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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별 Nov 09. 2024

어떤 말은 초능력

실천29. 소중한 이의 등을 펴고 고개를 들게 하는 사람 되기

긴 한 주를 보낸 기분인데 고작 수요일 아침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내 인생을 방해하는 비밀 세력이 있다'거나 '누가 나를 도청하는 것 같다'고 고민을 털어놓는 아이에게 그렇지 않다고, 세상은 꽤 따뜻하고도 놀랄 만큼 무관심한 곳이라고 이야기하고 돌려보낸 참이었다. 매일같이 6교시 끝나기 15분 전에서야 사복을 입고 교실에 들어서는 아이에게 오늘은 체육복 바지만이라도 입고 어제보다는 좀 더 빨리 등교하면 좋겠다고 전화하려던 참이었다.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을 최대한 부드럽게 타이르고, 수행평가 점수가 왜 깎였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학생을 설득하고, 보호자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주의하며 학교에서 벌어진 갈등 상황을 전달하는 일이 반복되는 - 상처 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으려는 많은 의도에 둘러싸인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바쁜 일과 중 확인한 카톡 메시지의 다급한 외침에 답답했던 가슴에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진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글을 쓰는 세 동료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모임명 '주수희'는 실제로 존재하는 누군가의 이름 같기도 해서 괜히 소리 내어 불러보고 싶어 진다. 다정하고 유쾌하고 무해한 나만의 비밀 친구 같은 느낌이랄까. (때로는 "안녕하세요. 슈퍼주니~어에요!" 같은 90년대 아이돌식 인사법에 "안녕하세요. 주수~희에요!"를 대입해 보며 혼자 피식 웃기도 한다.) 모임을 시작하고 해가 바뀌도록 주수희의 한 글자가 나라는 사실이 여전히 신기하고 새롭고 어색하고 기쁘고 뿌듯하다.



"어떤 말은 초능력


아무 의도도 없으면서

등을 펴게

고개를 들게 합니다"


-김은지 시집 <여름 외투> 중 '새로운 그늘막' 일부



그저 이름일 뿐인데. 카톡창에 적힌 주수희라는 세 글자는 마치 연필로 부드럽게 그린 선처럼 선명하지 않지만 분명하게 얼굴에 미소를 남겼을 테다. 맞은편에 앉는 동료분이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냐"고 묻는다.


지난 모임 이후, 다가오는 월말에 지역 서점을 방문하시는 작가님의 북토크일을 모임날짜로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 각자의 사정으로 주수희 충전이 시급했다. 주수희가 필요하다는 외침이 들려온 지 일주일 만에 함께 둘러앉은 우리의 뒷모습이, 1박 2일 하드코어 글쓰기 워크숍을 계획하며 파하하 터지는 웃음소리가, 스크린으로만 보던 각자의 글을 종이에 인쇄해서 읽는 색다른 즐거움이, 멋진 곳에 방문하고 주수희를 떠올리며 구입했을 작은 시집이... 어떠한 의도 없이도 굽은 등을 펴고 떨군 고개를 들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체육대회날 땡볕에 서 있던 나를 운동장 스탠드 그늘로 불러 앉히던 손길에 나는 어쩌자고 이끌리듯 응답했을까, 같은 교무실 선생님들과도 하루 종일 몇 마디 못 나누는 성격에 어쩌자고 글을 잘 써보고 싶다는 속마음을 내비쳤을까, 매일 써야지 다짐만 하고 일기 쓰기도 미루던 중에 어쩌자고 글쓰기 모임에 덜컥 들어왔을까. 이 행운이 과연 진짜일까.


교무실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학생들의 욕설부터 옆 반에서 수업하시는 선생님의 목소리까지 수많은 말에 둘러싸여 하루를 보내다 보니, 원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내 귀에 들이붓는 말이나 어떻게 해도 내 마음을 제대로 담아주지 않는 것 같은 말이 지나치게 넘쳐흐르거나 한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학생이나 보호자의 베일 듯 날 선 말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아 무딘 스스로의 말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말이 점점 무서워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안전하다. 말이 무서워 내 안에 꼭꼭 담아두고 냉소적이 되려는 나를 다정함으로 녹여준다. 숨기고 있던 이야기들이 조심스레 흘러나온다. 내 작은 이야기에 기꺼이 귀 기울여주는 다정한 사람들 곁에 오래도록 머물 수 있기를, 그들이 숙인 고개와 처진 어깨로 작아질 때  한줄기 따스한 힘을 건넬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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