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핀 호퍼와 에드워드 호퍼
어쩐지 텅 빈 듯 느껴지는 공간 속, 무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인물들은 함께 있어도 쓸쓸한 느낌을 자아낸다. 애드워드 호퍼는 주로 도시 속 공간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담아낸다.
그가 살아갔던 미국은 빠르게 이루어진 산업화로 인해 물질적 풍요를 얻게 됐지만 경제 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고독감과 회의감에 가득 차 있었다. 이를 잘 나타내는 그의 작품은 미국 사실주의를 대표한다고 평가받는다.
에드워드 호퍼와 조세핀 버스틸 니비슨은 뉴욕예술학교의 동급생이었다.
그들은 40세가 넘은 시기 항구도시 글로스터에서 다시 만났다. 이미 수채화로 촉망받는 화가였던 조세핀은 호퍼에게 수채화를 가르쳤고 그녀의 도움으로 1923년 호퍼는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수채화 작품들을 선보였다. 전업 화가를 희망했지만 1913년 첫 작품 판매 이후 10년간 작품을 한 점도 팔지 못했던 호퍼는 이 전시로 호평을 받았고 1924년 뉴욕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모든 작품을 판매했다.
호퍼가 42세, 조세핀이 41세던 1924년 둘은 결혼했다. 결혼 후 조세핀은 자신의 작업보다 호퍼의 조력자로 살아갔다. 호퍼의 그림 속 여인들의 유일한 모델이 바로 그녀이다. 둘은 연극과 여행을 통해 영감을 받았고 토론을 즐겼다. 뿐만 아니라 조세핀은 호퍼의 작품과 활동에 관련된 모든 것을 장부에 상세히 기록했으며 호퍼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작품과 자료 모두를 휘트니 뮤지엄에 기증했다.
조세핀은 맨해튼에서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선생님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성이 없었고 가족 사이의 불화를 겪었다.
1905년 뉴욕 예술학교에 입학하기 전 그녀는 뉴욕 시립 사범대학에서 예술 학사 학위를 받았고 드라마 클럽에서 그림을 그리고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뉴욕 예술학교에 입학 후 그녀는 특히 수채화로 주목을 받았고 1914년에는 미국 모더니스트들과 함께 그룹전을 열기도 했다.
그녀는 1906년부터 공립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며 10년간 생계를 유지하면서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이어갔다. 1915년에는 맨해튼에 있던 극장 워싱턴 스퀘어 플레이어스에 합류하여 배우로 공연하기도 했다. 3년 뒤 그녀는 해외로 나가기 위해 적십자사에 지원했지만 탈락했고, 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인 상황에 병원에서 일하기로 결정했지만 기관지염에 걸려 몇 달 만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5개월간 치료 후 퇴원했지만 그녀는 교직을 잃었고 무일푼 노숙자 신세가 되었다. 교회 관리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임시거처를 얻게 되었고 1년 뒤 교육 위원회로부터 다른 일을 할 권리를 다시 얻게 되었다. 그녀는 계속 가르치는 일과 예술계의 커리어를 추구했다.
하지만 결혼 후 그녀는 자신의 모든 커리어를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선택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활동을 이어나가고 싶어 했지만 호퍼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내성적인 그와 달리 활달한 성격의 그녀가 작업 외의 모든 것을 담당해 주기를 바랐다. 부부의 생계가 그의 작품으로 이어졌으니 크게 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다. 그는 조세핀의 작품을 비난했고 작업할 시간을 내어주지 않았다. 190cm의 장신이었던 호퍼가 150cm 정도의 조세핀을 때리는 일도 잦았다. 조세핀은 이를 일기에 남기기도 했다.
1938년 5월 10일
내 속치마는 무릎에서 찢어졌고 새 드레스는 더러워졌다. 그가 무릎으로 나를 마루에 눌러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는 길게 두 개의 긁힌 자국이 생겼다. 다른 때엔 내가 좋아하던 얼굴이다. 그리고 내 넓적다리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1942년 3월 8일
우리는 저녁 식사 후 상당한 열기를 가지고 싸움을 계속했다. 내가 얼굴을 한 대 맞고 냉장고 위 선반에 머리를 부딪칠 정도였다. 그가 나를 죽일 것 같았다.
조세핀은 그의 폭력을 묵인하지 않았지만 떠나지도 않았다. 이를 두고 '스톡홀름 증후군'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한다.
1973년 8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일어난 은행 강도사건의 인질 피해자들이 강도를 옹호하고 심지어 사랑의 감정을 느낀 특이한 심리기제로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피해자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공격자와의 동일시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지만 대신 조세핀은 호퍼의 작품들을 '아이들'로 여겼다. 호퍼가 자신의 삶을 억압하는데 경멸을 느끼면서도 대가의 작품을 함께 만들어낸다는 희열을 함께 느꼈다. 호퍼 역시 아내의 삶을 폭력으로 억압하면서도 성공을 이룬 후에도 다른 여인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80세가 넘은 후 둘은 함께 병원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호퍼는 5층에 입원해 있으면서 3층 아내의 입원실에 매일 병문안을 갔다고 한다. 1867년 호퍼는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세핀은 그의 작품을 휘트니 뮤지엄에 기증한 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조세핀의 작품 역시 에드워드 호퍼 하우스 뮤지엄 및 연구센터와 휘트니 뮤지엄에 함께 남아 있다.
2023년 4월 20일부터 8월 20일까지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전이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에드워드 호퍼의 첫 한국 대규모 개인전으로 서울시립미술관과 뉴욕 휘트니 뮤지엄이 4년간 공동 기획했다. 조세핀 호퍼가 기증한 2500여 점의 작품과 R. 산본 호퍼 컬렉션 트러스트가 보유한 4000여 점의 아카이브까지 호퍼 전 생애에 걸친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조세핀 호퍼의 섹션을 따로 구성하여 그녀의 역할을 조명하였다.
이 전시는 2023년 8월 6일 기준으로 일평균 약 3000명 총 약 27만 5000명의 관람객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