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

삶의 순간들로 완성된 단편의 힘

by 민달이

[short story]

1.

부엌에서 또 술을 한 잔 따라온 그는 앞마당에 내다 놓은 침실 가구들을 바라보았다. 매트리스가 그냥 널브러져 있었고, 줄무늬 시트들은 서랍장 위 두 개의 베개 옆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만 제외하면 모든 게 침실 안에 있을 때와 비슷해 보였다. 침대의 자기 자리 옆에는 독서용 스탠드가, 그녀 자리 옆에는 침대용 탁자와 램프가 놓여 있는 것도 방안에서와 마찬가지였다

[춤추지 않으시겠어요?]


2.

프랭크는 덩치가 컸으며, 두꺼운 누비 재킷의 지퍼를 턱까지 올리고 갈색 오리너구리 모자를 쓴 탓에 엄격한 심판 같아 보였다.


래펄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던 거위가 멈칫하더니 곧장 땅으로 떨어졌다. 거위들이 방향을 바꿀 때 패럴은 한번 더 총을 쏘았고, 방향을 바꾸기 전 거위 한 마리가 마치 벽에 부딪힌 듯, 벽을 넘어가기 위해 도리깨질을 하듯 날개를 퍼덕이다가 머리를 숙이고 날개를 늘어뜨리고 나선을 그리며 천천히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중략)... 패럴은 거위 두 마리를 은신처 안에 누인 뒤 매끄럽고 하얀 배를 쓰다듬었다. 캐나다거위였다.

[분노의 계절]


3.

혹시 사냥 때문에 전화한 거라면, 좋은 소식을 하나 알려주마. 요즘 거위가 엄청나게 몰려들고 있어. 나도 사냥은 꽤 오랫동안 했지만, 이렇게 많은 거위는 처음 볼 정도야. 오늘만 다섯 마리를 잡았지. 아침에 두 마리, 오후에 세 마리. 내일 아침에 또 나가볼 생각이다.


"너도 그런 거위를 죽여 본 적이 있어?" 소녀가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어 번 쏘아 맞힌 적이 있어. 그러고 나서 한 일, 이분쯤 지나면, 다른 놈 한 마리가 다가와서 빙글빙글 맴돌며 애처롭게 울어대곤 하지." "그럼 넌 그 거위도 총으로 쏴?" 소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쏠 수 있으면 쏘지." 소년이 대답했다. "가끔은 놓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이 아무렇지 않아?" 소녀가 물었다. "아니. 실제로 사냥을 하고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너도 알잖아. 난 거위에 대한 모든 걸 사랑해. 난 사냥을 하지 않을 때조차 그냥 거위들을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구. 하지만 인생은 모든 종류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 그런 모순에 대해 일일이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는 거야."

[거리]


4.

날씨는 화창했다. 가을이었지만 아직 밤이 되기 전까지는 별로 춥지 않다. 밤이 되면 과수원에 불을 때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 보면 콧구멍 주변에 동그랗게 검정이 묻어 있곤 했다. 하지만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여물지 않은 어린 배가 어는 것을 막아 주기 위해서는 연기가 나더라도 그렇게 불을 때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자, 간다! 어서 잡아! 놓치면 안 돼!" 하지만 그 멍청한 녀석은 어디서 몽둥이를 하나 주워 들고 있었다. 발로 걷어차서 건져 올리면 간단한 걸 가지고, 괜히 몽둥이를 휘두르느라 쓸데없이 기운만 쓰고 있는 것이었다. 물고기는 미친 듯이 앞으로 돌진하며 잽싸게 소년의 몽둥이를 피해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소년은 깜짝 놀라 뒤로 벌렁 자빠졌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small talk]

1.

레이먼드 카버:

1970년대 중반에 미줄라에 사는 작가 친구들을 만나러 갔답니다. 같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는데 누군가 린다라는 이름을 가진 술집 종업원 얘기를 해주었어요. 어느 날 밤 그녀는 남자 친구와 술에 취해서는 침실 가구를 다 뒷마당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고, 실제로 카펫부터 침대용 램프, 작은 탁자까지 전부 다 옮겼답니다. 그 방에서 네댓 명의 작가가 이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누군가 말했어요, "그럼 누가 그 얘기를 쓸 거지?"라고요. 다른 누군가가 그 이야기에 대해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그것에 대해 썼습니다.
... 중략...

