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특정 대상에 집착적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일본어로, 주로 일본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팬들을 의미한다. 오타쿠는 경멸적인 의미에서 사용될 수도 있다. (출처: 위키백과)
남편은 결혼을 하고 나서야 나에게 덕밍아웃을 했다. 남편은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오타쿠라는 속성이 밝혀져 자신에게 편견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때와 장소를 잘 구분하여 오타쿠의 면모를 선택적으로 드러냈는데, 나와 연애를 하면서도 그런 부분이 플러스가 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 사실을 꽁꽁 숨겼다. 나는 남편이 오타쿠라는 사실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남편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남편은 오타쿠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재미있어할 애니메이션이 있으니 같이 보자고 권했다. 남편은 이런 재미있는 작품을 보지 못하고 죽는 인생은 너무나 아깝다고, 진짜 재미있으니 자신을 믿고 일단 한번 보라고 신이 나서 말했다. 남편의 눈 속에 자신이 좋아하는 이 애니를 나도 반드시 좋아하게 되리라는 확신이 비쳤다.
솔직히 말해서 남편이 오타쿠라는 사실을 내가 개의치 않았다는 건 취향에 대한 존중이었지, 상대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내 견해를 바꾸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남편의 취향을 존중했지만 내심 애니는 유치하다는 편견이 있었다. 그건 애니를 많이 보고 내린 결론이라기보다는, 애니가 어린 시절 티브이에서 보았던 만화 영화의 연장선상일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져버린 데 지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애니는 내 기준에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나와 상관없는, 내가 관여하고 싶지 않은, 2D 세계일 뿐이었다. 그 세계를 이해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눈만 뜨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상상하는 자체로 에너지가 휘발되고 피로감이 몰려오는 듯 했다. 그래도 남편이 같이 보자고 권한 애니의 장르가 내가 좋아하는 SF였던 데다 그토록 환한 얼굴로 자신 있게 권하니 한 번 보기나 하자는 생각으로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신혼 초에 살았던 집은 거실이 좁았던 탓에 티브이 대신 빔프로젝트를 벽에 쏘아 영화나 드라마를 보았는데, 하얀 벽에 영상이 떠오른 이후 나는 벽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소파에 붙박이처럼 앉아 애니에 빠져들었다. 20분 남짓 되는 한 회가 순식간에 지나가고, 다음 회를 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절묘한 시점에 꼭 이야기가 끝이 나서, '한 편만 더 보자'를 외치다 결국 주말 동안 24회로 이루어진 한 시리즈를 다 보고야 말았다. 이야기는 내 기대를 한참 넘어서서 예상에 예상을 뒤엎는 반전을 거쳐 끝이 났다. 이렇게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데다 촘촘한 플롯의 애니가 있다니! 이런 작품을 '그려서' 만들어내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노력을 들여야 하는 건지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업신여겼던 애니가 이렇게 심오하고 거대하고 굉장한 세계였다니! 40년 가까이 살았는데도 아직 나를 매혹시키는 또 다른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남편은 거봐, 재밌지?라고 말하며 붙박이가 된 나를 매우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남편은 자신의 정체?를 밝힌 이후로 틈이 날 때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재밌는 애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쩌다 내가 질문을 하면, 매우 높이 쌓아 올린 젠가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마지막 조각을 빼낸 것처럼 말들이 우수수 우르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러면 한참 동안 길고 긴, 끊이지 않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일본 애니는 보통 소설이나 만화책 원작을 기반으로 제작되는데, 원작에 대한 얘기며, 후속으로 나온 게임 얘기, 애니의 특정 장면이 의미하는 내용, 애니의 성우, 애니에 삽입된 ost, 그 ost를 부른 가수, 애니를 만든 제작사 등 애니의 안팎, 전후를 아우르는 거의 모든 얘기들을 남편은 섭렵하고 있었다. 한 번 물꼬를 튼 얘기는 쉽게 멈출 줄 몰랐다. 때때로 성우나 ost 이야기를 하다가 그 성우가 출연한 다른 작품, 그 ost를 부른 가수가 부른 다른 노래들로 이야기가 뻗어나가기도 했다. 이야기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끝없이 샘솟았다. 때때로 그 수다스러움에 질리기도 했지만, 그런 내용들을 다 기억하고 있는 남편이 신기하기도 하고, 신나게 얘기를 하는 남편의 모습이 귀엽기도 해서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곤 했다. 그렇게 듣고 보고 즐기다 보니 남편의 덕후 세계에 나도 점차 스며들게 되었다.
