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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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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비 Jan 15. 2020

엄마몬2

엄마는 직장인이 아니야


 어렸을 때는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남들보다 머리가 하나가 더 크니까.

 초등학교 운동회 때 학부모들이 운동장 구석에 있던 놀이터에 구수를 하고 도시락 자리를 마련할 때 엄마의 키 덕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엄마나 아빠를 못 찾아 엉엉 울며 안절부절못하는 또래 친구들을 보며 콧웃음을 쳤다. 아이들은 천 원짜리를 열 장이나 받던 솜사탕 아저씨 앞에서 소매로 눈물과 콧물을 닦으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두리번거렸다. 엄마에게 나도 만원 짜리 솜사탕을 먹고 싶다 하니 지갑에서 선뜻 천 원 뭉치를 쥐어 주셨었다. 솜사탕을 사러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리며 돈을 세어 보니, 여덟 장뿐이 없었지만, 아저씨는 아이들이 쥐어 주는 천 원 뭉치들을 세어 보지도 않으시고 주머니에 쑤셔 넣으셨다. 나는 돈을 내미는 아이들 중 하나인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 원짜리 솜사탕의 맛은 5월의 태양에 의한 것인지 너무 빨리 녹아 버려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일을 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에 친언니는 어린이집으로 나를 픽업하러 왔다가 집에 데려다주면 바로 친구들과 놀러 나갔고, 집에서는 친할머니가 나를 챙겨 주셨다. 할머니와 숨바꼭질 중 피아노 밑에서 코딱지를 파며 기다린 것이 생각난다. 밤늦게 까지 엄마와 아빠를 기다리며 할머니 품에 안겨 TV를 보곤 했다. 할머니의 품은 장롱 냄새가 났으며 쪼글쪼글하고 부드러웠다. 엄마는 늘 아빠보다 더 늦게 들어왔다. 아빠가 먼저 오시면, 할머니는 주무시러 들어가시고, 아빠가 끓인 토마토나 콩나물을 넣은 라면을 한입씩 얻어먹으며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와 아빠는 번갈아 가며 작은 선물을 사들고 오셨었는데, 내가 “다녀오셨어요~”라는 인사보다 “선물이다!! 선물!”이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런 일은 없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두 분의 맞벌이 덕인지, 어린 시절의 나는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안도했으며 자랑스러웠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국내 항공의 스튜어디스라고 했다.  키와 마른  때문에 기내에서 휘청 거리며 중심을 잃고 모든 것을 떨어뜨렸을 거라 상상 가지만, 엄마의 말에 의하면 가장 힘이  사람이었다고 한다.  길고 가는 목에 빳빳한 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엄마를 그려 본다면   어울렸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알파벳을 더듬더듬 배우며 나도 크면 키가 크고 늘씬한 스튜어디스가 되어서 외국인이 처음으로 보는 한국의 첫인상이 되어야지 잠깐 꿈꾸었다. 스튜어디스를 그만두고 하게  일은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 롯데 백화점 명품관의 쇼윈도 들은 엄마의 손을 거쳐 갔다. 엄마는 아직도 장갑을 끼지 않고 까르띠에 반지와 샤넬 가방을 만진 것에 얘기하곤 한다. 엄마는 동료들과 집에 수많은 재료를  들고 와서 이것저것 만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크리스마스에 바다를 컨셉으로 만든 거대한 트리였다. 단단하지만  휘는 철을 엮어 파란색과 은색 스프레이를 칠하고, 진주알과 조개껍데기로 트리를 꾸몄다. 내가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전나무 리스에도 파란 리본과 조개껍질이 붙여졌다. 트리 꼭대기의 별은 은색 천사였다. 우리 집은   대신 천사로 장식했다. 엄마와 아빠는 백화점에서 만났다. 아빠는 베네통 키즈에서 매니저를 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양손에 짐을 들고 다니는 엄마가 그렇게 이뻐 보였단다. 그들의 연애 사정이야  이상 관심 없지만, 엄마가 노래를 처럼 하는 말은 아빠와 연애할 당시에는 조곤조곤 말도 많이 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 같았다고 했다.   없이 엄마의 귀를 즐겁게  주던 조용한 목소리가 끊긴 것은 아마 언니나 내가 태어나면서부터이지 않을까 싶다. 가늘던 엄마의 목소리가 걸걸하고 쇳소리가 나게  것도 그때부터  것이다. 아빠와 언니와 나는 엄마가 우리가 어렸을 때는 목소리가  여왕님 같았는데, 이제는 마녀 같다고 놀렸다. 엄마는 그만하라고 소리 지르고 방에 들어갔다.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엄마가 가끔 방문을 닫고 흐느끼고 있을 때에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엄마의 목소리가 변해 버린 것은  때문이 아니었지만, 엄마가 일을 그만둔 이유  하는 나의 탓이 컸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집으로 가는 스쿨버스에서 내리면 엄마나 파출부 아주머니가 나와 있었다. 가끔씩  분이 바쁠 때에 아무도 없을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혼자 집까지 걸어가면  문이 열려 있고  안에서는 엄마가 간식을 만드는 냄새가 났다. 어느  오는 날의 일이다. 버스가 세워지고 내렸을  우산을 들고 나를 기다리는 파출부 아주머니가  계셨다. 나는 주변을 잠시 두리번 대다가 비를 맞으며 집으로 걸어갔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작은 창문에서부터 집의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있었다. 평소와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밑에 층에 사는 아주머니네  초인종을 누르며 잠깐 있게 해달라고 했겠지만, 8 아주머니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운동회  군중  엄마아빠를  찾는 아이처럼 울었다. 1층에서도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엄마는  울음소리를 듣고 평소보다 빨리  내가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우는 소리를 듣고 계단으로 뛰어올라오셨다. 자그마치 9층까지 올라온 것이다.  손에는 다음 시즌을 위한 디스플레이 용품을 한가득  채였다. 엄마는 그날 허리가 아프다며 침대에 드러누우셨다. 집안에 열쇠 장금  대신 비밀번호 장금 쇠가 달리게 되었고, 엄마의 허리 디스크는 그렇게 생겼다. 허리디스크 탓에 엄마는 좋아하던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집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엄마의 목소리는 학교에서의  목소리만큼 시끄러웠다. 학교에서 시끄러운 것은 나의 탓이 아니었지만, 엄마의 목소리를 긁게 만든 엄마의 우울증은 어느 정도  탓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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