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소리에 부러진 갈비뼈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거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붉은박쥐 다섯 마리가 동그랗게 날고 있는 오복도였다. 만두집을 오픈할 큰 이모에게 선물하기 위한 그림이었다. 파란 열매 주위를 둘러싸 날고 있는 박쥐는 파란 모자를 쓰기 좋아하던 외할머니와 조금 비슷하다. 그녀의 수의는 붉은빛이 돌았다. 엄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엄마가 민화를 하기 시작하면서 거실은 온전히 엄마의 차지가 되었다. 넓은 거실을 쓸 때에는 엄마가 그리는 그림을 보며 소파에 누워 있을 수 있었지만 엄마가 민화를 하기 시작하면서 거실은 온전히 엄마의 차지가 되었다. 간이 책상을 두 개 이어 붙이고 짙은 초록색 모포를 깔아 그위에 종이와 문진을 두었다. 붓을 두는 작은 책상만 두 개였고, 물감을 개는 접시들을 쌓아 놓는 책상들로 거실이 빼곡했다. 붉은색 푸른색 개열 외에는 말라붙은 접시들을 건드려서 쏟을뻔하며 엄마 옆에 섰다. 엄마가 백동자도나 책가도를 그리고 있었다면, 모든 색들이 흘러넘쳐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엄마와 나의 머릿속도 온갖 해집어 놨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걸리적거리니까 저리 가라고 하기 전에 말을 시켜야 했다. 차라리 그냥 부엌에서 얘기할걸 그랬나 생각이 들었지만, 엄마가 우울할 때는 대답을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거로 퉁치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엄마, 그날 일은 뭐였어요?”
엄마는 어깨를 으쓱하고 코를 킁 하셨다. 그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어느 날을 말하는 거냐 물어보셨다.
“몰라 물어? 할머니 돌아가신 날, 엄마 차 말하는 거잖아!”
엄마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는 너 어렸을 때부터 내가 자동차가 날 수 있다고 말해줬는데 새삼스럽게 왜 물어보냐 말하시고는 고개를 획돌리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언니와 나는 엄마가 고양이와 똑같다 얘기하곤 했다. 엄마가 대화를 끝내고 싶을 때 고개를 바람이 훽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돌리는 모습이 고양이가 갑자기 획하고 돌아서는 모습과 닮아서였다. 여기서 더 말을 시키면 솜방망이를 휘두르는 고양이처럼 엄마가 손바닥으로 찰싹 팔뚝이나 책상을 내려쳐 언짢은 기분을 표현할 것이다.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채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엄마는 얼마 후 내가 혼자 샤부샤부를 먹으러 간 것이 서운했노라고 말했다. 나는 설거지를 하며 그 말을 흐르는 세제와 함께 흘려보냈다.
나는 엄마가 잔소리를 하거나 하소연을 할 때면 자리를 피하고는 했다. 감정이 점점 과잉되어 소리가 점점 커져 물건들이 떨어지거나 울음을 터뜨려 휴지곽이 바닥이 나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다. 사촌언니는 말이 길어져서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는 것은 엄마 쪽 집안 내력이니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라고 했다. 나는 다행히도 한 귀로 흘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친언니는 그러지 못했다. 언니는 엄마가 하는 모든 말에 대답을 했고 때로는 그게 엄마의 심기를 더 거슬리게 하여 싸움이 일어나고는 했다. 언니의 말대꾸는 언니가 중학생이 되어서 교복에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친구를 사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언니가 중학교를 입학할 때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는데, 언니가 굳이 안 해도 되는 말을 얹어서 집안 분위기를 흐리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때는 내가 잔소리를 들어 봐야 독서기록장을 안 썼거나 교복 치마에 급식으로 나오는 국물을 흘려 더럽혔을 경우였기 때문에 말을 얹을 껀덕지도 없었다. 그리고 어른에게 말대꾸를 하는 것은 나에게 신성모독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신성모독을 하는 언니에 대해 회의 감이 아니라 응원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언니보다 이를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내 편인 적도 없었지만 사과한 적도 없었다. 지금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어렸을 때는 그게 너무 슬퍼서 다른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잘못하면 사과를 하지 않는가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어느 날 독서기록장을 잃어버린 나에게 엄마는 칠칠맞지 못하다며 혹시 독서기록을 하지 않아서 숨기려고 잃어버렸냐고 윽박질렀다. 나는 내 말을 믿어 주지 않는 엄마가 너무 야속해서 엄마가 너무 밉다고 외치고 고개를 획 돌렸다. 돌린 고개를 다시 원래대로 돌리고 뺨을 때렸다. 초등학교에서 가장 친했던 양갈레 머리를 하던 아이 앞이었다. 뺨이 얼얼한 거보다 친구 앞에서 모멸감을 준 엄마 때문에 마음이 더 얼얼했다. 후에 엄마는 엄마 가방 안에 있는 독서기록장을 나에게 보여 주며 엄마가 오해했네 하고 웃으며 말했다. 양갈레 친구는 방에 들어온 나에게 만화책을 펼쳐 주며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이 일이 가끔씩 생각이 난다. 그날 나에게 미안하다고 한 사람은 엄마가 아닌 친구였다. 어린 내가 느꼈던 모멸감은 계속 커져 사춘기를 일찍 오게 만들었다. 그때 어른들의 말로는 사춘기지. 나는 그것도 지금의 나와 어린 나와 똑같은 나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나이가 십 대라는 이유 만으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사춘기로 퉁치는 엄마와 어른들이 미웠다. 엄마는 나의 사춘기 때문에 원형 탈모가 생겼다고 두피를 보여 주곤 한다. 나는 내가 사춘기였던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내 대가리가 커져 자신에게 대든다고 생각하게 된 때를 아직도 얘기한다. 첫 생리가 지나가고 두 번째 생리가 시작되었을 때, 엄마는 나에게 생리대를 챙겼냐고 물어보았다. 등교를 준비하던 아침 시간대였어서 나는 건성으로 그렇다고 말했다. 엄마는 다시 한번 파우치에 넣어서 잘 준비하였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엄마는 그럴 리가 없다며 보여 달라고 하셨다. 나는 계란말이를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 가방에 있는 생리대 파우치를 보여주고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나의 이 행동 때문에 아빠에게 안겨 울었다. 나는 엄마의 오해 때문에 뺨을 맞았을 때 엄마에게 사과를 받을 수 없었지만, 엄마의 오해 때문에 엄마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해야 했다.
언니의 신성모독을 엄마와 헌담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편들어준 적은 없다. 엄마와 언니가 서로 의자를 던지며 몸싸움을 하다가 엄마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건이 있을 때도 나는 설거지를 하며 한 귀로 흘려듣고 있었다. 입으로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사실 언니를 응원하고 있었다. 엄마가 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중에 언니가 엄마에게 “옥비에게 말 좀 이쁘게 해!”라고 말한 것이 시작이었다. 평소 엄마의 틱틱대는 말투에 상처를 많이 받은 상태였다. 엄마는 언니가 씩씩대며 집을 나간 후 왜 이 싸움을 말리지 않았냐고 너는 딸도 아니라며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도 역시 내 잘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