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구하고도 오랜 시간 뚜벅이로 지냈다. 취업 후 출퇴근길을 생각하며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운전면허를 따두었는데, 막상 운전할 수 있는 시기가 되니 도로를 씽씽 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조화롭게 달리고 멈추고 차선을 바꾸는 일을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흘렀다.
셔틀버스와 튼튼한 다리에 의지해 출퇴근을 반복하다가 첫째 입학과 함께 휴직원을 제출했다. 그리고 중고 소형차를 구입했다. 내가 집에 있고 아이가 학원에 다니지 않는 시기를 좀 더 자유롭고 쾌적하게 보내고 싶었고, 그러려면 차가 필요했다. 보통 직장 때문에 차를 사는데 휴직하면서 차를 사다니 특이하다는 주변사람들 반응도 많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남편에게 운전 연수를 받고도아이와 함께 이동해야 하는 경로는 남편을 옆에 태우고 꼭 미리 운전답사를 다녀와야 안심이 되었다.
운전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평행주차라도 하게 되는 날이면 D와 R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제발 제발'을 쉴 새 없이 중얼거리지만, 아이의 학교로, 집 근처 박물관으로, 근교의 숲으로... 버스 시간이나 택시비 걱정 없이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시작은 아이와 편안한 이동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점점 나를 위한 목적으로도 차를 이용하게 되었다. 버스 시간과 맞지 않아 망설이던 새벽 그림책 모임도, 다른 도시에 사는 출산을 앞둔 친구를 방문하는 일도 수월해졌다. 이 시대에 선녀가 있다면 그가 잃어버린 날개옷은 자기만의 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가 나에게 안겨준 자유로움을 아끼게 되었다.
왕복 2시간 정도 걸리는 출퇴근 시간에 내 차는 나만의 작은 파우더룸이자 스터디룸이자 도서관이 된다. 집에서 화장을 미처 마무리하지 못하고 나온 날에는 빨간 신호가 반갑다. 서둘러눈썹도 그리고 립글로스도 바른다. 입으로는 영어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문장을 따라 해 보고, chat GPT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다 지치면 오디오북을 듣는데, 작가가 쓴 글을 성우의 해석을 통해 귀로 듣는 독서는 또 다른 체험이 된다.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해서 차에서 책을 읽기도 한다.
또 콜센터이자 노래방이자 명상센터도 되는데 며칠에 한 번씩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하기도 하고, 동생과 마음 편히 수다를 떤다. 직장에서 지친 하루를 보낸 날은 신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기운을 내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5분 정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에 올라간다.
아직도 생각나는 어린 시절 한 장면이 있다. 엄마는 차 뒷자리에 나와 동생을 태우고 바람을 쐬러 가자고 했다. 어린 마음에도 엄마가 너무 속상하고 힘든 상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딘가로 달리다 갓길에 차를 세운 엄마는 같이 소리 지르기 놀이를 하자고, 큰 소리로 노래를 들어보자고, 창밖에 예쁜 하늘을 보며 잠시만 조용히 있어보자고 했다. 우리가 보지 못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엄마는 분명 울고 있었다.
운전을 못하는 아빠의 출퇴근을 돕기 위해 구입한 그 빨간 차는 그 순간만큼은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었을까. 울다가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집을 향해 U턴할 때, 사실 엄마는 그대로 어딘가로 쭉 달려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비록 멀리 가지는 못했지만 그때 엄마에게 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 자라면서,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이후에도 몇 번이고 곱씹어 본 순간이다.
30년 전 엄마의 세피아처럼 나에겐 2015년식 모닝이 있다. 긴장감을 안겨주던 이동수단에서 바퀴 달린 서재로 변신한 나만의 타디스(드라마 '닥터 후'에 나오는 전화박스 모양 이동장치). 예쁜 조명이 놓인 1인용 나무 테이블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나로서 편안히 쉴 수 있는 은신처. 이런 식으로 '자기만의 방'을 마련할 줄은 몰랐는데.
오늘 오후엔 뒷좌석에 아이들을 태우고 자동세차장에 다녀와야겠다. 나만의 쉼터에서 아이들을 위한 놀이기구로 변신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