남편은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들은 몇 번씩 반복해서 본다고 했다. 잊을만하면 또다시 볼 예정이라고도 했다. 애니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거나 좋아하는 것들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거나 하면서 그 재미를 음미했다. 보다 보면 새로운 게 보이고, 그렇게 알게 되는 만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어서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고 말하며 매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저렇게 질리지도 않고 무언가를 계속해서 좋아할 수 있으며, 좋아함으로써 행복해할 수 있을까? 내 입장에서는 그 마음이 참 불가사의했다. 나는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라 방영하는 드라마가 바뀔 때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바뀌는 편이고, 정말 좋아하고 인상 깊게 본 영화나 드라마는 다시 보지 않는다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어떤 것이라도 그것을 제일 처음 경험했을 때 느꼈던 강렬한 감상은 두 번째 경험에 비할 바가 못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나 책 등의 작품은 최고로 아름다웠던 그 느낌만을 간직하고 싶다. 최초의 경험을 퇴색된 감상으로 덧칠하는 것은 내가 느낀 작품의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행위로 여겨졌으므로, 좋아하는 작품을 다시 보지 않는 규칙은 내 나름대로 작품에 대해 경의를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무언가에서 느꼈던 빛나는 감상들을 그 감정을 느꼈던 주체인 나와 동일시했던 것 같다. 내가 보고 듣고 느껴서 마음에 남긴 결정체들은 남들과 구분되는 나의 개성이자 내 내면의 색깔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다시 경험하여 그 감상이 시들해지는 건 내가 빛과 색을 잃고 부스러지는 데 비유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아끼는 마음에 차곡차곡 모아두기만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에 뒤돌아보니, 내가 무엇을 좋아했었는지, 그 무엇에서 어떤 감동을 느꼈는지, 그 감동이 얼마나 반짝였는지, 떠올리려 해 봐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나는 남편을 보고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다시 보지 않았던 이유는 작품에 대한 예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 방어적 기제였다는 사실을. 나는 나로 비유되는 감동들을 잃을까 겁이 났다. 내가 찬양했던 작품을 다시 보았을 때 고작 이런걸대단하다고 한걸까, 이딴 게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까봐, 그 작품을 찬양했던 과거의 나를 시시하고 변변찮고 시답잖게 여기거나 부정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 결과, 한 때 나로 대변되었던 내가 사랑했던 그 무언가들을, 종국에는 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그게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왜 내가 사랑했던 것들이 완전무결한 상태로 남아있어야만 안심이 되었을까.
미혼이었던 시절에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사랑을 하는 일도 비슷했다. 나는 상대의 좋은 점이나 매력을 빨리 캐치했지만, 그만큼 쉽게 질리는 편이었다. 그 사람의 외모나 눈빛, 행동, 말투에서 느껴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 내 눈길과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면 좋아하는 감정으로 이어졌는데, 나름대로는 외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면을 간파한 것이라 믿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외모를 본 것 같다. 젊은 날의 나는 사람이 좋아지는 데 이유가 없는 법이라는 말을 신봉하는 낭만주의자였다. 언제든 큐피드의 화살을 맞을 준비를 한 채로 이유 없이 마음을 휩싸는 강렬한 느낌을 좇아 다녔다. 누군가에게 끌리는 내 '본능적인 감'이 나와 꼭 맞는 사람에게 반응하도록 설계된 안테나 같은 것이라고, 그 감에 충실하다 보면 언젠가 운명적인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그러나 그 강렬한 느낌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으며, 또 신기루 같은 구석이 있어서 단편적인 사건이나 사소한 단점만으로도 쉬이 사라져 버렸다. 곁을 내주지 않는 상대를 좋아하게 됐을 때는 강렬한 느낌을 잃지 못하고 오래 앓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기거나 스스로를 상처 입히며 짧고 소모적인 연애를 반복했다.무언가에 대한 강렬한 느낌, 그것만이 사랑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반면에 남편은 애니를 좋아하는 데 있어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과 명확한 근거가 있어서 그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만을 파고들어 사랑했다. 스토리, 세계관, 연출, 캐릭터, 음악, 그림체, 성우의 목소리 등 남편은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까다롭게 분해해서 애니를 보았다. 좋아하는 것 중에서도 싫은 것은 냉정하게 싫어했다. 오타쿠라고 하면 무언가 맹목적으로 좋아하고 집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분별한 사랑이 아니라 분명한 기준으로 선별된 이성적인 사랑이라는 점이 내 예상과 매우 달랐다. 