적어도 실제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어요. 긴 이야기든 짧은 이야기든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랍니다. 존 치버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나는군요. 아이오와 시티에서 몇몇 사람들과 탁자에 둘러앉아 있을 때였습니다. 그가 지나가는 말로, 어느 날 밤 가족 간에 다투었는데 다음 날 아침 목욕탕에 가보니 딸아이가 거울에 립스틱으로 "사랑하는 아빠, 우리를 떠나지 마세요."라고 써놓았더라고 하더군요. 같이 탁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당신 소설 중 하나에서 그 이야기를 본 것 같아요!"라고 말하자 치버는 "어쩌면 그러지도 모르지요. 제가 쓰는 모든 것은 자서전적이니까요."라고 대답했답니다.

[파리 리뷰, 작가란 무엇인가]


2.

레이가 십 대 초반에 느꼈던 갈등은 단편소설 한 편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1973년에 [여름 무지개송어]라는 이름으로 처음 발표되었고, 나중에는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이름으로 나온 이 이야기는 좋지 않은 상황에 조용히, 편치 않게 적응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야키마의 과수원에서는 서리로부터 과실을 보호하기 위해 폐타이어나 5갤런짜리 통에 채운 기름을 태우곤 했다. 과수 가지 주변 온도를 몇 도라도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끔찍한 악취와 매연을 야기시켰다. 그러니 공해가 과일을 살리는 셈이었고, 그래서 카버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아침에 일어나면 코 밑에 검정 테두리가 둘러져 있었지만,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연기 피우기"는 1950년대 내내 과수 재배자들과 타운 주민들 사이의 논란거리였다.
....

커다란 무지개 송어가 배처러 크릭에 나타났을 때의 일에 대해 카버의 친구인 킹 크라이거는 이렇게 말했다. "레이는 엄청 흥분해가지고 한 마리 잡으려고 별짓을 다했어요. 쫒아다니고 몽둥이를 휘두르고, 닥치는 대로 해보는 거죠. 근데 많이 잡았던 기억은 없어요.

[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


C.R.이 허약하고 조심성이 많은 인물이었다면 샌드마이어는 강건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 (중략)...

카버는 오리, 기러기 그리고 고원지대 동물들을 사냥하는 과정에서 "내 정서적인 삶에 어떤 흔적이 남았고, 나는 바로 그 흔적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연결시켜주는 것은 폭력성이라는 지점이었다. 물고기를 뭍으로 끌어올리거나 오리를 쏘아 떨어트리는 행위를 통해서 레이는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분노와 좌절을 어느 정도나마 해소시켰다.

[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





헤밍웨이와 피츠 제럴드의 장편들. 상류사회의 이야기들과 화려하고 눈부신 소설들이 대중들의 사랑을 오랫동안 받고 있던 어느 날, 기름때를 뒤집어쓴 노동자들의 짧은 이야기를 들고 등장한 레이먼드 카버는 당시 소설의 기류를 바꿔 놓았다고 한다. 감추고 싶을 만큼 너무도 적나라한 일상의 편린들. 지저분한 현실과 인간의 깊은 내면을 다루는 그의 날것은 단번에 대중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인간의 모순과 거역할 수 없는 진실을 눈앞에 늘어놓는 비범한 노력들은 그를 단편소설의 제왕으로 등극시킨다.


일상의 모습들을 소설 속에 녹여 넣은 사소한 일들이 레이먼드 카버를 최고의 소설가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없는 시간을 쪼개 하루하루 글을 쓰는 일은 자신의 일상을 갈아 넣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환경, 이른 결혼과 출산의 행복 뒤에 드리워진 깊은 두려움, 늘 돈에 시달리던 궁핍함들이 그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다양한 감정을 느끼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단편 [춤추지 않으시겠어요?]의 주요 내용은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술집 종업원의 일화를 차용한다. 재미있는 건 그곳에 있던 작가 친구들이 그 얘기를 같이 들었다는 것이다. 누가 그 얘길 쓸 것인지 장난 삼아 이야기를 나누었을 작가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 한 소절,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들리는 시답잖은 수다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레이먼드 카버가 직접 우리에게 글감은 어디에나 널려있고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듯한 기분.


C.R.(레이먼드 카버의 아버지)의 작업장 근처에서 톱을 다뤘던 프랭크 샌드마이어는 C.R.의 부탁으로 레이먼드 카버를 데리고 낚시와 사냥을 다닌다. 레이먼드 카버 초기의 많은 글에서 프랭크의 모습과 그와 함께 보냈던 순간들의 기억을 자주 묘사하고 있다. 위에서 보듯, [분노의 계절]에서는 주인공을 데리고 거위 사냥을 다니는 덩치 큰 사내로, [거리]에서는 주인공과 사냥을 즐기는 칼 서덜랜드라는 인물로 변한다. 카버는 샌드마이어와 다니던 낚시와 사냥으로부터 작가로서 가질 수 있는 많은 경험을 선물 받았을 것이다.



