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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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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비 Jan 22. 2020

엄마몬3

날으는 자동차


  아빠의 출근시간과 나의 출근시간은 비슷하다. 어렸을 때 살던 집은 화장실이 거실에 하나 안방에 하나 이렇게 두 개 있었는데, 아빠는 무슨 이유에서 인지 안방 화장실을 싫어했다. 그래서 바쁜 아침시간에 아빠와 나는 서로 화장실을 차지하기 위해 눈치싸움을 했다. 운이 나쁘면 아빠가 싼 묵은똥 냄새를 맡으며 양치질을 했다.  나는 늘 일찍 일어나서 아빠가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을 차지해야 했다. 구릿구릿한 냄새가 샤워기의 뜨거운 증기를 만나면 냄새가 밑으로 내려와 내 몸을 절여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고 나서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이 밥을 먹는 동안 아빠가 화장실에 갈 때도 있었는데, 아빠는 화장실을 오래 쓰는 사람이라, 밥을 다 먹은 뒤에도 화장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설령 문이 열려 있더라도, 신문지 냄새와 섞인 똥 냄새는 아침으로 먹은 꿀을 탄 따뜻한 우유와 스크램블드 에그를 얹은 바삭한 식빵을 올라오게 만들어 버렸다. 비위가 약한 나는 밥을 빨리 먹고 양치를 하러 들어가야 했다. 때문에 나는 학교든 일터든 간에 빠르면 한 시간, 늦으면 30분 전에 도착하는 사람이 되었고, 빨리 먹는 버릇 덕분에 아침에는 급체를 하거나 배탈이 나기 일수였다. 한번 방귀를 뀌는 줄 알고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가 바지에 똥을 싼 적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후에 다루기로 하자.
 아빠와 나는 집안 똥쟁이다. 친언니는 변비이기 때문에 한번 화장실에 들어가면 온 가족의 찬사를 받았지만, 이런 가족들과는 달리 엄마가 볼일을 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화장실에서 오줌을 싸거나 샤워를 하거나 샤워를 하며 오줌을 싸는 것은 보았어도, 엄마가 큰일을 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혹 안방 화장실에서 싸서 내가 못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기이한 호기심은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는 집으로 이사하였을 때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더 증폭될 뿐이었다. 어렸을 때 친언니는 엄마는 이슬만 먹고사는 여왕이라서 그렇다며 디즈니 공주들이 똥을 싸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이슬만 먹고사는 사람도 디즈니 공주도 아니었다. 자라면서 엄마는 그냥 남들에게 똥 싸는 모습을 보이기 부끄러워하는 사람이겠거니 싶었다.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니 이해는 되었다. 그러고 보면 엄마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엄마가 유쾌한 사람이 아닌 적은 없다. 엄마는 나의 ‘동심’을 지켜준다는 이유로 작은 거짓말들을 했다. 내가 집 앞 피아노 학원 앞에 바구니에 담아져 버려진 채 울고 있던걸 주워왔다는 이야기, 내가 어린 왕자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라는 길고 긴 연극, 그리고 본인의 자동차에 특정 버튼을 누르면 자동차가 난다는 이야기 등이다. 집 앞 피아노 학원에서 주워왔다는 이야기는 어렸을 때도 믿지 않았지만, 어린 왕자와 편지를 주고받던 것은 당시에는 정말로 믿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어느 날 내 책상 앞에 편지가 놓여져 있었고, 그 편지는 어린 왕자가 보낸 것이었다, 나는 엄마가 우체국으로 가서 붙여 준다는 이야기를 믿고 답장을 엄마에게 건네주고, 엄마는 어린 왕자의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 주며 길고 긴 연극은 일 년 정도를 이어갔다. 어느 날부터인지 어린 왕자의 답장이 오지 않기 시작했지만, 나는 어린 왕자가 본인의 소행성으로 돌아가서 답장을 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엄마가 똥을 싸지 않고 노래를 부르지 않았지만 나는 엄마를 사랑했고, 딱히 그런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설거지를 하며 허밍을 하거나 흥얼거리지도 않는 엄마를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 건 스물한 살이 되던 생일 다음날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된 날이었다.