남편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조예가 깊은 만큼 그 가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고, 그 평가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남편에겐 사랑에 대한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사랑할 가치가 있다고 선택한 대상에게 쏟는 무한한 사랑으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왔고, 그것으로 인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결국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작년 초, 큰 결심 끝에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원 박사과정 2학기차에 세부전공과 지도교수를 잘 못 택했음을 깨달았다.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선택을 되돌릴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자퇴원을 제출함으로써 나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나는 기숙사에 부렸던 짐을 정리하여 집으로 돌아와 기약도 계획도 없이 집에 머물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그즈음, 달리 할 일이 없던 나는 시간 때우기 용으로 '탑건: 매버릭'이라는 영화를 골라 시청을 했다. 영화가 매우 재미있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묘한 여운이 남았다. 영화가 나를 끌어당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다시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의 나였다면 영화가 남긴 최고의 감동을 간직하기 위해 다시 보지 않았을 테지만, 남편에게 감화된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내가 사랑했던 것들이 낡아감으로써 나를 잃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 아직도 조금 남아있었지만 한 발을 내디뎌 보기로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볼수록 마음이 부풀어 오르고 감상이 풍성해져서, 마음속에 거대한 파도가 서서히 일어나 나를 덮쳐오는 듯했다. 스러지지 않고 더욱 선명해지는 감동이라니! 낯설고 이상한 경험이었다. 아직도 나를 두근거리게 하는 낯설고 새로운 경험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내가 맞닥뜨린 권태와 절망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영화를 세 번째 감상하면서 묘한 여운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평생을 전투기 조종사로만 살아왔던 주인공 매버릭이 상관으로부터 퇴직을 통보받았을 때, 그러니까 사실상 모든 것을 잃고 길 끝에 내몰리게 되었을 때, 자신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과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고,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희박한 가능성을 실현시킴으로써 모두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고, 희열이 솟구쳐 가슴께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순간에, 나는 매버릭이 되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나를 투영시킨 매버릭에게서 암흑 같은 현실을 타개할 가능성을 엿보았고, 그것을 거듭거듭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를 네 번째 감상하면서는, 매버릭이 역경을 극복하는 극적인 과정 이외의 대목에서 또 다른 감동을 받았다. 그도 늘 자신감에 가득 차 있기만 한 건 아니었으며 그 조차 자신의 길을 의심하고 버거워했다는 것과, 그의 곁에는 그를 싫어하고 의심하고 비판하며 내쳤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를 아끼고 사랑하며 믿어준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 바로 그 사람들 덕분에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따뜻하게 적셨다.
영화를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절망 끝에서 극적으로 발굴해 낸 희망이 감격스러워 두 손을 모아 쥐고 울었다. 눈물을 흘려보냈기 때문인지 응어리진 마음이 다소 말랑해지고 후련해졌다. 실패로 얼룩진 과거를 끊어내고, 수치감을 떨쳐내고,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꿈을 그만 단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전과는 다르게 살아봐도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인생 40년 차에 (오타쿠인)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배웠다.
끊임없이 좋아하고 또 좋아하는 마음은대상에 대한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기보다는사랑하는 방식의 차이를 의미했다. 사랑하는 이유가 구체적일수록 더 오래도록 지속되며 더 깊은 만족을 우려내고 더 풍부하게 자신을 감각할 수 있다. 그런 사랑에야말로 상처받는 것을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을 던질 용기가 생기는것이다.
사랑이란 강렬한 감정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행동하는 끈기이자 의지이며, 그로 인해 생겨나는 새로운 것들을 끌어안는 용기이고, 결국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