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지친 당신이 지금 떠나야 하는 이유

우리가 찍어야 하는 것은 정점이 아니라 쉼표이다

by 김느리


결혼을 약속하고 준비하던 어느 날, 예비신랑은 결혼 전 혼자 유럽 배낭여행 한번 가고 싶다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사랑은 넘치게 받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소박했던 우리 두 가정에서, 게다가 우리 커플의 미래를 위한 양가의 많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럽여행을 가겠다는 그의 말이 참 철없게 들렸던 것 같다.


'곧 결혼할 남자가, 여행 가느라 수백만 원을 쓰고 온다고?'


당시 갓 서른이던 지금보다는 한참 덜 성숙했던 나는 그의 이기적임을 비난했고, 안 된다고 최종 통보를 내렸다. 결혼 전 마지막 여름휴가를 동네에서 무료하게 보냈던 그는, 결혼한 지 5년 차인 지금까지 마음 놓고 여행 한 번 가지 못하는 일개미로 지내고 있다.


그의 삶은 참 바쁘게 돌아간다


떠나야 하는 순간은 온다. 참 갑작스럽게, 아무런 준비도, 떠날 채비도 되어있지 않은 나에게, 얼굴을 내민다.


나는 그때 우리 신랑에게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버린 것이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참 미안하다.


그가 볼 수 있었을 이국적인 풍경, 새로운 얼굴의 사람들, 놀라운 음식들. 그의 미래에 펼쳐질 지치는 삶 속 위안이 되는 소주 한잔에 안주거리가 될 수 있었을 그 경험을, 그는 잃어버린 것이다. (나 때문에...)




떠난다는 것은 참 어렵다. 두렵고, 갈 이유도 없고, 대부분의 우리에겐 돈도 없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내 안의 나는 떠남을 열망한다.


인생에서 찍어야 하는 것은 정점이 아니라 쉼표이니까.


모든 것을 잠시 닫아두고, 하루의 짐을 내려놓고, 내 몸과 마음에 새로운 에너지를 채우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의 뇌는 새로운 것을 갈망한다. 우주의 별처럼 빛나고 있는 뇌는 끊임없이 자극받고 성장하고 싶어 한다. 반복되는 일상, 지루하고 무료한 일상은 내 뇌를 둔화시키고 나아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많은 이들이 외치는 힐링. 소확행이라는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는 것도 좋지만, 내 삶이라는 한 권의 책에서 두근거리고 놀라우며 새로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챕터는 오직 여행을 통해 그려진다.




어제 학교 시스템에 접속해서 2019년 2학기 교환학생을 신청했다. 어느 나라, 어떤 학교를 갈까만 고민했지, 자유양식의 Study plan을 작성해야 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막막해졌다.


'뭐라고 쓰지?'


한참을 노트북 앞에서 고민하다 학업계획서의 주제를 '오래된 꿈'으로 잡고 글을 써내려 갔다.


작가를 꿈꾸던 어렸던 나. '플란다스의 개'나 '빨강머리 앤'처럼 아름다운 글을 써야지 꿈꾸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어른이 되어 강단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누구나 하는 영어, 참 별거 없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영어라는 과목이었다. 영어를 싫어하고 어려워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을 위해 그들의 친구가 되어 최대한 재미있게 수업을 이끌기 위해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래도 내 가슴속에는 항상 창작을 하고 싶다는, 멋진 문학을 읽고 그 감동에 대해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다는, 나만이 느낀 참신한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싶은 작가의 꿈


그리고 그것을 학업계획서에 써 내려갔다. 먼 나라 유럽으로 떠나 그들의 역사와 문화, 문학을 느끼고 싶다. 내 오랜 꿈을 이룰 수 있는,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꿈이라는 작은 불씨를 살리고 싶다.


'학업계획서가 너무 감성적인가?'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이 나이에 대학생이 되어 교환학생을 신청하고 있는 내가 더 특이하니까, 눈 꽉 감고 제출했다.


10 지망의 나라 중, 1번은 당연히 크로아티아. 원래는 당당히 크로아티아만 지원해야지! 큰소리쳤지만, 나는 10 지망까지 꼭꼭 채워 넣었고 다음 주 면접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신랑은 지금 스위스에 있다. 여행을 떠난 걸까? 안타깝지만 아니다. 스위스 제네바 모터쇼 참석차, 빡빡한 일정으로 출장을 떠났다.


"훈아! 누리고 즐겨요.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공기도 많이 마시고, 누려요. 알았지?"


"저녁에는 퐁듀 먹으려고~"


"아, 퐁듀..... 응. 맛있게 먹고 즐겨요! 알았지?"


스위스 퐁듀가 생각보다 맛이 있다거나 그리 푸짐하지는 않다는 것을 말해주려다 말았다. 정신없는 출장 속, 잠시나마 그가 느껴볼 수 있는 그 자유를 지켜주고 싶어서.


사실 처음 교환학생을 생각했을 때는 사랑하는 남편과도 함께 하고 싶었다. 신랑 회사에 육아휴직을 써서 한 6개월 같이 나가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가장의 무게는 다르더라. 그가 어깨에 짊어진, 가족을 위한 희생은 내 생각보다는 참 컸다. 당장의 휴식이나 즐거움보다는, 커리어를 키워나가야 하는 남편이자 아빠였다.


가끔 늦게까지 이어진 회식 후 큰 소리로,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를 목놓아 부르며 토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한 가장의 아픔을 보았다.


다음 날 새벽, 말끔하게 정장을 갖춰 입고, 세련된 머리를 하고 웃으며 집을 나서는 그를 보며 안쓰러움, 존경심, 희망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 섞여있음을 느꼈다.


'나만 여행으로 누리고 와도 되는 걸까? 나랑 아기가 떠나면 우리 신랑은 혼자 뭐 먹고 뭐하고 살지?'


걱정이 되었다.


"너네 없으면 편하지 뭐."


장난식으로 말해도, 그의 눈은 내 꿈을 지지한다는, 나를 응원하고, 나는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있었다.


과거 나는 허락하지 않았던 그의 단 열흘의 유럽여행, 우리 신랑은 한 학기 동안 내가 아기와 엄마와 함께 해야 하는 긴 여정을 진심으로 지지해주고 있었다.


올 크리스마스, 내 인생 최고의 친구, 동갑내기 남편도 유럽으로 불러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가 이루지 못했던 유럽여행이란 꿈을 온 가족이 함께 이룰 수 있도록.


2010년 해양영토대장정에서 만난 젊었던 우리


이름만 불러도 눈물 나는, 내 유일한 사랑, 내 편, 내 아이의 아빠. 그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잘 해내야 한다.


대학생 때, 해양영토대장정이라는 대외활동에서 만나 순수하게 사랑을 키워가던 우리.


대장정에서의 슬로건은 우리 가족의 슬로건이 되었다


불안하기만 했던 청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극복한 우리. 바다에서 만나 대한민국의 삼면의 바다를 함께 항해한 우리. 그래서 아들의 태명도 '바다'로 지었던 우리였다.


어느새, 내 남편은 나의 교환학생 도전이라는 꿈의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되어있었다.


해양영토대장정,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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