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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별 Jun 16. 2024

씁쓸함에 설탕 한 스푼

실천25. 모난 마음 글쓰기로 다독이기

교실 나무 바닥이 갈라진 조각이 손톱 옆을 깊이 파고들었다. 체육대회 날 더운데 고생한다고 아이들에게 사준 설레임 뚜껑들이 교실 바닥에 뒹굴고 있어서 그걸 줍다가 그랬다. 제법 큰 조각이라 손톱으로 당기면 빠질 것 같아 아픈걸 꾹 참고 몇 번이고 혼자 뽑으려다가 결국은 보건선생님을 찾아가 나무 조각을 뽑고 소독약을 발랐다.

 

아침 조회시간에 전달한 내용이기는 했다. 점심을 먹고 교실에서 쉬고 있으면 아이스크림을 나눠주겠다고. 체육대회날이라 주문이 밀려 혹시 제 때 배달이 안될까 봐 아침 일찍 학교 앞 아이스크림 판매점에 주문을 넣고, 배달 시간과 장소도 재차 확인했다. 오전 경기 이후 점심을 안 먹는 학생은 없는지, 목발 짚고 다니는 ㅁㅁ이는 배식을 잘 받았는지, 자꾸 지정좌석을 벗어나 다른 반 친구들과 밥 먹으려는 ㅇㅇ이가 뒤늦게 밥 먹는 것까지 확인한 뒤 내 점심은 마시듯 먹고 서둘러 교실에 올라가 보니 이미 뜯긴 아이스크림 박스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교실에 남아 아이스크림을 먹던 몇몇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편하게 쉬고 싶은데 갑자기 담임이 찾아온 것이 불편했는지, '선생님 여기 계속 계실 거예요?' 묻는다. 교실에 굴러다니는 과자 봉지 몇 개와 빈 아이스크림 박스를 들고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었다. 교실을 빠져나오는데 괜히 뒤통수가 화끈거렸다.


점심을 먹고 1시부터 시작된 경기는 두 시간 넘게 진행됐는데, 모든 경기에서 탈락한 우리 반 아이들은 달궈진 오후의 열기 속에 운동장 스탠드에 그저 앉아있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어 안쓰러워 보였다. 뭐라고 말이라도 붙여볼까 싶어 다가서는데, 몇몇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옆 반을 가리키며 '선생님, 저희도 포카리스웨트 마시고 싶어요!' 한다. 목마르고 힘드니까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 한편에 바람이 휑-하고 지나갔다. '아이스크림 감사해요.' 인사 한 마디도 없더니 맡겨둔 물건 찾듯이 음료수를 요구하는 녀석들을 향해 마음이 뾰족해지는 게 느껴져 점수확인을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폐회식 이후에는 각 반이 앉았던 자리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줍고 뒷정리를 해야 하는데, 땡볕에서 졸업사진까지 찍느라 인내심이 바닥난 많은 아이들이 순식간에 휴대전화만 챙겨서 사라져 버렸다. 운 나쁘게 내 눈에 띈 아이들을 남겨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선생님, 이쪽에도 쓰레기 있어요.'라며 손가락으로 쓰레기를 가리키며 날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래도 도망가지 않고 뒷정리를 도와(?) 주는 것이니 고마워해야 하나.


아이들이 하교한 후, 복도에 찍힌 운동화 발자국을 지우며(체육대회날은 많은 아이들이 운동화를 신고 교실을 오간다. 높은 확률로 그들의 손에는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이 들려있고, 또 꽤 높은 확률로 복도나 교실에 흘리고 사라진다.) 오늘 나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 사주는 사람, 음료수 안 사준 사람, 쓰레기 치우는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선생님께 투정 부리듯 이야기하니, "음, 그걸 다 더하면... 선생님이네, 맞네." 하신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니, 더욱 부모의 마음으로 학생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할 때 무언가를 바라고 하는 게 아니라, 걱정되고 안쓰럽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음에서 이런 말 저런 행동을 하게 된다. 아니, 솔직히 그건 아닌가 보다. 바라는 게 없으면 섭섭한 마음도 없어야 하는데 솔직히 좀 서운하고 씁쓸했다. 내 아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웃고 울었던 것처럼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들이 써준 따스운 편지 한 통, 싸늘한 눈빛 한 번에 내 마음도 솟구쳤다가 곤두박질칠 때가 많다.


어른이 되면서 머위나 두릅처럼 쌉싸름한 맛이 나는 나물도 제법 즐기고 '인생의 맛'이라며 소주잔도 비울 수 있게 되었지만, 이렇게 일상 속에서 불쑥 뒷맛이 씁쓸할 때는 그 시간을 되새김질해 토해낼 수도 없고 물로 헹굴 수도 없어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마음들을 구시렁거리며 몇 마디 울퉁불퉁한 말로 뱉어내고 잠들었다가 또 다른 날의 씁쓸함을 마주치는 일의 반복이었다. 커피 얼룩이 말라버린 커피 필터 위에 쓰디쓴 커피를 몇 번이고 다시 내려마시는 기분이랄까.


체육대회는 지난달에 있었고, 쏟아내듯 스크린에 옮겨둔 날 선 글자들을 한 달여 뒤 다시 들여다보고 다듬다 보니 이게 그렇게 속상할 일이었나, 반대로 내 눈빛 한 번에 아이들 마음도 오르락내리락할 수도 있었겠구나, 혼자 꽁하지 말고 '이럴 땐 감사인사를 하는 거야, 다음엔 함께 뒷정리를 하자'라고 알려주면 되지, 혼자 교무실 뒷정리하시는 학년부장 선생님 입장에서는 나도 쓰레기를 가리키며 서있는 학생이겠구나, 다음엔 내가 교무실 쓰레기를 비워야지. - 하는 생각들에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모난 마음을 그때그때 정리하지 않으니 계속 생채기가 생기는 것이었을까. 쓴 커피로만 느껴졌던 어떤 일들이 글쓰기를 통해 다방커피처럼, 라떼처럼 변하는 경험 덕분에 아주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게 된다.


신규교사 때 몸이 굳을 만큼 당황하거나 퇴근 후 펑펑 울었던 일들을 지금은 조금 더 여유 있게 받아들이게 된 것처럼, 내공이 쌓이다 보면 웬만한 일들은 글쓰기라는 후처리를 거치지 않아도 그 자체의 달콤 쌉싸름한 맛을 음미할 수 있게 되려나. 시간을 앞당길수는 없으니 일단 책상 위에 놓인 카카오함량 84%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몸을 먼저 단련시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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