 고추와 가지, 대파를 심고 그것으로는 성이 안 찼는지 하얀 스티로폼 상자와 빨간 고무통에 생강을 심었다. 해마다 생강밭은 늘어만 갔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옥상에도 화분마다 생강이 자라고 있었다. 종자가 되는 엄마 생강이 있으니 얼마든지 밭은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2020년을 끝으로 생강농사는 멈췄다.  그해 유월  갑자기 쓰러지신 후 어머니는 영영 깨어나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심은 마지막 생강을 거둔 뒤 생강밭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어머니 산소 이장과 제사 문제로 생강처럼 매운 시간을 보냈다. 사실 매운 것은 맛이 아니라 통증이다. 명절이나 어머니 기일이 다가오면 잠이 안 오고 가슴이 답답했다. 내내 아버지 걱정을 하다가도 형제들이 떠오르면 삐딱해지고 마음이 얼어버렸다. 그래서  냉동실을 열 때마다  꽁꽁 얼어버린 생강을 애써 외면했는지 모른다. 친구 말대로 생강차가 몸을 따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면 따뜻해진 몸이 마음을 녹일 수 있지 않을까. 차례상에 올렸던 대추와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생강을 냉동실에서 꺼냈다. '보글보글 끓여서  차로 마시면 손발부터 온기가 돌고 서서히 가슴도 따뜻해질 거야. 어쩌면 어머니가 생강을 심어 놓고 떠나신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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