 당시 피시방 알바를 하고 있던 나는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사촌오빠의 전화를 받고 엄마와 가 살던 언니는 그날따라 집에 함께 있었는데, 엄마와 언니와 나는 차에 급하게 올라 타 다시 사촌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촌오빠는 빨리 오는 게 좋을 것 같다 했다. 엄마는 며칠 전 할머니가 당뇨 합병증으로 인해 쓰러지셨을 때 병원 옆자리를 지켰어야 했다고 자책하며 시동을 걸었다. 할머니가 다시 위독해질 줄은 몰랐다 하시며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을 벌벌 떠셨다. 야속하게도 늘 급할 때는 차가 막힌다. 그날도 그랬다. 신경이 온갖 날카로워진 언니는 창밖을 다니는 자동차들을 향에 소리치며 손가락 욕을 했다. 나는 엄마의 손가락이 너무 떨리고 언니가 너무 시끄러워서 차라리 언니가 운전대를 잡고 엄마는 옆에서 사시나무 떠는 몸을 좀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빨간불을 못 넘기고 세 번째쯤 우리 차 앞에서 걸렸을 때. 사촌오빠에게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다. 엄마는
“옥비야, 너 어렸을 때 엄마 차가 날 수 있다고 했었던 것 기억나니?”라고 물어보셨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정말로 차가 공중에 떴기 때문이다. 너무 어려운 기술이라 1년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다고 했던 그 말이 정말로 눈앞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할머니의 죽음에 슬퍼해야 할지 이 상황에 혼란스러워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는 이모품에서 쓰러지셨다. 언니는 사촌오빠와 담배를 피우러 나가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사촌언니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며 내 등을 다독여 주었다. 나는 “자동차가 날아왔거든.”이라고 말했지만, 사촌언니는 내가 분위기를 풀어 주기 위해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살짝 미소를 지은 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먼저 할머니의 죽음에 슬퍼하기로 했다. 장례식 삼일 동안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미국과 일본에서 살던 이모들도 오셔서 병풍에 대고 아이고아이고 했다. 엄마는 울다가 세 번을 쓰러지셨다. 할아버지는 장례식장에 발 한 발자국도 못 딛으시고 병원 로비에 혼자 앉아 흐느껴 우시기만 하셨다. 나 또한 조문객들과 앉아 술을 따라 주며 위로의 말을 듣고 잠깐잠깐씩 울었다. 자동차가 날았다는 일 따위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외할머니에게 상복을 싸매 주는 아저씨를 보며 예술하는 사람 같다 라고 생각한 것이 잠시 한 딴생각이었다. 할머니를 화장터에 보내고 삼촌이 샤부샤부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엄마는 “너는 엄마가 죽었는데 밥이 넘어가니” 하며 참석하지 않으셨다. 외할아버지 또한 가족들이 모이면 당연히 외할머니가 있어야 하는데, 있어야 할 사람이 자리에 있지 않으니 자신도 참석하지 않겠다 하셨다. 언니가 외할아버지를 집에 모셔다 드린다 했다. 엄마와 언니, 외할아버지가 없는 식사자리였다.
 식사를 하며 가족들은 죽음의 아픔을 완화하기 위해 작은 농담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촌언니는 가족들에게 옥비가 자신의 기분을 풀어 주려 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자동차가 난 사실이 다시금 기억났다. 나는 “아, 언니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농담한 게 아니라, 정말로 자동차가 문자 그대로 난 거였어.”라고 말했다. 온 가족들은 내가 또 소소한 농담을 한 줄 알고 박장대소를 했다. 설령 농담이었더라도 웃긴 농담이 아니었는데, 가족들은 그냥 웃었다. 나는 가족들이 내 말을 가볍게 넘기는 것이 답답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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