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달리 Mar 22. 2020

이 연극에 커튼콜은 생략한다

인생을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마무리하는 법



  아일랜드 출생의 천재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바라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라는 것을 갖는 것이다.


 내 손에 없으면 비극적인 건 알겠는데 왜 가져도 비극이라고 하는 걸까. 우리는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당신 수중의 돈이나, 또 그 돈을 얻기 위해 다닌 직장, 혹은 용돈 주는 부모님의 경제적 형편, 당신이 걸친 옷(물론 나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 등등이 그렇다. 물론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에나 만족하며 살아라.’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런 말을 해온 사람들조차도 대단한 6천 원으로 소소한 60억을 위해 로또를 사더라고.) 대신 나는 삶에서 비극을 줄이는 법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항상 내가 가진 것은 쉽고, 남들이 가진 건 얻기 어려워 보인다. 또 나는 쉽게 가진 걸 남들은 어렵게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미 우리 수중에 있는 것은 없을 때야 대단해 보였지만 계속 내 손안에 있으니 당연하게만 보일 것이다. 내가 그랬다. 인생이 한 편의 극이라면 나의 업적을 지켜보는 관객이 ‘야, 저렇게 대단한 일을 어떻게 했지?’ 혹은 ‘저 사람한테는 쉬워 보이는데. 왜 난 안 되는 거야?’라고 우러러보길 바랐다. 내 삶의 마지막에 모두가 날 향해 박수를 쳐주고, 휘파람을 부는 상상을 했다. 파바로티에 준하는 화려한 커튼콜을 위하여, 남들이 살지 못하는 비범한 인생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다.


 그래서 이름 앞에 아무런 '수식어'가 없는 순간에 초라함을 느꼈다. 어디 명문대의 학생이나 회사의 직책이나, 사회적 위치가 없는 그냥 나. 그건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주변을 보면 다 좋은 명찰을 달고 있는 거 같았고, 나도 저걸 가져야 더 대단해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 명찰은 엑스트라 급이지만, 다음에는 단역, 그다음은 조연, 그리고 결국 주연급 명찰을 얻게 될 거야. 그리고 그것이 관객들에게 나를 증명해 주겠지.'


 다음 회차가 있고 히트를 쳐야 하는 극에서야 관객들의 반응이 중요하지만, 한 회차를 돌고 나면 관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인생이라는 극에서 화려한 커튼콜이 의미가 있을까? 관 뚜껑을 열고 무대 위에 다시 오를 것도 아닌데 말이다. 누군가의 인생을 탄생부터 임종까지 지켜보는 시간 많은 관객은 없다. 다들 자기 삶을 사느라 바쁘며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니까.





  누구를 위하여 인생이라는 극을 올리나? 남을 위한 극이 아니라면 엑스트라든 주연배우든 명찰 따위가 무슨 상관이며, 극 중간에 말을 절었는지 발을 절었는지 실수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타인의 평가라는 인생 마지막의 커튼콜 때문에 평생 남만 의식하다 죽을 수밖에 없다면 내 삶의 비극을 줄이기 위하여, 나는 그냥 커튼콜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의 내 삶은 실수와 애드립이 난무할 것이기에, 그에 대한 평은 듣지 않을 것이다. 아마 역사상으로 가장 형편없는 극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게는 비극보다 희극에 가깝지 않을까?







글쓴이의 말

위대한 비극보단 그냥저냥 희극이 좋아서요.



▼ SNS로 더 자주, 가깝게 만나보아요!

유달리의 인스타그램

유달리의 트위터


▼ 제가 쓴 <나다운 건 내가 정한다>가 출간되었습니다!

여기를 클릭 시 구매 링크로 이동

작가의 이전글 노동의 가치는 동등하지 않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