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단상] 예술에 대한 정의
# 1.
'나는 그림 볼 줄을 몰라서...'
'클래식은 졸린 거 아닌가?'
'전통예술은 옛날의 것이지.'
# 2.
어떠한 것을 예술작품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결정될까?
예술가는 어떻게 인정받게 되는 걸까?
# 3.
예술 그 자체는 너무도 복합적인 것인지라 만족할 만한 정의 역시 대단히 복합적일 수밖에, 다시 말해 수많은 특성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플라톤 이래의 수많은 예술 이론가들이 예술의 본질을 발견하려 애를 썼고 이를 통해 예술의 정의를 구성하고자 해왔다. 물론 현재도 그러하다. 즉 아주 폭넓고 다양한 견해들이 표명해왔으며 서로 다른 방책들이 장르, 양식, 시대, 문화 등등의 차이를 수용하고 반영하는 것이라는 정도의 결론은 내릴 수 있겠다.
1. 모든 예술은
항상 기능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상당한 역사 동안 미적 생산 과정은 기능의 일부였다. 숙련공은 무언가를 만들며, 그들이 만든 것은 때때로 예술이기도 했다. 모든 것은 작가에 의해 의도될 수 있다. 하지만 미적 대상이 용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미적 대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 그 용도에서 출발하지는 않는다. 예술작품은 이런 점에서 실용적 대상과 구별된다. 또한 예술작품과 미적인 것에 대한 고대 이론은 소위 참여 미학에 의존한다. 미적 대상과 미적 경험은 수용자들이 더 고귀한 것, 더 중요한 것 혹은 더 가치 있는 것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즉 ‘의도’를 가지고 미적인 것을 만들어, ‘참여’한 수용자에 의해 예술가와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2.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이란 논문에서 자신의 예술철학을 펼친다. 예술작품의 근원이 어디인가에 대해 물으면서 그는 예술과 예술가, 작품 모두가 서로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이는 하이데거의 논리는 순환논법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예술가이니까, 작품의 근원이 예술가라고 한다. 거꾸로 예술가가 진정한 예술가가 되는 순간은 자신이 만든 작품을 통해서이니까 예술작품이 예술가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예술이 도대체 무엇인가가 해명되어야만 예술작품이 해명되어 예술가의 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은 진리의 작품 속으로의 정립이 아니라 ‘진리가 발생하는 방식’으로 대한다. 작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오로지 예술의 본질에서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작품에서 예술로 향하는 발걸음과 예술에서 작품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순환이 된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미학은 예술가 미학이 아닌 작품 미학의 성격을 띠게 된다.
3. 아도르노에게
가장 자율적인 예술도 실상 사회성을 띠게 되고, 예술가는 자신의 의식과는 무관하게 사회의 기관원으로 활동한다는 것인데, 예술가 자신이나 그 다루는 형식, 재료, 소재 이 모두 이미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예술과 사회의 관계는 작품 내의 사회적 내재성이다. 결국 예술작품은 하나의 개념 아래 놓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과 비평을 통해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 작품으로부터 추출되어야 한다. 현대의 예술작품들은 현대의 사회적 상태의 미메시스이다. 그러나 이는 ‘반영’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부정적 상태는 작품 속에 내용으로 재현되는 게 아니라 추상적으로 변한 그 형식 속에 침전된다. 예술은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사회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사회와 거리를 두고 그것과 급진적으로 다른 타자로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4. 데리다에게
작품의 진리는 결코 작품 속에 한 번에 현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 속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한다. 데리다에게 예술은 더 이상 현실의 재현이 아니다. 예술이 모방해야 할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방의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작품에 대한 최종적, 결정적 해석도 있을 수 없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관점주의, 즉 하나의 예술작품이 열어주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다. 해석자와의 만남 속에서 새로이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생성해내는 예술작품의 끊임없는 미적 창조력. 바로 거기에 예술작품의 진리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예술작품은 ‘해석학적 대상’이 아니라 ‘개념화될 수 없는 것의 보존’이다.
5. 잉가르덴은
미적으로 적절한 언급이 예술작품의 공적인 확인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감지하면서,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수용자들이 실제 예술작품의 어느 정도 체계화된 구조에 근거하여 정당하게 내릴 수 있는 감식력 있는 판단의 다양성을 수용하고자 했다. 따라서 잉가르덴은 예술작품을 역사적으로 변천해 온 감식력 있는 수용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개발해 낸 구성물로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잉가르덴은 개별적인 예술작품의 동일성을 고정하기 위해서 예술작품이 비록 수많은 수준의 요소들로 구성되지만 어떤 수준은 다른 수준보다 동일성에 상대적으로 더 근본적이고 다양한 해석적 감상적 반응에 좌우되는 경향이 덜하다는 입장을 지지했다.
6.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예술의 사회적 기능 가운데 하나가 특정 계급을 사회적으로 다른 계급과 구별 짓는 장치 혹은 사회적 자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술은 이렇듯 구별 짓기를 위한 문화적 자산이었던 셈이다. 사회가 상위계급과 하위계급으로 계층화되어 있는 한 그들이 향유하는 문화는 다른 계급의 것과 달라야 했다. 상위계급은 자신의 문화를 우월한 것으로 간주했을 뿐 아니라 아예 문화 자체를 자신들만의 소유물로 여겼다. 말하자면 하위 계급의 문화는 문화 범주에 끼지도 못한 것이다.
7.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은
변기 그 자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변기가 전시되고 그 전시 행위 속에 내포된 조롱의 제스처로서의 속성, 그리고 이런 전시가 불러올 관람객의 반응 등속과 관계되는 것 까지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관람자의 반응이 예술작품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리히덴슈타인이나 앤디 워홀 같은 팝아티스트는 가장 대중적이고, 상업적으로 예술을 다가가려고 하였다. 이는 곧 사회 속 대중 들이 늘 접하고 친숙한 예술로서 소통을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리히텐슈타인은 당시 가장 널리 유행하던 디즈니 만화의 한 장면을 순수예술의 이미지 표현방식으로 만들었다. 더군다나 그가 그린 그림에는 진짜 만화같이 말풍선도 들어 있다. 앤디 워홀은 더 적극적으로 상품의 이미지들을 그 자체로서 예술작품으로 묘사한다. 그는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 마 렐린 먼로의 사진을 실크 스크린을 이용해 표현했고, 레닌과 마르크스 같은 정치가 역시 대중적인 이미지로 표현했다. 심지어 당시에 가장 대표적인 소비상품이었던 통조림의 상표나 코카콜라 상표까지 작품의 이미지로 표현했다. 이러한 시도에는 순수예술의 이미지와 대중적 이미지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밝히고 소비가 중심이 된 오늘날의 대중사회에서 순수예술을 고집하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예술가의 자기도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지 앞에서 이미지를 관조하던 수용방식은 이제 지나간 방법론이 되었다. 이제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들은 대부분 평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공간으로 주어진다. 따라서 수용자들은 이미지 밖에서가 아니라 이미지 공간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매체를 자유롭게 사용하여 스스로 작업을 해내고 있다. 이렇듯 예술가와 관람자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예술의 개념 자체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과거에 예술이 특별한 사람들만 누리는 특정한 대상이나 능력으로 취급되었다면, 대중사회에서 예술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일상인 모두의 것으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