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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mpirin Jun 16. 2019

차별, 소외 그리고 불멸의 사랑
<워더링 하이츠>

<제인 에어>와 더불어 <폭풍의 언덕>은 많은 여성들에게 '인생 책'으로 불린다. 


검색 도중 <폭풍의 언덕>이  <워더링 하이츠>라는 제목으로 유명숙 교수에 의해 재번역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유 교수는 '워더링 하이츠'가 작품 속에서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폭풍의 언덕'으로 번역하는 것은 작품의 본래 의미를 잘못 전달할 수 있다고 썼다.      


에밀리 브론테의 처녀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된 <워더링 하이츠>를 번역하면서 내린 가장 큰 결정은 이 소설의 제목으로 몇십년간 통용된 '폭풍의 언덕'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Wuthering Heights를 직역하면 '바람의 휘몰아치는 언덕'이므로 '폭풍의 언덕'이 딱히 틀린 번역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워더링 하이츠는 집의 이름이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전망이 좋은 집을 '하이츠'로 명명하는 것은 한국의 건축 업자들도 하는 일이거니와,  사람이나 집의 이름이 제목일 때는 고유 명사로 번역하는 것이 원칙이다. (p.553)

원제의 번역이라기보다는 번안이라고 해야 할 '폭풍의 언덕'이 반세기 이상 별문제 없이 통용된 것은 히스클리프라는 남자 주인공의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로 이 소설을 읽어 왔기 때문이다. (p.553)

 <워더링 하이츠>를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사랑 이야기로 보기로 하면 어림잡아 원전의 10분의 1만 번역하면 된다. <워더링 하이츠>는 언덕 위의 집인 워더링 하이츠에 사는 언쇼가와 언덕 아래의 집안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사는 린턴가 두 집안의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루는 소설이다. '언덕'이 '집'을 가려서는 안 된다. (p.555)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죽음을 초월한 사랑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말인가? 호기심에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워더링 하이츠>를 읽으면서 첫 번째로 놀란 것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만나고 사랑하고 아프게 헤어지고... 캐서린이 죽는 장면까지 다 읽었는데 아직 작품의 반밖에 안 지나갔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반을 채운 것은 계속 되는 히스클리프의 복수와 그로 인해 주변 인물들이 당하는 고통, 캐서린이 죽은 후 남은 사람들의 인생이었다. 다시 말해 히스클리프의 캐서린의 '불멸의 사랑'만을 그리는 작품은 결코 아닌 것이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예전에 읽은 그 <폭풍의 언덕>과 너무나 다른 책이라는 것이었다. 예전에 읽은 <폭풍의 언덕>은 분명히 534쪽에 달하는 분량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내용이 많이 축약되어 출판된 것을 읽었던 게 틀림없다. "히스클리프라는 남자 주인공의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로 편집된 <폭풍의 언덕>을, 빠진 내용이 많다는 것도 모른 채 읽었던 것이다. 문득 과거에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이런 식으로 편집자의 의도에 의해 잘려나가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삭제돼어 버렸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고, 불쾌했다.                                                     

(이 작품이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로맨스에  초점이  맞춰진  것은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된  이후부터라고  한다. 난  이  작품(왼쪽)은  보지  않았지만, 얼마  전  우연히  본  안드리아  아놀드 감독의 <폭풍의 언덕>이  매우  신선하고  좋았다. <워더링  하이츠>를  읽었다면  이  영화도  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다시 읽어 보니 유명숙 교수의 지적처럼 전망 좋은 높은 곳에 있으며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언쇼가가 살고 있는 '워더링 하이츠'는 언덕 아래에 있으며 새로 부상하는 교양있는 시민계급인 린턴가가 살고 있는 '스러시크로스 그레이지'와 대비되는 장소로서 의미가 있었다. '폭풍'이 몰아치는 '언덕'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기는 하지만 언쇼가는 몰락하여 교양과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다. 폭력과 욕설, 원망과 저주를 주고 받으며 사는 언쇼가 사람들과 달리 귀족은 아니지만 재산과 교양을 갖춘 린턴가의 사람들은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사는 저택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대조적이다. 이런 의미를 이해하면서 작품을 다시 보니 많은 것들이 새로이 보였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딸 캐서린과 이사벨라 린턴, 히스클리프와 에드거 린턴, 힌들리 언쇼의 아들 헤어턴과 히스클리프의 아들 린턴, 캐서린과 그녀의 딸 캐시.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이렇게 서로 대조적인 짝을 이룬다. 이 관계에 주목해서 보니 작품의 의미가 매우 다층적으로 보인다.     


사회 한 편에서는전통적인 귀족 계급이 몰락하는 반면 다른 한 편에서는 새로이 부르주아 계급이 부상하던 19세기 영국 사회의 변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낮선 존재를 편견과 차별로 대하는 편협한 영국 사회, 캐서린을 제외한 주변 모두로부터 멸시 받고 차별 받으며 자라온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이 죽은 후 언덕의 위와 아래를 다 장악하고 폭력적으로 행하는 복수, 그러나 그런 그조차도 완전히 망칠 수 없었던 헤어턴과 캐서린의 딸 캐시의 사랑. 교양의 세례를 받은 여성이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환상,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불멸의 사랑.      


<폭풍의 언덕>이 약간 기괴하고 처절한 로맨스 소설로 읽혔다면,

<워더링 하이츠>는 19세기 변화하는 영국 사회의 대표적 두 계급을 통해 차별, 소외 그리고 사랑이라는 깊은 주제가 생동감 있으면서도 예리하게 그려져 있는 훌륭한 고전작품으로 다가왔다.     


뒤늦게 발견한 에밀리 브론테라는 뛰어난 작가의 관찰력과 묘사력, 이야기 구성력.

이 한 작품만 남기고 일찍 요절했다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폭풍의_언덕#워더링_하이츠#에밀리_브론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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