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길게 늘어진 보라 라푼젤 원피스를 입고 모래밭을 가로질러, 모래 놀이할 물을 뜨러 간다. 갈 때 경쾌한 걸음과 다르게 올 때는 천천히 조심히 온다. 장난감 작은 양동이에는 물이 가득하다. 모래밭을 가로지르는 아이의 발은 맨발이다. 보라 드레스가 모래밭으로 넓게 퍼진다.
지난 화요일, 언니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분명 집에 들어가면 여섯 살 둘째는 언니 따라 언니 친구네 놀러 간다고 할 것이다. 아이를 꼬셨다. 뉴코아에 옷 사러 가자.
아이가 좋아할 만한 옷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내가 몇 가지를 권했다. 아이는 쓱 옷을 들춰보너니 옆 가게로 간다. 거기서 또 옷을 보더니 다시 처음 가게로 가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옷 두 개를 골랐다. 라푼젤 보라 드레스와 시크릿 쥬쥬 별의 여신 신디가 그려진 티셔츠에 체크무늬 치마바지. 그리고 작은 보라 핸드백을 샀다. 아이는 옷을 사고 매우 기뻐했다. 나에게 사랑한다고 하였다. 보라 드레스를 입고 자겠다고 했다가 불편해서 다시 벗었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아이가 고르는 대로 그대로 옷을 사줬다.
둘째는 옷 타령이 유별났다.
둘째는 언니 옷을 그대로 물려 입으면 될 줄 알았다. 언니 옷을 물려 입는 동생.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가끔 길가다가 자매인데 쌍둥이처럼 똑같은 옷을 입혀 다니는 부모를 보면 약간 의아했다. 부모의 취향이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둘째에겐 계절에 맞는 옷 입히는 것도, 양말 한 짝 신기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둘째 3살, 24개월에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갔다. 말을 또렷하게 잘해서 본인이 원하는 것이나 상황 설명도 곧잘 하였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3살인데 말로 의사소통이 된다고 좋아하셨다.
계절이 바뀌고 여름이 되어 둘째에게 여름옷을 입혀야 할 때가 되었다. 둘째 27개월 때이다. 첫째가 입던 여름옷 상자를 꺼내왔다. 하나하나 옷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마음이 드는 옷이 있냐고 물을 때마다 둘째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두 상자나 되는 여름옷 더미 중에서 둘째 마음에 드는 옷은 하나도 없었다. 첫째가 3, 4살 때 나는 티셔츠에 청바지 같은 종류의 옷을 입히길 좋아했다. 게다가 첫째 4세 어린이집 선생님이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옷도 스스로 입고 벗기 편한 옷이 좋다고 하셨다. 아이가 스스로 입고 벗기 편한 옷은 고무줄 바지, 헐렁한 티셔츠가 아닌가. 그런 옷은 둘째가 좋아하지 않았다. 날은 덥고 이제 반팔을 입어야 하는 날인데 어찌하겠는가. 아이에게 억지로 옷을 입혔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분홍색 티셔츠와 역시 아무것도 없는 7부 하얀색 레깅스였다.
그 옷을 입히고 집을 나서는데 둘째는 칭얼칭얼거렸다. 그러다가 어린이집 앞에 다다라서는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우는 아이를 안고 어린이집에 들어섰다.
"마음에 안 들어."
눈물, 콧물을 줄 줄 흘리면서 "마음에 안 들어" 그 말을 반복했다. 엄마가 들어주지 않은 말은 어린이집 선생님은 들어 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마음에 안 드는 옷을 입은 것이 그토록 서럽고 억울한 일이었구나.
둘째의 옷 취향은 확고했다. 예뻐야 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레깅스는 안 되었다. 리본이나 반짝이가 달려 있어야 했다. 청바지나 짙은 색 바지는 절대로 안 된다. 티셔츠도 싫다. 레이스가 있는 공주 풍의 옷을 좋아하였다. 둘째의 취향에는 언니 영향도 있다. 그때 6살이었던 언니는 한 창 공주에 빠져있었다. 언니와 똑같은 옷을 입고 싶어 했다.
첫째가 입었던 멀쩡한 옷을 둘째에게 입히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6개월 넘게 걸린 것 같다. 그 해 겨울 둘째는 또 수없이 많은, 언니가 입던 겨울옷을 두고 딱 겨울 원피스 3벌로 겨울을 났다. 그 옷이 마음에 들고 다른 옷은 싫단다. 엘사가 그려진 레이스 달린 원피스, 반짝이가 달린 분홍색 원피스 그런 것만 입었다. 아주 많은 옷을 버렸다. 옷을 버리면서 내 욕심을 버렸다. 내 뜻대로 옷을 입히겠다는 마음을 버렸다. 둘째는 이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옷을 입는다. 버리고 싶은 구질 구질한 옷을 입어도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어도 그냥 네 뜻대로 해라 하고 둔다.
6살 둘째는 빛난다.
보라 드레스를 입고 모래밭에 쪼그리고 앉아 흙은 파는 아이는 됐다. 괜찮다.
예쁘고 또 예쁘다.
나에겐 그런 경험이 없다.
내가 원하는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 내가 고른 옷이 좋다고 인정받은 적도 없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나를 입히려고 하였다. 주로 원피스 같은 것이었다. 그런 것은 불편했다. 입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런 표현을 할 때마다 엄마는 나는 타박하였다. 이쁜 옷을 입지 않는 다고 나에게 뭐라 하였다. 또 엄마가 사 온 옷을 입혀 놓고는 정말 이쁘다고 칭찬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 칭찬이 싫었다. 마치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나에게 예쁘다는 말이 진심으로 들리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내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옷을 사러 같이 가면 내가 고른 어떤 옷도 괜찮다고 한 적이 없다. 이것은 이래서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고 하였다. 심지어 색깔도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 좋다고 한 적이 없다. 내가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어서 까지도 엄마는 엄마 취향의 옷을 자꾸만 사 왔다. 내가 싫다고 거절해도 그랬다. 내가 첫째를 임신해서였다. 엄마는 이런 옷이 이쁘다고 옷을 여러 개 사 왔다. 딱 봐도 임신한 내가 입기 어려운 옷이었다. 그 옷을 굳이 나에게 입어보라 하고선 다시 반품했다. 싫다는 표현을 정말 여러 번 했지만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를 주려고 사온 옷들이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내가 마음에 들고 입고 싶어 하는 옷은 좋다고 한 적이 없다.
나는 성인이 되어서 오랫동안 내 옷을 스스로 고르는 것이 어려웠다. 나에게 맞는 옷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가능하면 편안한 옷을 찾았고 직장을 잡고도 오랫동안 학생처럼 청바지에 남방 같은 것을 입고 다녔다. 옷을 어떻게 입고 다녀야 할지, 어떤 옷을 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어떠한 모습이든 그냥 온전하게 그냥 인정받는 느낌.
내 아이에겐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나에겐 없었다.
원하는 옷을 입을 수 없었던 나는 어떤 아이로 살아갔던 것일까.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둘째 마음을 지켜줄 수 있게 되었다. 둘째의 옷을 그대로 사주는 나와 어떤 것도 인정받지 못한 나는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