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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별 Jan 07. 2024

밑줄이냐 인덱스냐, 그것이 문제로다

실천18. 책과 대화하기

블랙윙 연필, 책, 그리고 나... 지금 우리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다. 책이랑 나는 그동안 무리 없이 잘 지내고 있었는데, 내가 난데없이 고급 연필과 함께 나타난 탓이다. 그런데 나도 막상 연필을 데려와 무엇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지 않아서 그만 정적과 고민 속에 파묻혀버렸다.




'물건을 모시고 다니기 싫다'는 생각에 휘뚜루마뚜루 사용하기 편한 에코백, 중저가 브랜드 옷을 즐겨 찾는다. 저렴하다고 해서 건을 함부로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관리가 쉽고, 얼룩이 묻거나 잃어버려도 엄청 속상하지 않을 정도의 무게감이 나에게는 딱 좋아서 그렇다.


한 가지 예외가 바로 책인데, 책은 가격고하를 따지지 않고 굉장히 조심스럽게 보는 편이다. 책등에 주름이 갈까 봐 책을 쫙 펼쳐보지 않고, 쩌다 책을 떨어뜨려서 표지가 구겨지거나 모서리가 찌그러지기라도 하면 너무 속상하다.  책에 밑줄 긋거나 메모하는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밑줄 대신 인덱스를 붙이는 경우를 제외하면, 책의 외관만 봐서는 내가 읽은 책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다.


원래도 물건을 깨끗하게 사용하는 편이지만, 알라딘 중고서점의 등장 이후 유독 책을 다루는 자세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고 생각한다. 책을 살 수 있는 돈은 한정되어 있고 읽고 싶은 책은 너무나 많기에 갖고 있던 책을 팔아 새로운 책을 살 때가 종종 있다. 중고서점에 책을 판매할 때는 밑줄 하나, 접힌 자국 하나로 등급이 달라지기 때문에 애초에 모든 책을 새 책처럼 남겨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팔 생각이 없는, 내가 끝까지 품고 갈 책들에는 밑줄도 긋고 메모도 남겨도 되지 않을까? 글쎄... 그게 잘 안된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에 인덱스를 붙이거나 투명 포스트잍에 메모를 적어 붙여두는 정도인데 인덱스를 찾고, 포스트잍에 따로 뭔가를 적어 붙이는 과정이 독서흐름을 방해할 때가 많다. 그래서 결국 그냥 읽어나가다 보니 내 최애책들도 거의 새 책과 같은 상태이다.




크리스마스에 받은 블랙윙 한 자루,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 10가지 해보기'라는 어떤 작가님의 새해다짐이 나를 책과 연필 사이의 절뚝이는 2인 3각으로 이끌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라서 가제본, 정식출간본 모두 가지고 있는 책의 가제본첫 의식의 제물로 삼았다. 맨 앞장에 '2024년 1월'을 적고 책장을 넘기며 마음 걸음을 멈추게 하는 문장들에 밑줄을 긋는다. 한 단락, 한 페이지 전체가 마음에 들면 [ ]로 묶거나 페이지 숫자에 동그라미 표시를 한다. 웃긴 장면에는 ㅋㅋ를, 마음을 울리는 문장에는 ㅠㅠ도 적어본다.


엄마 몰래 계산기로 산수 문제를 풀 때 느꼈던 알 수 없는 짜릿함 비슷한 것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다. 이게 나쁜 일이 아닌데, 내가 갖고 있던 금기를 깨는 일이라서 그런 것 같다. 무엇보다도 2024년의 1월 어느 날의 나를 책 구석구석에 남겨두는 기분이다. 언제든 뗄 수 있는 인덱스나 포스트잍과는 다르다. 책이라는 물성을 가진 작은 타임머신에 밑줄과 글자의 형태로 나를 싣는다. 3년 뒤, 혹은 10년 뒤 이 책을 다시 펼쳐보면 오늘의 나를 (정확히는 내 생각과 감정을) 만날 수 있겠지.


무엇보다 책과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지금껏 유리막을 사이에 두고 바라만 보다가 이제야 제대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달까, 서로 얼굴만 알고 지내던 데면데면한 사이에서 금씩 속마음을 꺼내놓는 사이가 되었달까.  고민에 빠트린 연필의 등장이 오히려 책과 나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 줄 것 같다. 연필을 통해 나는 책장에 내 마음을 새기고, 책은 내 마음에 아름다운 글귀를 새길 수 있다. 어색한 삼자대면으로 시작한 2인 3각을 통해, 책은 소중히 모셔야 하는 존재에서 내 옆에 두는 친구가 되었다. 시 서로 부대끼면서 친해지는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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