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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호랑 Dec 08. 2021

고전은 오래된 스타일북이에요.

일본 영화 ‘남동생’에는, 무능력한 사고뭉치 남동생이 나옵니다. 누나는 남편 없이 딸(무려 아오이 유우)을 훌륭히 키워 내고는 잘나가는 집안에 시집 보내게 되죠.

하지만 남동생은 결혼식에 찾아와서는 그렇게도 마시지 말라는 술을 처먹고는 난장판을 만들어 버립니다. 체면을 구긴 신랑 측에서는 파혼을 선언하고, 아오이 유우는 쫓겨나 집으로 돌아오게 되죠.

이제 누나는 너무나 원망스러운 동생을 다시는 보지 않으려 하고, 남동생은 면목이 없어서 누나를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무능력한 그는 이제 좌절에 좌절과 좌절을 거듭하다가 친구와 가족이라고는 없어도 하나도 없는 극빈자로서의 삶을 마감할 도리밖에는 아무것도 없겠죠.
 
책은 우월한 사람들이 씁니다. 지금까지 인류에게 남겨진 모든 책은,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능력과 높은 지능을 타고난 행운아들의 작품이죠. 남동생들에게는 입이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책을 쓸 수 있었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기만의 세계관에 대해서 쓸 수 있었다면, 인간을 위한 아름다운 진리가 마련되어 있다고 썼을까요.

만약 그들에게 이번 인생에서 무엇을 배웠냐고 묻는다면, 지옥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답하지 않았을까요.

절망뿐인, 지옥같은 일상이 그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준 것과 마찬가지로, 절망이 아닌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희망이라는 대전제 아래에서 책을 써 내려갔을 것입니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의무를 다하면 연잎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능력과 높은 지능을 타고 난 (소수의) 행운아들이기에, 이미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한가득 지닌 자들입니다.

이미 가능성을 확보한 인간은 (상대적으로) 결과에 집착할 필요가 없죠. 그들은 악다구니를 쓰지 않아도, 비굴한 웃음을 흘리지 않아도, 언제나 ‘상대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희망이라는 대전제를 너무나 당연시 하기에, 언제나 그것을 손에 꼭 쥐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바가바드기타를 쓴 사람은 우리가 추종해야 할 바람직한 인간상이지만, 남동생은 그렇지 않다고요.
우리는 남동생들은 절대로 시야에 들어오지도 못하도록 고개를 획 돌린 채로, 경주마처럼 성공한 자들만을 바라보고 달려왔으면서도, 나는 시야각이 360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시궁창같은 세상을 설계한 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위대한 고전의 저자이든 남동생이든, 모두 하나의 시스템 아래에서 죽을 때까지 진이 다 빠지도록 생명력을 쥐어짜 내며 살아가도록 설계된 생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전을, 적어도 보편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희망이라는 대전제 아래에서 써 내려간 책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자들이 쓴 책입니다. 그들의 책은 진리가 아니라 욕망에 더 가깝습니다. 그들 역시 끊임없는 생명력의 발산으로 유지되는 시스템의 일부에 불과하니까요.
그들의 책은 고전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스타일북입니다. 이 책들은 기나긴 언어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 무수한 문장들 가운데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통찰과 촌철살인의 표현들이 일부 발견되는 것 뿐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주저없이 남동생들이 아니라 자기 세계 확장에 대한 가능성을 선택할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하이데거 따위가 과연 우리를, 남동생을 선택할까요.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쟁 미치광이 알렉산더 따위를 선택하지 않을까요.)

그러고 나서는 이것이 바로 진리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말할 테죠. 이는, 그들이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이 시스템의 충실한 하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고전의 저자들은,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해 왔다고 항변하겠지만, 그들 역시 미래에 대한 기대감, 즉 희망이 있어야만 세월을 견뎌 낼 수 있는 한낱 사피엔스에 불과하며, 그 희망은 그들보다 열등한 남동생들로부터 가져온 것입니다.

희망은 창조될 수 없으니까요. 온 세상을 자기화 하려는 궁극적 목표는,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해야만 성취할 수 있기에, 사피엔스는 끊임없이 비교를 통해 우열을 가려내고, 이를 통해 희망을 느끼려 합니다.

우리가 금연을 백번 다짐하고 백 한번 흡연하는 것은, 그 쾌감에 환장해서가 아니라, 그런 작은 쾌감을 능가할 만한 희망의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가 소셜네트워크와 티비프로를 놓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거나, 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그 안에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고전이라는, 개인적인 희망의 글자들로 가득한 책은, 우리에게 그런 작은 기대감을 선사하지 못합니다. 고전에는 지혜의 말씀이 가득하지만,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말씀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고전의 저자들은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능력과 높은 지능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인류에게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기대감으로 책을 썼기 때문이죠.

고전은 대단한 책임에는 틀림없겠지만, 그 속에 담긴 위대한 통찰과 촌철살인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위대한 고전의 저자들은 시간을 견디기 위해, 그리고 자기 세계 확장이라는 희망을 위해 살아간 어떤 아저씨나 아가씨나 아주머니일 뿐이니까요.

지옥같은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남동생들은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언제까지나 어디에서나 존재할 것입니다. 그들을 외면한 채, 그들에게서 앗아 온 희망으로 살아간다면, 그 어떤 대단한 자유주의자라도 시스템의 노예에 불과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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