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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늘 Jan 18. 2023

난다, 냄새가 난다

두피 샴푸와 혀 클리너를 샀다. 


<섹스 앤 더 4티> 10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정수리 냄새를 확인했다. 손날로 정수리 부분을 톡톡 친 다음 화학 약품 냄새라도 맡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코 끝을 댔다. 음, 으음? 하… 애매하다. 


10시간 전, 같이 사는 남자는 내게 모욕감을 줬다. 



*

그때 나는 부엌 식탁에서 몇 시간째 노트북을 노려 보고 있었다. 2시간 안에 끝내야지 했던 기획안은 4시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다. (<인사이드 아웃> 속) ‘슬픔이’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아니면 장난을 걸고 싶었던지 남편이 뒤에서 스윽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머리 위에 툭, 자신의 머리를 올렸다. 


맷돌 완성. 


잠시 설렜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췄고, 입 꼬리도 살짝 올라갔다. 하지만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4초? 맷돌 ‘윗돌’이 낸 소리 때문이었다. 


킁킁. 


얼어붙은 ‘아랫돌’이 물었다. 

“냄새 나?” 


굳은 윗돌이 답했다. 

“응.”


아랫돌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소리쳤다. 

“두피가 열받아서 그래!” 


연애 10년에 결혼 생활 10년. 20년을 부대낀 남자에게 전에 없던 수치심을 느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며칠씩 안 감은 머리를 그의 코에 들이미는 게 애정 표현이었는데, 그 순간엔 달랐다. 내 머리에서, 정수리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부끄러웠다. 


아랫돌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모른 채 잠든 윗돌 옆에서 핸드폰으로 두피 케어 샴푸를 주문했다. ‘한동안 탈색 전용 샴푸만 써서 그럴 거야, 단백질 샴푸가 두피를 기름지게 하더라고, 그렇지, 맞잖아, 아니야?’ 


마침 떨어진 가글도 주문했다. 입 냄새가 지독한 딸을 위해 아버지가 개발했다는 제품이었다. 몸에 쓰는 제품이니 가족 마케팅만큼 잘 먹히는 것도 없지만, 딸의 입 냄새가 지독하다니 카피 한 번 지독했다. 그 아버지는 딸 덕에 부자가 되었겠지? 입 냄새가 지독했던 딸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만약 나의 윗돌이 샴푸를 개발한다면 이런 말을 쓰려나? 정수리 냄새가 지독한 아내를 위해 개발한? 에라이. 


*

마흔 전과 후를 나누는 물건이 있다면 나는 혀 클리너를 꼽을 것이다.   


올리브영에서 혀 클리너를 산 건 J의 말을 듣고 나서였다. “혓바닥을 아무리 닦아도 찝찝해. 냄새가 가시질 않아.” 혀 클리너로 혀를 박박 닦고 있으면 종종 쌍둥이가 물었다. “엄마 괜찮아? 토하는 거 같아.” 같이 사는 남자가 양치를 할 때면 내장까지 쏟아내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혀 클리너를 쓴 후 알게 되었다. 그 ‘웩’ 소리가 얼마나 처절한 몸부림인지. 


우리 집 욕실에는 치약 칫솔 옆에 치실과 가글, 그리고 홈쇼핑으로 산 다인용 구강 세정기가 한 줄로 서 있다. 그 물건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최선을 다해 양치하시게나, 주변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나이가 들수록 지갑은 열고 입은 다물라는 말이 양치를 말한 것이었나?   


그리고 문제의 머리, 아니 샴푸. 20대 때 자주 가서 자던 뷰티 에디터 선배의 집에는 샴푸가 참 많았다. 한 번은 머리를 감고 머리카락이 너무 뻣뻣해서 물었더니 ‘풋 샴푸’였던 적도 있다. 발에 웬 샴푸? 어쨌거나 그 집에서 처음 알았다. 우리가 통상 머리라고 부르는 신체 부위에 머리카락도 있고 두피도 있듯 샴푸에는 모발 케어 샴푸와 두피 케어 샴푸가 있다는 것. 


나이가 들고 향수의 의미도 달라졌다. 20대에 향수는 ‘데이트’와 동의어였고, 30대엔 작정하고 멋 부린 날의 마무리였다. 40대는? 집 밖을 나설 때 매너다. 사정은 친구들도 비슷했다. 인위적인 냄새가 싫어 ‘살 냄새’로 20~30대를 보낸 친구들도 이제는 향수를 챙겨 뿌렸다. 껍데기집을 나설 때나 뿌리던 섬유용 탈취제는 파우치에 상비하는 물건이 됐고, 아이크림만큼이나 향수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

돌이켜 보면 젊은 날의 우리는 전날 밤의 화장과 떡진 머리를 청춘의 한 부분처럼 여겼다. 시끄러우니까 청춘이듯, 지저분하니까 청춘인 것처럼. 


여자 친구 넷이 함께 살던 시절. 광란의 불금을 보낸 뒤 나와 M은 그 누구의 응원과 지지 없이 누가 더 오래 안 씻나로 대결을 벌이곤 했다(우리는 냄새나는 여고 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였다. 교복 치마는 왁스를 칠한 것처럼 반질거리고, 체육복은 사물함에서 숙성되던 여고 말이다). 금요일 밤의 스모키 메이크업은 일요일 아침에 다크서클이 되었고, 머리카락은 리즈 시절 브래드 피트 뺨치게 떡졌다. 


그땐 그랬다. 좀 안 씻을 수도 있고, 좀 냄새날 수도 있고. 머리 안 감으면 묶으면 되고, 묶어도 안 되면 모자 쓰면 되고, 그래도 역부족이면 향수 뿌리면 되고. 


하지만 40대의 우리는 당연히 날마다 씻으면서도 혹시나 체취를 걱정한다. 언젠가부터 내 정수리 냄새가 신경 쓰인다고 하자 친구 E가 격하게 동의하며 말했다. “어디서 들었는데 귀 뒤랑 목 뒤를 잘 씻어야 된대.” 귀 뒤? 목 뒤? 러닝 차림으로 세수하던 옛 드라마 속 아버지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귀 뒤를 만지며 한참을 깔깔 대고 웃었다.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긴 나이는 아주 오래전에 끝났는데, 귀 뒤를 박박 씻는 이야기가 그렇게 웃길 수 없었다. 아니다, 웃펐다. 우리 그런 나이야? 


*

킁킁 소리에 상처받아 두피 케어 샴푸를 주문했다고 하자 윗돌은 어이없어했다. 


“뭘 또 그렇게까지? 며칠 안 감으면 냄새날 수도 있지.” 


윗돌, 그 말은 하지 말지... 전날 감았다고!  






사진 <트와일라잇>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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