이 단편소설의 대가는 돈을 벌기 위해 끊임없이 단편들을 써낸다. 그 결과 소설 속에는 카버의 일생이 낱낱이 쓰여 있다. 마치 그것은 파편처럼 모든 작품 속에 조금씩 퍼졌을 것이다. 유년의 가난함. 우울함과, 좌절들. 그것들을 이겨내기 위해 프랭크 샌드마이어와 함께 동물들을 사냥하며 다녔던 드넓은 자연의 품. 그 모두가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세계로 탈바꿈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카버의 어려웠던 시절은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17세에 결혼한 뒤, 아버지가 된 해에 썼던 단편 [거리]는 누가 봐도 레이먼드 카버의 생활을 그대로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 또한 어린 나이에 느끼게 되는 결혼생활의 두려움과 난관에 봉착한다. 동네 의사의 사무실을 청소해 주는 일을 하고, 창문이 높은 곳에 달려 있는 침실 한 개짜리 아파트는 그 소설의 설정이 아니라 실제 레이먼드 커버의 생활이었다고 한다.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에서 괴로운 주인공이 밤거리를 헤매고 다니다 폭행을 당하던 곳 또한 2번가라고 불리는 오래된 해안가 동네였다. 제재소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60년대 내내 그 지역의 술집, 당구장, 여인숙, 그리고 성매매업은 경찰의 관할권 밖이었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 [전원], [제재소 사장이 죽던 밤] 같은 단편들도 그의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너도 알잖아. 난 거위에 대한 모든 걸 사랑해. 난 사냥을 하지 않을 때조차 그냥 거위들을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구. 하지만 인생은 모든 종류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 그런 모순에 대해 일일이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는 거야.' 거위를 사랑하지만 죽일 수도 있는 마음. 인생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런 모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카버의 생각은 그의 작품세계에 큰 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카버의 소년 시절의 갈등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말하는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 시절에 흔히 느끼던 감정들이 등장한다. 부모의 싸움을 끝내게 하고 싶은 마음을 형제에게 전가하는 일들, 학교를 빼먹기 위한 거짓말, 꼴 보기 싫은 형제, 집 안을 어슬렁거리는 호기심과 무료함, 이성으로 향하는 어쩔 수 없는 시선, 부모가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동등한 상대에게 어필하고 싶은 우월감, 괴물을 잡고자 하는 용기와 폭력적인 무자비함, 상대를 내식대로 설득하고 싶은 간절함, 자신에게 관심 없는 부모를 향한 서운함, 불화를 잠재울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성과를 인정받지 못한 좌절감, 쓸모없는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서글픔, 그리고 폭발하는 어린 감정과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환영까지.


우리가 자라며 만나는 모든 감정들이 그의 단편 하나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성장하는 순간 누구나 겪게 되는 흔들리는 감정들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긴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광범위하지만 일반적인 감정의 선을 하나씩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감정'이라는 쓰기 껄끄러운 부분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거대한 송어와 사투를 벌이는 부분은 레이먼드 카버가 친구와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던 부분을 썼다고 한다. 친구인 킹 크라이거는 "레이는 엄청 흥분해가지고 한 마리 잡으려고 별짓을 다했어요. 쫒아다니고 몽둥이를 휘두르고, 닥치는 대로 해보는 거죠. 근데 많이 잡았던 기억은 없어요." 라고 말했지만, 정작 작품에서 몽둥이를 들고 난리를 친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소년으로 묘사되어 있다. 심지어 멍청한 녀석이 몽둥이를 휘두르느라 쓸데없이 힘만 뺀다고 표현한다. 친구의 인터뷰를 읽고 작품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나는 부분이다.


이처럼, 삶의 순간들로 완성된 이야기는 힘이 세다. 일상의 조각들은 힘없이 흩어지지만, 작은 조각들에 언어를 심어주는 순간 의미는 확장된다. 그것은 막강한 힘을 지니며 반짝반짝 당신의 글을 빛내 줄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는 없는 시간을 쪼개어 일상을 마치 글쓰기 훈련장처럼 만들었다. 당신의 일상도 그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하루는 글쓰기 운동장. 각자의 운동장에서 글쓰기 근육을 단련한다면 어제보다 나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며, 머지않아 만족스러운 글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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